19화. 사랑/아가페 對 에로스
고양이 여인숙
19화. 사랑/아가페 對 에로스
[야이, 짜식 전화라두 하지!! 그럼 내가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지 !! 짜식이 덜 떨
어지긴 .]
내가 열려진 아파트 안으로 불쑥 들이닥쳤을 때 S는 분명히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의 바
지춤을 추스리며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마치 뭐 마른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그 자
체였다.
S로부터 떨어져 나간 은주가 하얗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피빛보다 더 붉은 진홍색 스커트를 아래 위로 쪼여입고 요염한 둔부를 손으로 쓸어 내리
며 뚫어질 듯이 나를 바라본다. 저 옷은 바디 히트를 보고 자신도 캐서린 터너처럼 강한
여자가 되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남대문 시장에서 사오던 그 옷이 아닌가. 난 천천
히 그녀의 시선을 안면 중앙에 빨아 들이며 거실로 다가갔다.
[야!! 축하한다 . 은주씨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 오다니 . 아파트 문이 열려 있
기에 들어 왔지 . 은주씨가 작은 방에서 쓰윽 나오잖아 . 얼마나 반갑던지 . 우하하하
.]
S는 계속 횡설수설이었다.
[우리 나가서 저녁 먹자!! 근사한 데서 . 내가 살께!! 맞아, 오늘 같은 날은 당연히 내
가 사는 거지!! 그래, 푸하하하 .]
S는 웃고 있었지만 내게는 마치 절규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때 은주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뭐, 나갈 것까지 있겠어요? 제가 저녁 준비할테니 여기서 그냥 한 잔씩 하죠?!! 그게 좋
겠죠? 건석씨?]
은주가 비린내나는 통속적인 몸짓으로 내 코 앞에서 반 바퀴 돈다. 그리고 나의 아랫배
를 쓰윽 쓰다듬으며 내 앞을 지나간다. 그래, 저건 은주가 아니야 . 이건석, 이건석 제
발 정신 바짝 차려야 해 .
[우와, 되게 맛있다!!]
아직도 S는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어디서 준비했는지 은주가 검은 상어 요리라고 덧붙
이며 분주하게 음식을 탁자 위에 놓는다. 상어를 이용한 회, 포, 생냉채 등등 . 은주의
요리 솜씨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비린내가 싫어 고등어 한 마리도 못 만지
던 그녀 . 그녀 .
은주가 내 술잔에 붉은 와인을 따른다. 그녀의 손톱에서 반짝거리는 흑장미 빛 메니큐어
. 그 메니큐어 속에 투영되는 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은주 여전히 내 앞에 있는 은
주는 내 가슴을 설레이게 하며 이 세상 그 무엇을 주고서라도 바꿀 수 없는 내 전부인데
. 난 와락 술을 목구멍 속으로 부어 넣는다. 그리고 잔을 S에게 건네준다.
[은주씨의 건강한 귀국과 에 또 건석의 .]
[집어치워!!]
오늘 따라 병신같은 짓을 하는 친구 놈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 놓곤 곧 후회하고 만다. 얼
마나 고마운 친구인가? 그 지겨운 뫼비우스의 지옥을 탈출해서 마침내 현실에서 깨어나던
그 날 새벽, 내 목을 껴안고 몇 시간이나 기뻐서 날뛰던 그런 소중한 친구가 아니던가?
그에게 내 운명의 저주를 쏟아 부을 그 무슨 명목이라도 있단 말인가? S가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술을 홀짝인다. 내가 천천히 잔을 내어민다.
[난 뭐에 대해서 건배하고 싶으냐하면 너처럼 멋진 친구를 나같은 속물에게 허락하신
그 위대한 분께 .]
[짜식 덜 떨어지긴 .]
술이 그나하게 오른 S는 그만 가야겠다고 휘청이며 일어난다. 양주에 맥주, 소주까지 짬
뽕으로 때린 우리는 거의 인사불성 상태에 가까웠다.
[나 가야 해 . 오늘이 니네들 제 이의 신혼 첫날 밤이 아냐 ?]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자고 가 .]
내가 겨우 S를 껴안고 쓰러지고 자빠지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며 우
리 둘은 약속이나 한듯이 주정을 떨기 시작한다. S가 주절주절 말도 안되는 소릴 해댄다
.
[야, 임마 . 니가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이 제 정신으로 돌아오던 날 내가 얼마나 기뻤
는지 알아? . 짜식 넌 상상도 못할 거야 .]
[S야 S야 너 근사한 시나리오 찾고 있지 . 아마도 내가 써줘야 할 운명인가 보다 .]
[짜식이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릴 하냐 .]
[이건 분명히 히트 친다니까 .]
[놀구있네 .]
그리고 둘이서 경쟁적으로 내뿜는 코고는 소리가 새벽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소근거리는 소리에 나의 의식이 흔들리듯이 몰리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S의 목소리였다 . 이미 그의 호흡은 목구멍까지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S씨도 원하는 거잖아요? .]
S의 배 위에 가볍게 올라탄 은주의 날렵한 육체의 곡선이 하얀 나이트 가운 사이로 비취
고 있었다. S는 죽을 상이 되어서 어떡하든 이 지겨운 유혹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S가 낮게 속삭인다.
[이러지 마 .]
[남자란 다 똑같은 족속들인데 내숭 떨지 말아요 .]
[정말 미쳤군!!]
S가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은주가 좀 더 빨랐다. 억센 힘으로 S를 확
밀치는 것이었다. 술까지 취한 S는 갑자기 당하는 이 황당한 사건에 그저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은주는 정말 자신의 말대로 철저한 지옥을 준비한 게 틀림이 없었다.
S의 옷들이 벗겨져 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난 이 모든 것들이 제발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꿈이기를 간절히 원하며 울분을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새벽의 사건 이후 S는 나의 아파트에 다시는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S의 눈에는 나와
은주 둘 다 변태 성욕자로 보였던 게 틀림이 없었다. 그 사건은 어떤 도전이나 고문보
다도 훨씬 더 효과가 있었고 그 새벽 이후로 나와 S는 지독한 수치감과 환멸 속에서 신
음하고 있었다.
그해 시월 세상은 때아닌 휴거 열풍으로 온통 술렁이고 있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
로 올라 간다는 사람들과 그들을 조소하고 비웃는 무리들로 세상이 휘청이고 있었다. 3대
방송사는 연일 그 사건을 특집으로 다루었고, sbs인가에서는 휴거에 관한 미국인의 의식
을 조사해서 방영했는데 미국인의 70 퍼센트가 휴거를 믿노라고 발표한다. 그러면서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그 유명한 물리학자에 가까운 신학자 "할 린세이(Hal Lindsey) 와의
인터뷰도 잠깐 소개한다. 한때 나의 우상의 경지까지 오르던 그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
다.
[저희들은 조만간 휴거를 증명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물리적 토대를 발표할 겁니다. 일종
의 순간 공간 전이 이동인데 .]
흥, 이제서 아셨나보군 . <세상엔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란 없다>란 지론이 이미 나
의 체험적 철학이 되어버렸고 저치가 설마 나와 은주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라고 중
얼거린다. 그는 계속 덧붙인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떠들고 있는 10월 28일 론은 극단적인 세대주의(世代主義) 자들
이 펼치는 위험한 곡예와도 같은 거죠 반드시 그날 새벽 4 시에 그들은 쥐구멍 찾기가
바쁠 걸요 .]
그의 지적은 맞아 떨어졌고 그렇게 시월이 숨가쁘게 지나갔다.
겨울이 다가오고 난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배부른 공상이 된
지 오래였고 이젠 더이상 숨을 쉰다는 것 조차도 힘이 들고 나른하게 조여오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동녘 창에 해의 머리통이 비치기가 무섭게 은주는 아파트 어느 한쪽으로 숨어들어 갔다
. 그리고 그 태양이 꼬리를 감추기가 무섭게 은주는 생생한 입술을 반들거리며 내 앞에
나타나서 요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더 웃기는 것은 급속한 나의 퇴락함이었다 . 그것은 함몰이던가? 아니면 그냥 먼지가 되
어가는 퇴층의 과정이던가 .
아, 난 은주가 사라지고 난 그 텅 빈 한낮의 시간 동안에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무력한 인간 그 자체였다. 은주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 조차도 알아보기가 귀찮았다
.
그러나 말하지 않는 내 의식은 알고 있었다. 28평형의 아파트는 모두 세 개의 방으로 꾸
며져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작은 방의 벽 한구석에는 장롱 대신에 건축 당시에 아예 만들어
놓은 붙박이 장이 하나 있었다. 분명 은주는 그 장롱 속에서 한낮의 태양을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감히 난 그 장롱을 열어본다 거나 하는 짓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은주도 한 마디 언급도 없었 건만 마치 그 장롱은 금단의 성역
처럼 두려움으로 나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은주가 낮잠을 자는 동안 나 역시도 커텐이
란 커텐은 다 치고 오로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깊은 잠 속에서 내가 꾸는 꿈은 동일한 것들이었다. 예의 버스가 음산한 바람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버스 앞에 멈추어서면 여자의 머리가 내게로 굴러온다.
그리고 그 머리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한다.
제발 제발 절 이 깊은 지옥에서 구해주세요 .
그 끔찍한 악몽에서 날 깨우는 것은 언제나 전화벨 소리였다. 땀에 홈빡 젖어 수화기를
들면 그때마다 전화 속의 인물은 울음소리로 시작했다.
[이건석씨죠? 꼭 만나야 합니다!! 제발 .]
어딘가 귀에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는 늘 다급했고 내가 누구냐고 물어도 여자는 만나서
모든 걸 얘기해주겠다고만 할 뿐이었다. 난 힘없이 전화를 끊고는 곧이어 그 전화의 내
용을 잊어버리곤 했다.
말하기조차 수치스럽고 이글을 쓰는 지금에서도 손이 떨리지만 은주가 깨어나고부터의 밤
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광란의 밤이었다. 은주는 섹스가 자신의 상처 받은 영
혼의 구원인냥 섬찟하도록 탐닉증을 보여왔다. 처음엔 난 무슨 성인군자인냥 은주를 타
일러보고 거절하기를 거듭했지만 어느 순간에 나 역시도 그 성의 쾌락에 깊이 발을 담그
고 있었다.
내 가련한 은주는 지칠줄 모르는 성욕의 화신이었다. 나의 영혼과 육신은 그녀의 불타는
욕망의 제물로 바쳐지고 있었고 그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는 결코 제동 장치가 작동이
되는 법이 없었다. 밤이 되면 그녀는 작은 방에서 검은 상어 새끼들이 발버둥 치는 그
물을 어깨에 짊어지고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기름 투성이의 고기를 무슨 사육하는
짐승에게 먹이듯 먹여 놓곤 곧 우리는 짐숭같은 섹스의 행위로 들어 갔다.
