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상심의 바다
고양이 여인숙
20화. 상심의 바다
내가 막 그 작은 장롱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따르르릉 두 대의 전화가 요란하게 동
시에 스테레오로 울부짖고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난 장롱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다시 돌아서서 방을 나간다. 그리고 여전히 앵앵거리는 전화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벨이 지쳐갈 때 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
였다.
[흐흐흐흑 .]
[여보세요 . 누구십니까?]
여자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는지 겨우 말문을 턴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만나주세요 .]
[대체 누구십니까?]
한참 후 여자는 겨우 울음을 멈추고 꿋꿋하게 말한다.
[절 기억 못하시겠어요?]
순간 내 머리 곁으로 한 줄기 섬광이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그래 바로 그 여자다 .
[자기 수술 잘 끝나고 튼튼한 심장 가지고 돌아오면 우리 이런 데서 살자. 옥수수도 키우
고 원두막도 짓고 자기 좋아하는 담쟁이로 온통 집을 덮어버리고 그렇게 살자 .]
눈이 하얗게 내린 안면도의 바닷가에서 이제 막 기우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
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섬이었지만 어젯밤 뜻하지 않은 여자의 전화 한 통은 운명처
럼 날 다시 이 섬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어느 날 분풀이로 떠났던 아주 우연한 여행에서 시작되는 굴절된 공포의 기억들 . 내 스
스로 이름 붙여버린 소아병적인 발상의 이름 고양이 여인숙 . 그리고 져니 광추면 괴물
고양이 소녀 은주 왜 그 악몽들은 이토록 잔인하게 서른이 넘도록 내 인생에 달라붙
어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그렇게 오랫동안 맴을 돌며 서성이는 건가?
제발 제발 삼봉 해수욕장의 그 넓은 모래사장 위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눈을 감아도 파
도 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은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건석씨 왜 다시 이곳엘 왔나요 .
잊어야 해요 . 당신이 잡으려는 것들은 은주가 아네요 .
미완의 욕망만이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악마일 뿐이예요 .
이래선 안돼요 . 은주를 죽이세요 .
모두를 위하는 길이예요 .
이제 그만 제 영혼을 자유롭게 놓아주세요 .
안면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진득한 지옥의 탁한 냄새와 바로 얼마
전에 겪은 듯한 그 생생한 살육만이 안면도의 구석구석에 베여 있을 뿐, 정작 그리운 은
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삼봉 해수욕장의 그 넓은 해안길을 따라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 눈을 맞으며 그
냥 녹아버리고 싶었다. 백 날을 너의 창 문 앞에서 니가 창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다 마
침내 눈사람이 되어 버려도 좋다라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오늘은 은주를 만나는 그
순간까지 그냥 이대로 눈사람이 되고 싶었다.
파도가 밀려나간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등대 뒤로 한 척의 배
가 가물거리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 .]
내가 눈을 번쩍 뜨며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그래, 그 여자였다. 다소 헬쑥해진 모습이
었지만 미친듯이 공격해오던 살인 고양이 떼들을 향해 폭죽처럼 사진기 후레쉬를 터뜨리
던 그 여자였다.
[맞군요 . 선생님 .]
여자는 금새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난 마치 악몽이 내 눈 앞에 재현되는 듯
이 덜덜 떨리는 눈으로 여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떻게 .]
[줄곧 선생님을 찾았더랬어요 . 89년 8월에 선생님과 그 여자분이 성황당 옆 납골당에서
발견된 사건이 접수되어 있더군요 . 아시겠지만 안면 경찰서엔 작년 8월 저희들의 피해
사건도 접수되어 있었구요 .]
내가 꿈결처럼 여자를 바라본다.
[저희들이란 .]
여자가 잠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발끝으로 툭툭 모래 속에 박힌 소라껍질을 파낸다.
[신혜와 나 이렇게 둘 말이죠 .]
겨우 말문을 열던 여자가 풀썩 자리에 쓰러지듯이 쪼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마구 울기 시작한다. 여자는 설움이 북받치는지 한참을 울뿐이었
다. 하얀 눈은 그녀의 남루한 어깨 위에 쌓이다가 이내 바람에 우르르 떨어진곤 한다. 내
가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세운다.
[자, 자 .]
[죄송해요 . 이렬려구 했던 게 아닌데 선생님을 뵈니 갑자기 너무 무서워져서 .]
[압니다 . 사실 저도 한순간 너무 무서웠습니다 .]
여자가 어린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내게 손을 스윽 내어민다.