샤워기의 물줄기로부터 뜨거운 김이 안개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
께 은주의 한쪽 팔이 거울에 가득히 고인 서리를 쓸어내며 아래로 떨어진다. 그 서리가
지워져나간 자리에 비쳐지는 나의 반쪽 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은주의 뒤에서 미친
듯이 은주를 끌어 당기며 마지막 고지를 향해서 달려가는 내 모습은 잊어버리고 싶었다
. 은주가 격한 신음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말해요!! 사랑한다고!!]
[사랑해!!]
[부족해요!! 더 큰 소리로!!]
사랑한다는 말은 어느새 쾌락의 절정에서 내뿜는 신음 소리보다 더 못한 위치로 떨어진지
오래고 은주는 이미 식어버린 나를 이끌고 이번에는 베란다로 다가간다. 그녀의 입술이
내 혀 속으로 밀려들어오고 그녀는 마치 내 혓바닥의 비늘이 몇 개인지를 헤아리려는
듯이 그렇게 탐닉하고 또 탐닉한다.
[아, 아 이젠 도저히 .]
그러나 은주는 나의 의지를 개발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듯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아래로 내려간다. 눈이 하얗게 세상을 적신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내가 베란다의 두터
운 페어그라스를 밀치자 눈발이 확하며 우리 두사람을 공격한다. 그 눈의 차가움이 일순
간 내 저 밑 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일말의 양심을 일깨워 세운다. 나의 아래에서 발악을
하는 은주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운다.
[우린 미쳐가고 있어 . 이건, 이건 사랑도 아니야 .]
은주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인다.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한 건가요?!! 당신을 삼켜버릴 거예요!! 잊으셨나요?!! 우린 같이
죽기로 한 것 !!]
[그래, 죽자 . 죽어버리자!! 이대로 산다는 건 죄악이야!!]
난 울부짖으며 은주를 품 안으로 끌어 안는다. 눈내리는 베란다에서 전라의 남녀가 울고
있다. 내가 은주를 바라본다.
[내가 먼저 뛰어내릴까?]
은주가 조소하듯이 날 바라본다.
[그럴 용기라도 있으세요?]
난 아무 말없이 베란다의 창문을 최대한 열었다. 광란하는 눈바람이 하얀 목련꽃처럼 내
몸뚱아리를 엄습한다. 사랑의 찢기워진 미증유의 편린들을 내 몸에 숙주처럼 꽃 피우며
베란다의 난간을 넘어선다. 그리고 내가 미련없이 저 편안한 세상으로 훌쩍 뛰어내리려
고 할 때 갑자기 악마 같은 괴성이 내 뒤로부터 들려왔다.
[널 죽이고 싶어!!]
은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나의 몸이 공중에서 튕겨나며 뒤의 거실로 가볍게
나가 떨어진다. 그리고 은주의 고개가 휙하고 돌아가며 베란다의 페어그라스가 쾅하고
닫힌다. 분노하는 은주가 뚜벅뚜벅 걸으며 내게로 다가온다. 그녀가 혀를 날름대며 쓰러
진 나의 주위를 뱅뱅 돈다.
[그렇게도 니가 대단한 존재야?!! 왜 날 의심하는 거야?!!]
난 그런 은주의 모습이 너무도 끔찍해서 눈을 감는다. 은주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눈을 떠!! 눈을 떠서 날 보란 말이야!! 니가 꿈꾸던 은주를 보란 말이야!!]
난 띄엄띄엄 말을 한다.
[넌 은주가 아냐 . 넌 아무 것도 아냐 .]
[내가 은주가 아니라구? 그럼 뭐야!! 이 약한 심장은 뭐야?!! 뭐냐구?!!]
순간 나의 가슴 위로 뭔가 뜨듯한 것이 왈칵하고 쏟아진다. 눈을 뜨자 온통 피투성이가
된 은주가 내 앞에서 발악을 한다. 그녀가 자신의 심장을 잡고 경련을 일으킨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한번 더 각혈을 하던 은주의 피 덩어리가 내 가슴 위에 뱉어져 왔다.
그녀로부터 물러나려고 할 때 은주가 나의 팔을 억세게 잡는다.
[언제나 내게서 도망만 가려고 하지 .]
은주의 모습은 너무도 끔찍해서 차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피투성이의 은
주의 손이 미끄러지면서 나의 허벅지로 다가온다.
[이러지 마!!]
내가 고함을 질렀지만 은주는 더 집요하게 나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
[제발 이러지 마 .]
은주가 이번에는 다시 나의 입술을 찾는다.
[건석씨와 난 같이 존재해야만 해 .]
눈물을 흘리던 내가 은주를 바라본다. 은주의 입에선 계속 피가 벌컥이며 튀어나오고 있
었다. 그녀가 나의 가슴 속으로 미친 듯이 파고 들며 애원한다.
[약속해줘요 . 날 버리지 않는다고 .]
내가 벌겋게 충혈이 된 눈으로 은주를 바라본다.
[이젠 이젠 아무 것도 약속할 수가 없어 .]
은주의 눈에서 빛이 사라져 가며 그녀는 이제 거의 숨을 거두는 것만 같았다.
[말해줘요 . 날 여전히 여전히 사랑한다고 .]
[대체 날더러 어떡하란 말이야!!]
나의 절규가 아파트 안을 가득히 울리고 내리는 눈만 아니었다면 아파트 단지에 비상이
걸렸으리라. 난 마구 흐느끼며 피투성이의 은주를 끌어안는다. 이 따스한 살갖의 촉감,
그리고 검붉게 피어있는 유두의 감미로움은 여전히 은주이건만 영혼은 사랑에 굶주린
악마의 형상을 하고있으니 .
그 광란의 밤 이후 은주의 각혈은 빈도수를 더해가고 있었다. 숫제 어느 날은 저녁이 되
고 밤이 되어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난 조바심과 안달로
그 작은 방 문 앞에서 수도 없이 왔다 갔다하고 있었다. 마침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그 장롱의 손잡이까지 손을 가져 가다간 다시 후다닥 그 방을 뛰쳐나오곤 했다
.
연체된 관리비를 납입하기 위해서 근 몇 달 만에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태양이 두려웠다
. 내 살갖에 닿는 태양의 살점들이 너무도 두렵게 느껴지고 있었다. 내 얼굴은 하얗게 탈
색되어 있었고 단지 내에 위치한 은행 출입구에 비쳐진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섬뜩한 몰
골이었다.
나의 책들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쪽에선 매달 온라인으로 인지
료를 충실히 납입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S의 힘이 컸으리라.
불현듯 S가 그리워졌다. 오늘쯤은 S를 찾아가 보리라 .
[너무 많이 체납되어 관리소에 직접 가셔서 납입하세요.]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던 은행 여자가 살짝 웃으며 말한다. 지친 발걸음을 돌릴 때 얼핏
바라본 은행 여자의 안색은 금새 변하고 있었다. 아니, 은행 내의 모든 사람들이 재빨리
날 보고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뒷통수에 느끼며 관리소로 향한다.
저놈의 태양 1월의 마지막에서 대기의 차가운 난류를 관조하듯이 높이 떠있는 태양은 끝
없이 나를 추적하고 있었다. 관리비 장부를 뒤적이는 수위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게
보인다. 떨리는 손으로 돈을 지불하고 내가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저 .]
내가 천천히 돌아선다.
[바쁘시지 않다면 잠깐 야그 좀 했으면 하는디 .]
좁은 수위실 안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아늑했다. 석유 난로 위에서 고즈넉히
끓고 있는 보리차를 따라주며 이미 60의 세월로 접어드는 남자가 입을 연다.
[내막은 잘 모르지만 말씀을 드려야 겠기에 .]
수위를 바라봤을 때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무척 조심하는 눈치였다.
[지금도 저쪽 놀이터에서 두 사람이 선상님을 지켜보고 있을 거구먼유 .]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석 달 전이던가? 샥시가 미국에서 돌아오던 날 있잖유 . 아, 그 다음 날부터 저 잡 것
들이 스물 네 시간 아파트에서 아예 살림을 차렸지 뭔감유? 심심하면 날더러 선상님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게 아님감유 . 지가 알면 안될까유 ? 대체 무슨 일이람유?]
난 한동안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씬 그냥 모르는 척해주세요 . 그럼 .]
역시 놈들은 종각 지하철 역까지 따라나오고 있었다. 노골적인 미행이었고 무척이나 민감
하고 예민한 행동들이었다. 미국 측의 보고를 받은 보건 당국 요원 아니면 특수기관에 근
무하는 자들일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아마도 미국 측에선 있는 거짓말 없는 거짓말로 은주와 나의 상황을 거의 치명적 위험 바
이러스 보균자 정도로 몰아부쳤을 거고 순진한 당국에서는 분별력없이 제 2의 에이즈 감염
자 정도로 우릴 치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사태는 나의 짐작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내가 종각 역 제일
은행 앞 차가운 돌 벤취에 앉아 무의탁 환자 돕기 자선 콘써트를 보고 있을 때였다. 저쪽
허리우드 극장 쪽으로부터 검은 색 BMW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날 미행하던 두 명의 남자들이 그 BMW로 잽싸게 뛰어가고 있었다. BMW의 코
팅된
창문이 쓰윽 내려가면서 얼핏 내가 본 것은 바로 미국인들이었다. 아, 그들은 여기까지
추적해 들어온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차가운 바람 속에서 현기증이 몰려왔다
.
한참 뜨고 있던 박정운의 노래를 열창하는 무명의 가수 앞에 놓여진 헌금함 속에 지폐 몇
장을 집어 넣고는 나는 천천히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대 숨결 느낄수 없고
무겁게 나를 누르는 이 빈 공간은
끝없는 그대 이름 부르곤 했어 .
오늘 같은 밤이면 은주를 나의 품에 가득 안고서 멈춰진 시간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머물
고 싶었다 . 눈 감으면 느낄 수 있는 은주의 체취 , 내게 육체가 주는 쾌락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에 비하면 정말 모래처럼 푸석한 가치일 뿐이란 걸 가르쳐준 은주는 이미 오
래 전에 가고 없었다. 이제 이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올텐데 그리고 벚꽃이 활짝 필텐
데 난 난 누구와 그 벚꽃 아래를 걸으란 말인가 .
[지금 너무 바빠서 만나실 수 없답니다 .]
인사동 골목에 위치한 씨네텔 S를 찾았을 때는 이미 오후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씨네텔 S는 방송국에 드라마를 제작해서 납품하는 조그마한 외주업체였는데 S는 요즘 베
스트 셀러를 미니시리즈로 각색한 작품을 연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 더 이상은 생
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사랑하는 친구는 지금 무지 바쁠 뿐이고 그래서 날 만날 시간조차 없는 것으로만 생각
하기로 했다. 쓸쓸히 돌아서는 날 커텐 뒤에 숨어서 바라보는 S의 냉담한 시선을 폐부
깊숙히에서 느낄 수 있었다.
뛰어갔다.
10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미친듯이 주머니에서 키를 찾아서 아파트 문을
땄다. 그리고 사정없이 작은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여름내 쌓아두었던 옷가지들이 내뿜
는 메퀘한 냄새가 코를 찌르며 덮쳐온다. 마구 소리를 지른다.
[밤이 되었어!! 어두워졌다구!! 이젠 나와!! 모습을 보이라구!]
장롱 앞을 미친 듯이 왔다갔다하던 내가 마침내 장롱의 손잡이를 굳게 잡는다. 그리고 천
천히 중얼거린다.
[너의 광란의 사랑도 내겐 과분해 . 그러니 모습을 보이라구 . 제발 고독해 고독해서
미치겠어 .]
옅은 경련을 일으키며 처음으로 은주와 나의 침묵의 불문률을 깨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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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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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장 사랑/아가페 對 에로스
" "
내가 막 그 작은 장롱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따르르릉 두 대의 전화가 요란하게 동
시에 스테레오로 울부짖고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난 장롱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다시 돌아서서 방을 나간다. 그리고 여전히 앵앵거리는 전화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벨이 지쳐갈 때 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
였다.
[흐흐흐흑 .]
[여보세요 . 누구십니까?]
여자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는지 겨우 말문을 턴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만나주세요 .]
[대체 누구십니까?]
한참 후 여자는 겨우 울음을 멈추고 꿋꿋하게 말한다.
[절 기억 못하시겠어요?]
순간 내 머리 곁으로 한 줄기 섬광이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그래 바로 그 여자다 .
[자기 수술 잘 끝나고 튼튼한 심장 가지고 돌아오면 우리 이런 데서 살자. 옥수수도 키우
고 원두막도 짓고 자기 좋아하는 담쟁이로 온통 집을 덮어버리고 그렇게 살자 .]
눈이 하얗게 내린 안면도의 바닷가에서 이제 막 기우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
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섬이었지만 어젯밤 뜻하지 않은 여자의 전화 한 통은 운명처
럼 날 다시 이 섬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어느 날 분풀이로 떠났던 아주 우연한 여행에서 시작되는 굴절된 공포의 기억들 . 내 스
스로 이름 붙여버린 소아병적인 발상의 이름 고양이 여인숙 . 그리고 져니 광추면 괴물
고양이 소녀 은주 왜 그 악몽들은 이토록 잔인하게 서른이 넘도록 내 인생에 달라붙
어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그렇게 오랫동안 맴을 돌며 서성이는 건가?
제발 제발 삼봉 해수욕장의 그 넓은 모래사장 위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눈을 감아도 파
도 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은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건석씨 왜 다시 이곳엘 왔나요 .
잊어야 해요 . 당신이 잡으려는 것들은 은주가 아네요 .
미완의 욕망만이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악마일 뿐이예요 .
이래선 안돼요 . 은주를 죽이세요 .
모두를 위하는 길이예요 .
이제 그만 제 영혼을 자유롭게 놓아주세요 .
안면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진득한 지옥의 탁한 냄새와 바로 얼마
전에 겪은 듯한 그 생생한 살육만이 안면도의 구석구석에 베여 있을 뿐, 정작 그리운 은
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삼봉 해수욕장의 그 넓은 해안길을 따라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 눈을 맞으며 그
냥 녹아버리고 싶었다. 백 날을 너의 창 문 앞에서 니가 창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다 마
침내 눈사람이 되어 버려도 좋다라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오늘은 은주를 만나는 그
순간까지 그냥 이대로 눈사람이 되고 싶었다.
파도가 밀려나간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등대 뒤로 한 척의 배
가 가물거리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 .]
내가 눈을 번쩍 뜨며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그래, 그 여자였다. 다소 헬쑥해진 모습이
었지만 미친듯이 공격해오던 살인 고양이 떼들을 향해 폭죽처럼 사진기 후레쉬를 터뜨리
던 그 여자였다.
[맞군요 . 선생님 .]
여자는 금새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난 마치 악몽이 내 눈 앞에 재현되는 듯
이 덜덜 떨리는 눈으로 여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떻게 .]
[줄곧 선생님을 찾았더랬어요 . 89년 8월에 선생님과 그 여자분이 성황당 옆 납골당에서
발견된 사건이 접수되어 있더군요 . 아시겠지만 안면 경찰서엔 작년 8월 저희들의 피해
사건도 접수되어 있었구요 .]
내가 꿈결처럼 여자를 바라본다.
[저희들이란 .]
여자가 잠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발끝으로 툭툭 모래 속에 박힌 소라껍질을 파낸다.
[신혜와 나 이렇게 둘 말이죠 .]
겨우 말문을 열던 여자가 풀썩 자리에 쓰러지듯이 쪼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마구 울기 시작한다. 여자는 설움이 북받치는지 한참을 울뿐이었
다. 하얀 눈은 그녀의 남루한 어깨 위에 쌓이다가 이내 바람에 우르르 떨어진곤 한다. 내
가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세운다.
[자, 자 .]
[죄송해요 . 이렬려구 했던 게 아닌데 선생님을 뵈니 갑자기 너무 무서워져서 .]
[압니다 . 사실 저도 한순간 너무 무서웠습니다 .]
여자가 어린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내게 손을 스윽 내어민다.
[인사가 늦었죠. 전 혜수라고 해요 . 신혜수 .]
내가 그녀의 작고 고운 손을 꼭 쥐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차 가지고 오셨나요?]
[아뇨.]
[그럼 제 차로 들어가실래요?]
여자가 가리킨 해변 입구에 빨간 프라이드 한 대가 조용히 서있다.
[그래요, 날씨가 차군요 . 들어갑시다.]
차가 있는 곳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쏴한 바닷바람이 우리 두 사람의 흐트러진 추억들
을 선명하게 재조립해주는 것 같았다. 여자는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잔혹했던 기
억들이 다만 꿈이었다는 듯이 대화의 꼬리를 풀어나갔다.
[아무리 부인해도 이젠 어쩔 수 없군요 . 아세요?]
여자가 갑자기 나를 휙 바라본다. 여자의 파리한 입술이 무겁던 기분을 퍽이나 쇄락(灑落
)시킨다.
[그 지옥을 온전한 상태로 빠져나온 사람이 우리 둘 뿐이란 사실.]
[다행이군요.]
[말씀해주세요.]
여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날 또렷히 바라본다.
[버스에 탔던 그 여자분 .]
순간 악몽이 나를 덮친다.
괴물의 날카로운 손에 목이 잡힌 여자의 친구 입에서 벌컥 벌컥 튀어 나오던 선혈의 덩어
리. 혜수라는 이 여자의 후레쉬 공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괴물이 고통스러운 듯이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여자의 목을 잡고 힘을 가하던 소리.
으드득 하는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이 거의 거꾸로 돌아가고 , 혜수라는 여자
가 비명을 지르며 괴물을 향해 덤벼들고 , 괴물의 등짝에 올라타서는 마구 괴물을 때리던
여자의 얼굴로 퍽하고 튀어오르던 피 . 그 선혈이 홍수처럼 여자의 얼굴 위에서 타내리
고 , 동시에 흔들리는 버스 구석으로 마구 굴러가던 그 머리 .
지금도 수시로 악몽 속에서 나를 향해 굴러오는 여자의 머리 .
혜수라는 여자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기고 있었다. 그 이후 이 여자는 실신을 했으니까 .
운전대를 잡아!!> 내가 은주에게 소리를 지르고 날 바라보던 은주 . 은주가 맞다면
운전대를 잡아!! 지난 달 내가 가르쳐 줬잖아!!>
[그분은 정상이겠죠? 아님 신혜처럼 송장이거나 .]
내가 언뜻 현실로 돌아오며 창백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본다.
[그럼 친구는 .]
[완전히 넋이 나갔어요 . 대소변도 못가릴 정도예요 .]
프라이드 안은 꽤 넉넉했다. 여자가 보온 병의 두껑을 열고 커피를 따라준다.
[절 만나자고 한 건 .]
[저 사람들은 누군가요?]
혜수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명의 남자가 얼른 수풀 속에 감추어 두었던 BM
W로 올라탄다. 내가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안면도로 오던 버스의 꽁무니에 붙어 끝
없이 나를 따라오던 저 낯선 이방인들 .
[신경쓰지 말아요.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 .]
내가 고개를 뒤로 뉘이며 눈을 감는다.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연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고 답해주세요 . 전 지금 벼랑의 끝에 내어 몰려 있어요 . 살
아내고 싶어요 .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을 지푸라기 정도로 이용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
어요 . 아시겠죠? 유일하게 절 이해하실 분이 선생님뿐이란 걸 .]
[ .]
여자가 정지된 BMW를 노려보면서 말을 잇는다.
[마을 사람들이 신혜와 절 발견했을 당시엔 저 역시도 혼이 나간 상태였다더군요 . 신혜
의 부모님과 저의 부모님은 우리 둘을 곧장 꽤 유명하다는 기도원에 입원시켰나봐요 . 다
행히 길진 않았다더군요 .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제가 정신이 돌아온 거예요 . 기적이 일
어났다고 기도원에 잔치가 벌어졌죠 . 설명드리지 않아도 기적따윈 웃기는 쇼맨쉽이란
걸 잘 아실 거예요 . 선생님에 대해서 조사했었죠. 선생님도 작년 8월 24일 새벽 4시에
오랜 정신착란에서 깨어나셨더군요.]
내가 식은 땀을 흘리며 여자를 휙 노려본다.
[요점이 뭐요?]
여자가 나를 한동안 바라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틀렸군요 .]
[뭐가 틀렸다는 거지?]
[도와주세요!! 제 친구는 지금 지옥 속을 헤메이고 있어요 . 아니, 우리가 모르던 시간
의 역사 속에서 그 괴물들에게 희생 당한 수많은 영혼들이 오늘도 안식을 찾지 못한 채 울
부짖고 있어요!! 아실 거예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난 내리겠어!!]
내가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문을 열고 나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차가 휘청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혜수가 차의 시동을 건 것이다.
[도망만 친다고 해결되진 않아요!!]
차가 어느새 가볍게 출발하고 있었다.
[미쳤군!!]
[그래요!! 전 이미 육 개월 전에 미쳐버렸죠!! 이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사
는 거냐구요?!!]
[세우지 못해!!]
차는 헛바퀴를 돌며 모래 위를 마구 빠져나가고 있었다. 덜컹하며 차가 비포장 도로 위로
튀어오른다. 여유를 부리던 BMW가 그제서야 당황하며 해변을 가볍게 미끄러져 달려온
다
. 내가 얼핏 신혜를 바라보자 그녀는 울고 있었다. 여자는 주도 면밀한 계획 아래에서
나를 초대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녀가 계획하고 있는 비밀이 무엇이든 간에 다시는 이
따위 지랄같은 사건에 얽혀 들어선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차를 세워!!]
길의 끝에서 여자가 우회전을 하며 차를 세운다. 내가 신혜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리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내가 여자를 바라본다. 그녀가 뜷어질 듯이 백미러를 노려본다. 아니나 다를까 백미러를
통해서 BMW가 눈발을 헤치고 잽싸게 달려오고 있다.
삼봉 해수욕장 주변은 한국 소나무들이 빼곡히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유명하다.
그 소나무들 위로 눈이 쌓여가고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일렬로 늘어서 장관을 이루
는 것 같았다. 닭 쫒는 미친 개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던 BMW가 우리를 지나쳐 저만치
사
라져가고 이내 신혜는 프라이드를 좁은 소나무 숲 길 안으로 몰고 들어간다.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않아도 난 .]
[제 친구를 한 번만 만나주세요!! 보시면!!]
순간 차가 끼이익 왼쪽으로 꺽히며 소나무를 쾅하고 들이박고 만다. 내가 핸들을 꺽었던
것이다.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씩씩거리고 있을 뿐이었
다.
[정말 예의가 없군!! 내게 이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
신혜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여자에게 뭐라고 다시 쏘아대려다 그냥 돌아선다
. 그리고 문을 반쯤 열 때였다. 날 주춤하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몰려들어오는 눈발과
함께 새어나온다.
[어젯밤에도 도움을 청해왔어요 . 배에 분명히 분명히 글자가 새겨졌어요 . 엑소시스
트처럼 . 전 그게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인줄 알았어요 .]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윌리엄 피터 블레티어의 엑소시스트는 철저한 고증으로 씌여
졌고 혈액의 유압으로 글자 쓰기는 귀신 들린 자들의 아주 오랜 고전적인 메세지 전달 방
식이었다. 내가 다시 문을 쾅하고 닫는다.
[어디에 씌여졌지 ?]
혜수는 잠시 입술을 깨문다. 그러더니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전방을 노려본다.
[처음엔 배 부분이었어요 . 근데 근데 어제는 옷을 갈아 입히려는데 허벅지에 그래
요, 아주 선명한 글씨였어요 .]
[내용은 ?]
그녀가 입술을 깨문다.
[혜수야 너무 어두워 . 날 좀 구해줘 .]
내가 손바닥에 고인 땀을 무릎에다 쓱쓱 문질러 닦는다. 신혜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나
를 휙 바라본다.
[선생님만이 하실 수 있어요!! 전 알아요!! 그때 개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버스를 세
우던 선생님의 용기를 기억하고 있어요!!]
[난 아냐 .]
[왜요? 신혜가 개 한 마리보다 못해서 인가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알잖아!! 우린 다시 그 지옥 속으로 들어갈 수도,
또 들어가서도 안돼 .]
혜수가 차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정신이 돌아오던 그 날 새벽 난 그 동안 나를 에워싸던 신을 비웃으며 신혜를 데리고 기
도원을 빠져나왔죠. 그리고 찾아 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어요. 지난 몇 달 동안 제가 한
것이라곤 다시 한 번 그 지옥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일 뿐이었죠.]
내가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혜수를 바라본다.
[그땐 우린 운이 좋았던 거야!!]
[다시 또 좋을 수도 있어요 .]
[지금은 안돼! 무슨 뜻인줄 알아? 지금은 안된다구!!]
혜수가 한동안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나의 뜻을 알았다는 듯이 시동을 건다. 박혀 있
던 소나무에서 차가 빠져나오면서 다시 넓은 비포장도로로 향한다. 차가 막 비포장 도로
로 접어들 때였다. 예의 그 시커먼 BMW가 끼이익하며 우리 앞을 막아선다. 더 이상 어
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을 다닌다는 게 좀 우스운 짓이란 생각도 들었
다. 혜수와 난 동시에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BMW에 탄 남자들도 차에서 내린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내가 차에서 내린 두 명의 남자들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
[시간 좀 내주시죠? 안에 계신 분들이 얘길 좀 했으면 하는데.]
짙은 코팅 윈도우가 스르르 내려가며 안에 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앞 좌석엔 미국
인이 타고 있었고 뒤엔 꽤 점잖은 듯한 30 대의 남자가 눈을 껌뻑이며 우리를 바라본다.
내가 혜수를 바라보자 그녀가 과감하게 뒷문을 열고 들어간다. 실례해요라고 짧게 말한
뒤 뒷의자에 앉은 혜수가 나를 보며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차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들어가자 마자 BMW는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인다. 우리가 어이없다는 표
정으로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혜수의 프라이드를 예의 두 남자가 몰고 온다.
[캔 아이 스피크 잉글리쉬?]
내가 혜수를 바라보기가 무섭게 혜수의 입에서 슈얼하는 딱딱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미국
인이 다소 안심이 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대화를 시작한다.
[전 미국방성에서 근무하는 스티븐 바우어라고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저
희들도 알만큼 안다는 겁니다.]
대체 뭔 말을 하시는 겁니까?]
나의 불쾌한 심기를 금새 누그러뜨리는 말이 미국인의 입으로부터 새어나온다.
[코넬 대학에서 치루어지던 연구 자료들을 다 조사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예일대와의
공동 연구로 진행되어 오던 자료, 즉 성은주씨의 자기최면 동화상 테잎에 담긴 내용들
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내 목젖이 꿀꺽인다.
[얼마나 찾아 헤메였는지 , 그 동화상 속의 세계 말입니다 . 결국 여기와서 감이 잡히는
군요 .]
[이봐요!]
[놀라운 사실입니다. 벌써부터 파장 측진기가 난리를 부리고 있습니다. 조사해 봤더니 두
분 다 이근처 백사장의 성황당 아래에서 발견된 경험을 가지고 있더군요 .]
혜수가 얼굴을 붉힌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자기최면은 뭐고, 동화상은 또 .]
[조급해하지 마십시요 . 잠시 후에 보여드릴테니까 .]
스티븐이란 남자가 발정기의 숫캐처럼 음산한 눈으로 혜수를 바라본다. 혜수 역시도 그
남자의 눈빛에 압도 당하여 침을 꼴깍 삼킨다. 내가 언성을 높인다.
[차 세워요!!]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시는가 보군.]
남자의 언성은 사뭇 위압적이었다. 내가 남자를 바라본다.
[성은주씨는 이제 며칠 후면 죽을 몸이고 죽기 전에 우린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
이 있소 .]
내가 남자를 천천히 바라본다.
[심장은 더 이상 복개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썩어 있고 이젠 그녀에게 고착된 의학적 관심
을 넘어서서 우린 성은주씨를 닮은 새로운 대체가 필요하단 거요 .]
[이 개새끼들 .]
내가 미국인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남자는 꿈쩍도 않고 날 노려본다. 내가 열을 올린다
.
[그럼 지금까지 은주를 볼모로 잡고 있었단 말야?]
남자가 천천히 내 손목을 잡고 억센 힘으로 비틀어 떼어낸다. 그리고 이제는 옆에 공포
로 떨고 있는 혜수를 향한다.
[볼모라뇨? 우린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그녀의 심장 몇 점을 떼어내려던 거 뿐이었죠
.]
[헛소리 하지 말아!!]
[헛소리는 자네가 지껄이고 있는 것 같군!! 그 악마같은 계집이 얼마나 영악했는질 알아
? 삼십 명의 희생자를 내곤 먼저 꼬리를 치더라구 . 당신같은 답답한 좀생원을 건드리
지 않는 조건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져가라는 거야 . 하지만 너무 썩어있더군 . 우린 그
동안 오히려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도구에 불과했어 .]
그 억지 같은 반론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떨군다. 날 비웃듯이 바라보던 스티븐이 이젠
혜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젠 아가씨 얘길 좀 해볼까? 친구 분이 꽤 심각하다는데 .]
[어떻게 .]
순진하긴 쯧쯧 하는 눈으로 남자가 비시시 웃는다. 그리고 혜수의 하얀 목젖을 훔쳐
보다가 남자가 입술에 침을 적시며 속 보이는 제안을 던져 놓는다.
[피차에 도움을 줄 수있는 문제가 아닐까? 안 그렇습니까? 목사님?]
내가 뒷좌석의 목사라는 남자를 바라봤을 때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남자는 하얗
게 쌓여가는 세상을 향해서 깊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도로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차는
멈추고 있었다. 거대한 알루미늄의 탑차가 눈에 덮여가며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 미국인 남자가 먼저 차에서 목사라는 남자가 내렸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려는 혜수의
팔을 잡고 내가 말한다.
[혜수, 아무 말도 듣지 마!!]
혜수가 나를 한동안 바라본다.
[어차피 이대로는 견딜 수 없는 일 아네요?]
혜수가 차에서 내리고 혼자 남겨진 차 안에선 다시 지독한 두통이 몰려오는 듯했다.
은주는 그동안 미국과 나의 아파트를 오가며 그들과 계약을 한 게 분명했다. 자신의 심장
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오만한 계약과 맞바꿔 가며 그들에게 제공한 게 분명했다. 하
지만 그 순진한 악마는 오히려 저 지독한 인간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고 어쩌면 나마저
이미 저들의 실험 도구로 전락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파괴된 심장이 견딜 수 없게 되자 내 가슴에 피를 토하며 실신하던 그녀는 지금
이 시간도 코넬 대학의 어두운 지하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의 생체실험 도구로 희생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한 채 그들을 노려봤을 때 이미 아무 것도 모르는 혜수는
그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가며 그 거대한 탑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안돼 . 다시는 안돼 .
하지만 이미 상황은 마지막 파국을 향하여 거대하게 치닫고 있는 게 분명했고 지금까지의
어떠한 공포도 어린애 장난으로 비웃고 마는 엄청난 죽음들이 내게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땅으로 내디디고 있었다. 하얀 눈이 소리없이 쌓이며 뽀드득 소
리를 내고 있었다.
19화. 사랑/아가페 對 에로스
[야이, 짜식 전화라두 하지!! 그럼 내가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지 !! 짜식이 덜 떨
어지긴 .]
내가 열려진 아파트 안으로 불쑥 들이닥쳤을 때 S는 분명히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의 바
지춤을 추스리며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마치 뭐 마른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그 자
체였다.
S로부터 떨어져 나간 은주가 하얗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피빛보다 더 붉은 진홍색 스커트를 아래 위로 쪼여입고 요염한 둔부를 손으로 쓸어 내리
며 뚫어질 듯이 나를 바라본다. 저 옷은 바디 히트를 보고 자신도 캐서린 터너처럼 강한
여자가 되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남대문 시장에서 사오던 그 옷이 아닌가. 난 천천
히 그녀의 시선을 안면 중앙에 빨아 들이며 거실로 다가갔다.
[야!! 축하한다 . 은주씨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 오다니 . 아파트 문이 열려 있
기에 들어 왔지 . 은주씨가 작은 방에서 쓰윽 나오잖아 . 얼마나 반갑던지 . 우하하하
.]
S는 계속 횡설수설이었다.
[우리 나가서 저녁 먹자!! 근사한 데서 . 내가 살께!! 맞아, 오늘 같은 날은 당연히 내
가 사는 거지!! 그래, 푸하하하 .]
S는 웃고 있었지만 내게는 마치 절규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때 은주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뭐, 나갈 것까지 있겠어요? 제가 저녁 준비할테니 여기서 그냥 한 잔씩 하죠?!! 그게 좋
겠죠? 건석씨?]
은주가 비린내나는 통속적인 몸짓으로 내 코 앞에서 반 바퀴 돈다. 그리고 나의 아랫배
를 쓰윽 쓰다듬으며 내 앞을 지나간다. 그래, 저건 은주가 아니야 . 이건석, 이건석 제
발 정신 바짝 차려야 해 .
[우와, 되게 맛있다!!]
아직도 S는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어디서 준비했는지 은주가 검은 상어 요리라고 덧붙
이며 분주하게 음식을 탁자 위에 놓는다. 상어를 이용한 회, 포, 생냉채 등등 . 은주의
요리 솜씨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비린내가 싫어 고등어 한 마리도 못 만지
던 그녀 . 그녀 .
은주가 내 술잔에 붉은 와인을 따른다. 그녀의 손톱에서 반짝거리는 흑장미 빛 메니큐어
. 그 메니큐어 속에 투영되는 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은주 여전히 내 앞에 있는 은
주는 내 가슴을 설레이게 하며 이 세상 그 무엇을 주고서라도 바꿀 수 없는 내 전부인데
. 난 와락 술을 목구멍 속으로 부어 넣는다. 그리고 잔을 S에게 건네준다.
[은주씨의 건강한 귀국과 에 또 건석의 .]
[집어치워!!]
오늘 따라 병신같은 짓을 하는 친구 놈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 놓곤 곧 후회하고 만다. 얼
마나 고마운 친구인가? 그 지겨운 뫼비우스의 지옥을 탈출해서 마침내 현실에서 깨어나던
그 날 새벽, 내 목을 껴안고 몇 시간이나 기뻐서 날뛰던 그런 소중한 친구가 아니던가?
그에게 내 운명의 저주를 쏟아 부을 그 무슨 명목이라도 있단 말인가? S가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술을 홀짝인다. 내가 천천히 잔을 내어민다.
[난 뭐에 대해서 건배하고 싶으냐하면 너처럼 멋진 친구를 나같은 속물에게 허락하신
그 위대한 분께 .]
[짜식 덜 떨어지긴 .]
술이 그나하게 오른 S는 그만 가야겠다고 휘청이며 일어난다. 양주에 맥주, 소주까지 짬
뽕으로 때린 우리는 거의 인사불성 상태에 가까웠다.
[나 가야 해 . 오늘이 니네들 제 이의 신혼 첫날 밤이 아냐 ?]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자고 가 .]
내가 겨우 S를 껴안고 쓰러지고 자빠지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며 우
리 둘은 약속이나 한듯이 주정을 떨기 시작한다. S가 주절주절 말도 안되는 소릴 해댄다
.
[야, 임마 . 니가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이 제 정신으로 돌아오던 날 내가 얼마나 기뻤
는지 알아? . 짜식 넌 상상도 못할 거야 .]
[S야 S야 너 근사한 시나리오 찾고 있지 . 아마도 내가 써줘야 할 운명인가 보다 .]
[짜식이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릴 하냐 .]
[이건 분명히 히트 친다니까 .]
[놀구있네 .]
그리고 둘이서 경쟁적으로 내뿜는 코고는 소리가 새벽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소근거리는 소리에 나의 의식이 흔들리듯이 몰리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S의 목소리였다 . 이미 그의 호흡은 목구멍까지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S씨도 원하는 거잖아요? .]
S의 배 위에 가볍게 올라탄 은주의 날렵한 육체의 곡선이 하얀 나이트 가운 사이로 비취
고 있었다. S는 죽을 상이 되어서 어떡하든 이 지겨운 유혹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S가 낮게 속삭인다.
[이러지 마 .]
[남자란 다 똑같은 족속들인데 내숭 떨지 말아요 .]
[정말 미쳤군!!]
S가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은주가 좀 더 빨랐다. 억센 힘으로 S를 확
밀치는 것이었다. 술까지 취한 S는 갑자기 당하는 이 황당한 사건에 그저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은주는 정말 자신의 말대로 철저한 지옥을 준비한 게 틀림이 없었다.
S의 옷들이 벗겨져 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난 이 모든 것들이 제발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꿈이기를 간절히 원하며 울분을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새벽의 사건 이후 S는 나의 아파트에 다시는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S의 눈에는 나와
은주 둘 다 변태 성욕자로 보였던 게 틀림이 없었다. 그 사건은 어떤 도전이나 고문보
다도 훨씬 더 효과가 있었고 그 새벽 이후로 나와 S는 지독한 수치감과 환멸 속에서 신
음하고 있었다.
그해 시월 세상은 때아닌 휴거 열풍으로 온통 술렁이고 있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
로 올라 간다는 사람들과 그들을 조소하고 비웃는 무리들로 세상이 휘청이고 있었다. 3대
방송사는 연일 그 사건을 특집으로 다루었고, sbs인가에서는 휴거에 관한 미국인의 의식
을 조사해서 방영했는데 미국인의 70 퍼센트가 휴거를 믿노라고 발표한다. 그러면서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그 유명한 물리학자에 가까운 신학자 "할 린세이(Hal Lindsey) 와의
인터뷰도 잠깐 소개한다. 한때 나의 우상의 경지까지 오르던 그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
다.
[저희들은 조만간 휴거를 증명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물리적 토대를 발표할 겁니다. 일종
의 순간 공간 전이 이동인데 .]
흥, 이제서 아셨나보군 . <세상엔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란 없다>란 지론이 이미 나
의 체험적 철학이 되어버렸고 저치가 설마 나와 은주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라고 중
얼거린다. 그는 계속 덧붙인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떠들고 있는 10월 28일 론은 극단적인 세대주의(世代主義) 자들
이 펼치는 위험한 곡예와도 같은 거죠 반드시 그날 새벽 4 시에 그들은 쥐구멍 찾기가
바쁠 걸요 .]
그의 지적은 맞아 떨어졌고 그렇게 시월이 숨가쁘게 지나갔다.
겨울이 다가오고 난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배부른 공상이 된
지 오래였고 이젠 더이상 숨을 쉰다는 것 조차도 힘이 들고 나른하게 조여오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동녘 창에 해의 머리통이 비치기가 무섭게 은주는 아파트 어느 한쪽으로 숨어들어 갔다
. 그리고 그 태양이 꼬리를 감추기가 무섭게 은주는 생생한 입술을 반들거리며 내 앞에
나타나서 요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더 웃기는 것은 급속한 나의 퇴락함이었다 . 그것은 함몰이던가? 아니면 그냥 먼지가 되
어가는 퇴층의 과정이던가 .
아, 난 은주가 사라지고 난 그 텅 빈 한낮의 시간 동안에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무력한 인간 그 자체였다. 은주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 조차도 알아보기가 귀찮았다
.
그러나 말하지 않는 내 의식은 알고 있었다. 28평형의 아파트는 모두 세 개의 방으로 꾸
며져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작은 방의 벽 한구석에는 장롱 대신에 건축 당시에 아예 만들어
놓은 붙박이 장이 하나 있었다. 분명 은주는 그 장롱 속에서 한낮의 태양을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감히 난 그 장롱을 열어본다 거나 하는 짓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은주도 한 마디 언급도 없었 건만 마치 그 장롱은 금단의 성역
처럼 두려움으로 나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은주가 낮잠을 자는 동안 나 역시도 커텐이
란 커텐은 다 치고 오로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깊은 잠 속에서 내가 꾸는 꿈은 동일한 것들이었다. 예의 버스가 음산한 바람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버스 앞에 멈추어서면 여자의 머리가 내게로 굴러온다.
그리고 그 머리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한다.
제발 제발 절 이 깊은 지옥에서 구해주세요 .
그 끔찍한 악몽에서 날 깨우는 것은 언제나 전화벨 소리였다. 땀에 홈빡 젖어 수화기를
들면 그때마다 전화 속의 인물은 울음소리로 시작했다.
[이건석씨죠? 꼭 만나야 합니다!! 제발 .]
어딘가 귀에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는 늘 다급했고 내가 누구냐고 물어도 여자는 만나서
모든 걸 얘기해주겠다고만 할 뿐이었다. 난 힘없이 전화를 끊고는 곧이어 그 전화의 내
용을 잊어버리곤 했다.
말하기조차 수치스럽고 이글을 쓰는 지금에서도 손이 떨리지만 은주가 깨어나고부터의 밤
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광란의 밤이었다. 은주는 섹스가 자신의 상처 받은 영
혼의 구원인냥 섬찟하도록 탐닉증을 보여왔다. 처음엔 난 무슨 성인군자인냥 은주를 타
일러보고 거절하기를 거듭했지만 어느 순간에 나 역시도 그 성의 쾌락에 깊이 발을 담그
고 있었다.
내 가련한 은주는 지칠줄 모르는 성욕의 화신이었다. 나의 영혼과 육신은 그녀의 불타는
욕망의 제물로 바쳐지고 있었고 그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는 결코 제동 장치가 작동이
되는 법이 없었다. 밤이 되면 그녀는 작은 방에서 검은 상어 새끼들이 발버둥 치는 그
물을 어깨에 짊어지고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기름 투성이의 고기를 무슨 사육하는
짐승에게 먹이듯 먹여 놓곤 곧 우리는 짐숭같은 섹스의 행위로 들어 갔다.
샤워기의 물줄기로부터 뜨거운 김이 안개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
께 은주의 한쪽 팔이 거울에 가득히 고인 서리를 쓸어내며 아래로 떨어진다. 그 서리가
지워져나간 자리에 비쳐지는 나의 반쪽 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은주의 뒤에서 미친
듯이 은주를 끌어 당기며 마지막 고지를 향해서 달려가는 내 모습은 잊어버리고 싶었다
. 은주가 격한 신음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말해요!! 사랑한다고!!]
[사랑해!!]
[부족해요!! 더 큰 소리로!!]
사랑한다는 말은 어느새 쾌락의 절정에서 내뿜는 신음 소리보다 더 못한 위치로 떨어진지
오래고 은주는 이미 식어버린 나를 이끌고 이번에는 베란다로 다가간다. 그녀의 입술이
내 혀 속으로 밀려들어오고 그녀는 마치 내 혓바닥의 비늘이 몇 개인지를 헤아리려는
듯이 그렇게 탐닉하고 또 탐닉한다.
[아, 아 이젠 도저히 .]
그러나 은주는 나의 의지를 개발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듯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아래로 내려간다. 눈이 하얗게 세상을 적신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내가 베란다의 두터
운 페어그라스를 밀치자 눈발이 확하며 우리 두사람을 공격한다. 그 눈의 차가움이 일순
간 내 저 밑 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일말의 양심을 일깨워 세운다. 나의 아래에서 발악을
하는 은주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운다.
[우린 미쳐가고 있어 . 이건, 이건 사랑도 아니야 .]
은주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인다.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한 건가요?!! 당신을 삼켜버릴 거예요!! 잊으셨나요?!! 우린 같이
죽기로 한 것 !!]
[그래, 죽자 . 죽어버리자!! 이대로 산다는 건 죄악이야!!]
난 울부짖으며 은주를 품 안으로 끌어 안는다. 눈내리는 베란다에서 전라의 남녀가 울고
있다. 내가 은주를 바라본다.
[내가 먼저 뛰어내릴까?]
은주가 조소하듯이 날 바라본다.
[그럴 용기라도 있으세요?]
난 아무 말없이 베란다의 창문을 최대한 열었다. 광란하는 눈바람이 하얀 목련꽃처럼 내
몸뚱아리를 엄습한다. 사랑의 찢기워진 미증유의 편린들을 내 몸에 숙주처럼 꽃 피우며
베란다의 난간을 넘어선다. 그리고 내가 미련없이 저 편안한 세상으로 훌쩍 뛰어내리려
고 할 때 갑자기 악마 같은 괴성이 내 뒤로부터 들려왔다.
[널 죽이고 싶어!!]
은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나의 몸이 공중에서 튕겨나며 뒤의 거실로 가볍게
나가 떨어진다. 그리고 은주의 고개가 휙하고 돌아가며 베란다의 페어그라스가 쾅하고
닫힌다. 분노하는 은주가 뚜벅뚜벅 걸으며 내게로 다가온다. 그녀가 혀를 날름대며 쓰러
진 나의 주위를 뱅뱅 돈다.
[그렇게도 니가 대단한 존재야?!! 왜 날 의심하는 거야?!!]
난 그런 은주의 모습이 너무도 끔찍해서 눈을 감는다. 은주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눈을 떠!! 눈을 떠서 날 보란 말이야!! 니가 꿈꾸던 은주를 보란 말이야!!]
난 띄엄띄엄 말을 한다.
[넌 은주가 아냐 . 넌 아무 것도 아냐 .]
[내가 은주가 아니라구? 그럼 뭐야!! 이 약한 심장은 뭐야?!! 뭐냐구?!!]
순간 나의 가슴 위로 뭔가 뜨듯한 것이 왈칵하고 쏟아진다. 눈을 뜨자 온통 피투성이가
된 은주가 내 앞에서 발악을 한다. 그녀가 자신의 심장을 잡고 경련을 일으킨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한번 더 각혈을 하던 은주의 피 덩어리가 내 가슴 위에 뱉어져 왔다.
그녀로부터 물러나려고 할 때 은주가 나의 팔을 억세게 잡는다.
[언제나 내게서 도망만 가려고 하지 .]
은주의 모습은 너무도 끔찍해서 차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피투성이의 은
주의 손이 미끄러지면서 나의 허벅지로 다가온다.
[이러지 마!!]
내가 고함을 질렀지만 은주는 더 집요하게 나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
[제발 이러지 마 .]
은주가 이번에는 다시 나의 입술을 찾는다.
[건석씨와 난 같이 존재해야만 해 .]
눈물을 흘리던 내가 은주를 바라본다. 은주의 입에선 계속 피가 벌컥이며 튀어나오고 있
었다. 그녀가 나의 가슴 속으로 미친 듯이 파고 들며 애원한다.
[약속해줘요 . 날 버리지 않는다고 .]
내가 벌겋게 충혈이 된 눈으로 은주를 바라본다.
[이젠 이젠 아무 것도 약속할 수가 없어 .]
은주의 눈에서 빛이 사라져 가며 그녀는 이제 거의 숨을 거두는 것만 같았다.
[말해줘요 . 날 여전히 여전히 사랑한다고 .]
[대체 날더러 어떡하란 말이야!!]
나의 절규가 아파트 안을 가득히 울리고 내리는 눈만 아니었다면 아파트 단지에 비상이
걸렸으리라. 난 마구 흐느끼며 피투성이의 은주를 끌어안는다. 이 따스한 살갖의 촉감,
그리고 검붉게 피어있는 유두의 감미로움은 여전히 은주이건만 영혼은 사랑에 굶주린
악마의 형상을 하고있으니 .
그 광란의 밤 이후 은주의 각혈은 빈도수를 더해가고 있었다. 숫제 어느 날은 저녁이 되
고 밤이 되어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난 조바심과 안달로
그 작은 방 문 앞에서 수도 없이 왔다 갔다하고 있었다. 마침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그 장롱의 손잡이까지 손을 가져 가다간 다시 후다닥 그 방을 뛰쳐나오곤 했다
.
연체된 관리비를 납입하기 위해서 근 몇 달 만에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태양이 두려웠다
. 내 살갖에 닿는 태양의 살점들이 너무도 두렵게 느껴지고 있었다. 내 얼굴은 하얗게 탈
색되어 있었고 단지 내에 위치한 은행 출입구에 비쳐진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섬뜩한 몰
골이었다.
나의 책들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쪽에선 매달 온라인으로 인지
료를 충실히 납입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S의 힘이 컸으리라.
불현듯 S가 그리워졌다. 오늘쯤은 S를 찾아가 보리라 .
[너무 많이 체납되어 관리소에 직접 가셔서 납입하세요.]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던 은행 여자가 살짝 웃으며 말한다. 지친 발걸음을 돌릴 때 얼핏
바라본 은행 여자의 안색은 금새 변하고 있었다. 아니, 은행 내의 모든 사람들이 재빨리
날 보고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뒷통수에 느끼며 관리소로 향한다.
저놈의 태양 1월의 마지막에서 대기의 차가운 난류를 관조하듯이 높이 떠있는 태양은 끝
없이 나를 추적하고 있었다. 관리비 장부를 뒤적이는 수위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게
보인다. 떨리는 손으로 돈을 지불하고 내가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저 .]
내가 천천히 돌아선다.
[바쁘시지 않다면 잠깐 야그 좀 했으면 하는디 .]
좁은 수위실 안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아늑했다. 석유 난로 위에서 고즈넉히
끓고 있는 보리차를 따라주며 이미 60의 세월로 접어드는 남자가 입을 연다.
[내막은 잘 모르지만 말씀을 드려야 겠기에 .]
수위를 바라봤을 때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무척 조심하는 눈치였다.
[지금도 저쪽 놀이터에서 두 사람이 선상님을 지켜보고 있을 거구먼유 .]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석 달 전이던가? 샥시가 미국에서 돌아오던 날 있잖유 . 아, 그 다음 날부터 저 잡 것
들이 스물 네 시간 아파트에서 아예 살림을 차렸지 뭔감유? 심심하면 날더러 선상님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게 아님감유 . 지가 알면 안될까유 ? 대체 무슨 일이람유?]
난 한동안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씬 그냥 모르는 척해주세요 . 그럼 .]
역시 놈들은 종각 지하철 역까지 따라나오고 있었다. 노골적인 미행이었고 무척이나 민감
하고 예민한 행동들이었다. 미국 측의 보고를 받은 보건 당국 요원 아니면 특수기관에 근
무하는 자들일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아마도 미국 측에선 있는 거짓말 없는 거짓말로 은주와 나의 상황을 거의 치명적 위험 바
이러스 보균자 정도로 몰아부쳤을 거고 순진한 당국에서는 분별력없이 제 2의 에이즈 감염
자 정도로 우릴 치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사태는 나의 짐작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내가 종각 역 제일
은행 앞 차가운 돌 벤취에 앉아 무의탁 환자 돕기 자선 콘써트를 보고 있을 때였다. 저쪽
허리우드 극장 쪽으로부터 검은 색 BMW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날 미행하던 두 명의 남자들이 그 BMW로 잽싸게 뛰어가고 있었다. BMW의 코
팅된
창문이 쓰윽 내려가면서 얼핏 내가 본 것은 바로 미국인들이었다. 아, 그들은 여기까지
추적해 들어온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차가운 바람 속에서 현기증이 몰려왔다
.
한참 뜨고 있던 박정운의 노래를 열창하는 무명의 가수 앞에 놓여진 헌금함 속에 지폐 몇
장을 집어 넣고는 나는 천천히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대 숨결 느낄수 없고
무겁게 나를 누르는 이 빈 공간은
끝없는 그대 이름 부르곤 했어 .
오늘 같은 밤이면 은주를 나의 품에 가득 안고서 멈춰진 시간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머물
고 싶었다 . 눈 감으면 느낄 수 있는 은주의 체취 , 내게 육체가 주는 쾌락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에 비하면 정말 모래처럼 푸석한 가치일 뿐이란 걸 가르쳐준 은주는 이미 오
래 전에 가고 없었다. 이제 이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올텐데 그리고 벚꽃이 활짝 필텐
데 난 난 누구와 그 벚꽃 아래를 걸으란 말인가 .
[지금 너무 바빠서 만나실 수 없답니다 .]
인사동 골목에 위치한 씨네텔 S를 찾았을 때는 이미 오후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씨네텔 S는 방송국에 드라마를 제작해서 납품하는 조그마한 외주업체였는데 S는 요즘 베
스트 셀러를 미니시리즈로 각색한 작품을 연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 더 이상은 생
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사랑하는 친구는 지금 무지 바쁠 뿐이고 그래서 날 만날 시간조차 없는 것으로만 생각
하기로 했다. 쓸쓸히 돌아서는 날 커텐 뒤에 숨어서 바라보는 S의 냉담한 시선을 폐부
깊숙히에서 느낄 수 있었다.
뛰어갔다.
10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미친듯이 주머니에서 키를 찾아서 아파트 문을
땄다. 그리고 사정없이 작은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여름내 쌓아두었던 옷가지들이 내뿜
는 메퀘한 냄새가 코를 찌르며 덮쳐온다. 마구 소리를 지른다.
[밤이 되었어!! 어두워졌다구!! 이젠 나와!! 모습을 보이라구!]
장롱 앞을 미친 듯이 왔다갔다하던 내가 마침내 장롱의 손잡이를 굳게 잡는다. 그리고 천
천히 중얼거린다.
[너의 광란의 사랑도 내겐 과분해 . 그러니 모습을 보이라구 . 제발 고독해 고독해서
미치겠어 .]
옅은 경련을 일으키며 처음으로 은주와 나의 침묵의 불문률을 깨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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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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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장 사랑/아가페 對 에로스
" "
내가 막 그 작은 장롱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따르르릉 두 대의 전화가 요란하게 동
시에 스테레오로 울부짖고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난 장롱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다시 돌아서서 방을 나간다. 그리고 여전히 앵앵거리는 전화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벨이 지쳐갈 때 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
였다.
[흐흐흐흑 .]
[여보세요 . 누구십니까?]
여자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는지 겨우 말문을 턴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만나주세요 .]
[대체 누구십니까?]
한참 후 여자는 겨우 울음을 멈추고 꿋꿋하게 말한다.
[절 기억 못하시겠어요?]
순간 내 머리 곁으로 한 줄기 섬광이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그래 바로 그 여자다 .
[자기 수술 잘 끝나고 튼튼한 심장 가지고 돌아오면 우리 이런 데서 살자. 옥수수도 키우
고 원두막도 짓고 자기 좋아하는 담쟁이로 온통 집을 덮어버리고 그렇게 살자 .]
눈이 하얗게 내린 안면도의 바닷가에서 이제 막 기우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
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섬이었지만 어젯밤 뜻하지 않은 여자의 전화 한 통은 운명처
럼 날 다시 이 섬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어느 날 분풀이로 떠났던 아주 우연한 여행에서 시작되는 굴절된 공포의 기억들 . 내 스
스로 이름 붙여버린 소아병적인 발상의 이름 고양이 여인숙 . 그리고 져니 광추면 괴물
고양이 소녀 은주 왜 그 악몽들은 이토록 잔인하게 서른이 넘도록 내 인생에 달라붙
어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그렇게 오랫동안 맴을 돌며 서성이는 건가?
제발 제발 삼봉 해수욕장의 그 넓은 모래사장 위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눈을 감아도 파
도 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은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건석씨 왜 다시 이곳엘 왔나요 .
잊어야 해요 . 당신이 잡으려는 것들은 은주가 아네요 .
미완의 욕망만이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악마일 뿐이예요 .
이래선 안돼요 . 은주를 죽이세요 .
모두를 위하는 길이예요 .
이제 그만 제 영혼을 자유롭게 놓아주세요 .
안면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진득한 지옥의 탁한 냄새와 바로 얼마
전에 겪은 듯한 그 생생한 살육만이 안면도의 구석구석에 베여 있을 뿐, 정작 그리운 은
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삼봉 해수욕장의 그 넓은 해안길을 따라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 눈을 맞으며 그
냥 녹아버리고 싶었다. 백 날을 너의 창 문 앞에서 니가 창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다 마
침내 눈사람이 되어 버려도 좋다라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오늘은 은주를 만나는 그
순간까지 그냥 이대로 눈사람이 되고 싶었다.
파도가 밀려나간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등대 뒤로 한 척의 배
가 가물거리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 .]
내가 눈을 번쩍 뜨며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그래, 그 여자였다. 다소 헬쑥해진 모습이
었지만 미친듯이 공격해오던 살인 고양이 떼들을 향해 폭죽처럼 사진기 후레쉬를 터뜨리
던 그 여자였다.
[맞군요 . 선생님 .]
여자는 금새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난 마치 악몽이 내 눈 앞에 재현되는 듯
이 덜덜 떨리는 눈으로 여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떻게 .]
[줄곧 선생님을 찾았더랬어요 . 89년 8월에 선생님과 그 여자분이 성황당 옆 납골당에서
발견된 사건이 접수되어 있더군요 . 아시겠지만 안면 경찰서엔 작년 8월 저희들의 피해
사건도 접수되어 있었구요 .]
내가 꿈결처럼 여자를 바라본다.
[저희들이란 .]
여자가 잠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발끝으로 툭툭 모래 속에 박힌 소라껍질을 파낸다.
[신혜와 나 이렇게 둘 말이죠 .]
겨우 말문을 열던 여자가 풀썩 자리에 쓰러지듯이 쪼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마구 울기 시작한다. 여자는 설움이 북받치는지 한참을 울뿐이었
다. 하얀 눈은 그녀의 남루한 어깨 위에 쌓이다가 이내 바람에 우르르 떨어진곤 한다. 내
가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세운다.
[자, 자 .]
[죄송해요 . 이렬려구 했던 게 아닌데 선생님을 뵈니 갑자기 너무 무서워져서 .]
[압니다 . 사실 저도 한순간 너무 무서웠습니다 .]
여자가 어린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내게 손을 스윽 내어민다.
[인사가 늦었죠. 전 혜수라고 해요 . 신혜수 .]
내가 그녀의 작고 고운 손을 꼭 쥐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차 가지고 오셨나요?]
[아뇨.]
[그럼 제 차로 들어가실래요?]
여자가 가리킨 해변 입구에 빨간 프라이드 한 대가 조용히 서있다.
[그래요, 날씨가 차군요 . 들어갑시다.]
차가 있는 곳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쏴한 바닷바람이 우리 두 사람의 흐트러진 추억들
을 선명하게 재조립해주는 것 같았다. 여자는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잔혹했던 기
억들이 다만 꿈이었다는 듯이 대화의 꼬리를 풀어나갔다.
[아무리 부인해도 이젠 어쩔 수 없군요 . 아세요?]
여자가 갑자기 나를 휙 바라본다. 여자의 파리한 입술이 무겁던 기분을 퍽이나 쇄락(灑落
)시킨다.
[그 지옥을 온전한 상태로 빠져나온 사람이 우리 둘 뿐이란 사실.]
[다행이군요.]
[말씀해주세요.]
여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날 또렷히 바라본다.
[버스에 탔던 그 여자분 .]
순간 악몽이 나를 덮친다.
괴물의 날카로운 손에 목이 잡힌 여자의 친구 입에서 벌컥 벌컥 튀어 나오던 선혈의 덩어
리. 혜수라는 이 여자의 후레쉬 공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괴물이 고통스러운 듯이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여자의 목을 잡고 힘을 가하던 소리.
으드득 하는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이 거의 거꾸로 돌아가고 , 혜수라는 여자
가 비명을 지르며 괴물을 향해 덤벼들고 , 괴물의 등짝에 올라타서는 마구 괴물을 때리던
여자의 얼굴로 퍽하고 튀어오르던 피 . 그 선혈이 홍수처럼 여자의 얼굴 위에서 타내리
고 , 동시에 흔들리는 버스 구석으로 마구 굴러가던 그 머리 .
지금도 수시로 악몽 속에서 나를 향해 굴러오는 여자의 머리 .
혜수라는 여자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기고 있었다. 그 이후 이 여자는 실신을 했으니까 .
운전대를 잡아!!> 내가 은주에게 소리를 지르고 날 바라보던 은주 . 은주가 맞다면
운전대를 잡아!! 지난 달 내가 가르쳐 줬잖아!!>
[그분은 정상이겠죠? 아님 신혜처럼 송장이거나 .]
내가 언뜻 현실로 돌아오며 창백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본다.
[그럼 친구는 .]
[완전히 넋이 나갔어요 . 대소변도 못가릴 정도예요 .]
프라이드 안은 꽤 넉넉했다. 여자가 보온 병의 두껑을 열고 커피를 따라준다.
[절 만나자고 한 건 .]
[저 사람들은 누군가요?]
혜수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명의 남자가 얼른 수풀 속에 감추어 두었던 BM
W로 올라탄다. 내가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안면도로 오던 버스의 꽁무니에 붙어 끝
없이 나를 따라오던 저 낯선 이방인들 .
[신경쓰지 말아요.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 .]
내가 고개를 뒤로 뉘이며 눈을 감는다.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연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고 답해주세요 . 전 지금 벼랑의 끝에 내어 몰려 있어요 . 살
아내고 싶어요 .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을 지푸라기 정도로 이용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
어요 . 아시겠죠? 유일하게 절 이해하실 분이 선생님뿐이란 걸 .]
[ .]
여자가 정지된 BMW를 노려보면서 말을 잇는다.
[마을 사람들이 신혜와 절 발견했을 당시엔 저 역시도 혼이 나간 상태였다더군요 . 신혜
의 부모님과 저의 부모님은 우리 둘을 곧장 꽤 유명하다는 기도원에 입원시켰나봐요 . 다
행히 길진 않았다더군요 .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제가 정신이 돌아온 거예요 . 기적이 일
어났다고 기도원에 잔치가 벌어졌죠 . 설명드리지 않아도 기적따윈 웃기는 쇼맨쉽이란
걸 잘 아실 거예요 . 선생님에 대해서 조사했었죠. 선생님도 작년 8월 24일 새벽 4시에
오랜 정신착란에서 깨어나셨더군요.]
내가 식은 땀을 흘리며 여자를 휙 노려본다.
[요점이 뭐요?]
여자가 나를 한동안 바라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틀렸군요 .]
[뭐가 틀렸다는 거지?]
[도와주세요!! 제 친구는 지금 지옥 속을 헤메이고 있어요 . 아니, 우리가 모르던 시간
의 역사 속에서 그 괴물들에게 희생 당한 수많은 영혼들이 오늘도 안식을 찾지 못한 채 울
부짖고 있어요!! 아실 거예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난 내리겠어!!]
내가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문을 열고 나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차가 휘청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혜수가 차의 시동을 건 것이다.
[도망만 친다고 해결되진 않아요!!]
차가 어느새 가볍게 출발하고 있었다.
[미쳤군!!]
[그래요!! 전 이미 육 개월 전에 미쳐버렸죠!! 이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사
는 거냐구요?!!]
[세우지 못해!!]
차는 헛바퀴를 돌며 모래 위를 마구 빠져나가고 있었다. 덜컹하며 차가 비포장 도로 위로
튀어오른다. 여유를 부리던 BMW가 그제서야 당황하며 해변을 가볍게 미끄러져 달려온
다
. 내가 얼핏 신혜를 바라보자 그녀는 울고 있었다. 여자는 주도 면밀한 계획 아래에서
나를 초대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녀가 계획하고 있는 비밀이 무엇이든 간에 다시는 이
따위 지랄같은 사건에 얽혀 들어선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차를 세워!!]
길의 끝에서 여자가 우회전을 하며 차를 세운다. 내가 신혜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리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내가 여자를 바라본다. 그녀가 뜷어질 듯이 백미러를 노려본다. 아니나 다를까 백미러를
통해서 BMW가 눈발을 헤치고 잽싸게 달려오고 있다.
삼봉 해수욕장 주변은 한국 소나무들이 빼곡히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유명하다.
그 소나무들 위로 눈이 쌓여가고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일렬로 늘어서 장관을 이루
는 것 같았다. 닭 쫒는 미친 개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던 BMW가 우리를 지나쳐 저만치
사
라져가고 이내 신혜는 프라이드를 좁은 소나무 숲 길 안으로 몰고 들어간다.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않아도 난 .]
[제 친구를 한 번만 만나주세요!! 보시면!!]
순간 차가 끼이익 왼쪽으로 꺽히며 소나무를 쾅하고 들이박고 만다. 내가 핸들을 꺽었던
것이다.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씩씩거리고 있을 뿐이었
다.
[정말 예의가 없군!! 내게 이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
신혜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여자에게 뭐라고 다시 쏘아대려다 그냥 돌아선다
. 그리고 문을 반쯤 열 때였다. 날 주춤하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몰려들어오는 눈발과
함께 새어나온다.
[어젯밤에도 도움을 청해왔어요 . 배에 분명히 분명히 글자가 새겨졌어요 . 엑소시스
트처럼 . 전 그게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인줄 알았어요 .]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윌리엄 피터 블레티어의 엑소시스트는 철저한 고증으로 씌여
졌고 혈액의 유압으로 글자 쓰기는 귀신 들린 자들의 아주 오랜 고전적인 메세지 전달 방
식이었다. 내가 다시 문을 쾅하고 닫는다.
[어디에 씌여졌지 ?]
혜수는 잠시 입술을 깨문다. 그러더니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전방을 노려본다.
[처음엔 배 부분이었어요 . 근데 근데 어제는 옷을 갈아 입히려는데 허벅지에 그래
요, 아주 선명한 글씨였어요 .]
[내용은 ?]
그녀가 입술을 깨문다.
[혜수야 너무 어두워 . 날 좀 구해줘 .]
내가 손바닥에 고인 땀을 무릎에다 쓱쓱 문질러 닦는다. 신혜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나
를 휙 바라본다.
[선생님만이 하실 수 있어요!! 전 알아요!! 그때 개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버스를 세
우던 선생님의 용기를 기억하고 있어요!!]
[난 아냐 .]
[왜요? 신혜가 개 한 마리보다 못해서 인가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알잖아!! 우린 다시 그 지옥 속으로 들어갈 수도,
또 들어가서도 안돼 .]
혜수가 차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정신이 돌아오던 그 날 새벽 난 그 동안 나를 에워싸던 신을 비웃으며 신혜를 데리고 기
도원을 빠져나왔죠. 그리고 찾아 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어요. 지난 몇 달 동안 제가 한
것이라곤 다시 한 번 그 지옥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일 뿐이었죠.]
내가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혜수를 바라본다.
[그땐 우린 운이 좋았던 거야!!]
[다시 또 좋을 수도 있어요 .]
[지금은 안돼! 무슨 뜻인줄 알아? 지금은 안된다구!!]
혜수가 한동안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나의 뜻을 알았다는 듯이 시동을 건다. 박혀 있
던 소나무에서 차가 빠져나오면서 다시 넓은 비포장도로로 향한다. 차가 막 비포장 도로
로 접어들 때였다. 예의 그 시커먼 BMW가 끼이익하며 우리 앞을 막아선다. 더 이상 어
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을 다닌다는 게 좀 우스운 짓이란 생각도 들었
다. 혜수와 난 동시에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BMW에 탄 남자들도 차에서 내린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내가 차에서 내린 두 명의 남자들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
[시간 좀 내주시죠? 안에 계신 분들이 얘길 좀 했으면 하는데.]
짙은 코팅 윈도우가 스르르 내려가며 안에 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앞 좌석엔 미국
인이 타고 있었고 뒤엔 꽤 점잖은 듯한 30 대의 남자가 눈을 껌뻑이며 우리를 바라본다.
내가 혜수를 바라보자 그녀가 과감하게 뒷문을 열고 들어간다. 실례해요라고 짧게 말한
뒤 뒷의자에 앉은 혜수가 나를 보며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차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들어가자 마자 BMW는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인다. 우리가 어이없다는 표
정으로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혜수의 프라이드를 예의 두 남자가 몰고 온다.
[캔 아이 스피크 잉글리쉬?]
내가 혜수를 바라보기가 무섭게 혜수의 입에서 슈얼하는 딱딱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미국
인이 다소 안심이 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대화를 시작한다.
[전 미국방성에서 근무하는 스티븐 바우어라고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저
희들도 알만큼 안다는 겁니다.]
대체 뭔 말을 하시는 겁니까?]
나의 불쾌한 심기를 금새 누그러뜨리는 말이 미국인의 입으로부터 새어나온다.
[코넬 대학에서 치루어지던 연구 자료들을 다 조사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예일대와의
공동 연구로 진행되어 오던 자료, 즉 성은주씨의 자기최면 동화상 테잎에 담긴 내용들
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내 목젖이 꿀꺽인다.
[얼마나 찾아 헤메였는지 , 그 동화상 속의 세계 말입니다 . 결국 여기와서 감이 잡히는
군요 .]
[이봐요!]
[놀라운 사실입니다. 벌써부터 파장 측진기가 난리를 부리고 있습니다. 조사해 봤더니 두
분 다 이근처 백사장의 성황당 아래에서 발견된 경험을 가지고 있더군요 .]
혜수가 얼굴을 붉힌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자기최면은 뭐고, 동화상은 또 .]
[조급해하지 마십시요 . 잠시 후에 보여드릴테니까 .]
스티븐이란 남자가 발정기의 숫캐처럼 음산한 눈으로 혜수를 바라본다. 혜수 역시도 그
남자의 눈빛에 압도 당하여 침을 꼴깍 삼킨다. 내가 언성을 높인다.
[차 세워요!!]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시는가 보군.]
남자의 언성은 사뭇 위압적이었다. 내가 남자를 바라본다.
[성은주씨는 이제 며칠 후면 죽을 몸이고 죽기 전에 우린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
이 있소 .]
내가 남자를 천천히 바라본다.
[심장은 더 이상 복개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썩어 있고 이젠 그녀에게 고착된 의학적 관심
을 넘어서서 우린 성은주씨를 닮은 새로운 대체가 필요하단 거요 .]
[이 개새끼들 .]
내가 미국인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남자는 꿈쩍도 않고 날 노려본다. 내가 열을 올린다
.
[그럼 지금까지 은주를 볼모로 잡고 있었단 말야?]
남자가 천천히 내 손목을 잡고 억센 힘으로 비틀어 떼어낸다. 그리고 이제는 옆에 공포
로 떨고 있는 혜수를 향한다.
[볼모라뇨? 우린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그녀의 심장 몇 점을 떼어내려던 거 뿐이었죠
.]
[헛소리 하지 말아!!]
[헛소리는 자네가 지껄이고 있는 것 같군!! 그 악마같은 계집이 얼마나 영악했는질 알아
? 삼십 명의 희생자를 내곤 먼저 꼬리를 치더라구 . 당신같은 답답한 좀생원을 건드리
지 않는 조건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져가라는 거야 . 하지만 너무 썩어있더군 . 우린 그
동안 오히려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도구에 불과했어 .]
그 억지 같은 반론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떨군다. 날 비웃듯이 바라보던 스티븐이 이젠
혜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젠 아가씨 얘길 좀 해볼까? 친구 분이 꽤 심각하다는데 .]
[어떻게 .]
순진하긴 쯧쯧 하는 눈으로 남자가 비시시 웃는다. 그리고 혜수의 하얀 목젖을 훔쳐
보다가 남자가 입술에 침을 적시며 속 보이는 제안을 던져 놓는다.
[피차에 도움을 줄 수있는 문제가 아닐까? 안 그렇습니까? 목사님?]
내가 뒷좌석의 목사라는 남자를 바라봤을 때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남자는 하얗
게 쌓여가는 세상을 향해서 깊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도로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차는
멈추고 있었다. 거대한 알루미늄의 탑차가 눈에 덮여가며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 미국인 남자가 먼저 차에서 목사라는 남자가 내렸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려는 혜수의
팔을 잡고 내가 말한다.
[혜수, 아무 말도 듣지 마!!]
혜수가 나를 한동안 바라본다.
[어차피 이대로는 견딜 수 없는 일 아네요?]
혜수가 차에서 내리고 혼자 남겨진 차 안에선 다시 지독한 두통이 몰려오는 듯했다.
은주는 그동안 미국과 나의 아파트를 오가며 그들과 계약을 한 게 분명했다. 자신의 심장
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오만한 계약과 맞바꿔 가며 그들에게 제공한 게 분명했다. 하
지만 그 순진한 악마는 오히려 저 지독한 인간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고 어쩌면 나마저
이미 저들의 실험 도구로 전락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파괴된 심장이 견딜 수 없게 되자 내 가슴에 피를 토하며 실신하던 그녀는 지금
이 시간도 코넬 대학의 어두운 지하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의 생체실험 도구로 희생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한 채 그들을 노려봤을 때 이미 아무 것도 모르는 혜수는
그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가며 그 거대한 탑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안돼 . 다시는 안돼 .
하지만 이미 상황은 마지막 파국을 향하여 거대하게 치닫고 있는 게 분명했고 지금까지의
어떠한 공포도 어린애 장난으로 비웃고 마는 엄청난 죽음들이 내게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땅으로 내디디고 있었다. 하얀 눈이 소리없이 쌓이며 뽀드득 소
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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