[인사가 늦었죠. 전 혜수라고 해요 . 신혜수 .]
내가 그녀의 작고 고운 손을 꼭 쥐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차 가지고 오셨나요?]
[아뇨.]
[그럼 제 차로 들어가실래요?]
여자가 가리킨 해변 입구에 빨간 프라이드 한 대가 조용히 서있다.
[그래요, 날씨가 차군요 . 들어갑시다.]
차가 있는 곳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쏴한 바닷바람이 우리 두 사람의 흐트러진 추억들
을 선명하게 재조립해주는 것 같았다. 여자는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잔혹했던 기
억들이 다만 꿈이었다는 듯이 대화의 꼬리를 풀어나갔다.
[아무리 부인해도 이젠 어쩔 수 없군요 . 아세요?]
여자가 갑자기 나를 휙 바라본다. 여자의 파리한 입술이 무겁던 기분을 퍽이나 쇄락(灑落
)시킨다.
[그 지옥을 온전한 상태로 빠져나온 사람이 우리 둘 뿐이란 사실.]
[다행이군요.]
[말씀해주세요.]
여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날 또렷히 바라본다.
[버스에 탔던 그 여자분 .]
순간 악몽이 나를 덮친다.
괴물의 날카로운 손에 목이 잡힌 여자의 친구 입에서 벌컥 벌컥 튀어 나오던 선혈의 덩어
리. 혜수라는 이 여자의 후레쉬 공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괴물이 고통스러운 듯이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여자의 목을 잡고 힘을 가하던 소리.
으드득 하는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이 거의 거꾸로 돌아가고 , 혜수라는 여자
가 비명을 지르며 괴물을 향해 덤벼들고 , 괴물의 등짝에 올라타서는 마구 괴물을 때리던
여자의 얼굴로 퍽하고 튀어오르던 피 . 그 선혈이 홍수처럼 여자의 얼굴 위에서 타내리
고 , 동시에 흔들리는 버스 구석으로 마구 굴러가던 그 머리 .
지금도 수시로 악몽 속에서 나를 향해 굴러오는 여자의 머리 .
혜수라는 여자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기고 있었다. 그 이후 이 여자는 실신을 했으니까 .
운전대를 잡아!!> 내가 은주에게 소리를 지르고 날 바라보던 은주 . 은주가 맞다면
운전대를 잡아!! 지난 달 내가 가르쳐 줬잖아!!>
[그분은 정상이겠죠? 아님 신혜처럼 송장이거나 .]
내가 언뜻 현실로 돌아오며 창백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본다.
[그럼 친구는 .]
[완전히 넋이 나갔어요 . 대소변도 못가릴 정도예요 .]
프라이드 안은 꽤 넉넉했다. 여자가 보온 병의 두껑을 열고 커피를 따라준다.
[절 만나자고 한 건 .]
[저 사람들은 누군가요?]
혜수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명의 남자가 얼른 수풀 속에 감추어 두었던 BM
W로 올라탄다. 내가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안면도로 오던 버스의 꽁무니에 붙어 끝
없이 나를 따라오던 저 낯선 이방인들 .
[신경쓰지 말아요.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 .]
내가 고개를 뒤로 뉘이며 눈을 감는다.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연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고 답해주세요 . 전 지금 벼랑의 끝에 내어 몰려 있어요 . 살
아내고 싶어요 .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을 지푸라기 정도로 이용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
어요 . 아시겠죠? 유일하게 절 이해하실 분이 선생님뿐이란 걸 .]
[ .]
여자가 정지된 BMW를 노려보면서 말을 잇는다.
[마을 사람들이 신혜와 절 발견했을 당시엔 저 역시도 혼이 나간 상태였다더군요 . 신혜
의 부모님과 저의 부모님은 우리 둘을 곧장 꽤 유명하다는 기도원에 입원시켰나봐요 . 다
행히 길진 않았다더군요 .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제가 정신이 돌아온 거예요 . 기적이 일
어났다고 기도원에 잔치가 벌어졌죠 . 설명드리지 않아도 기적따윈 웃기는 쇼맨쉽이란
걸 잘 아실 거예요 . 선생님에 대해서 조사했었죠. 선생님도 작년 8월 24일 새벽 4시에
오랜 정신착란에서 깨어나셨더군요.]
내가 식은 땀을 흘리며 여자를 휙 노려본다.
[요점이 뭐요?]
여자가 나를 한동안 바라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틀렸군요 .]
[뭐가 틀렸다는 거지?]
[도와주세요!! 제 친구는 지금 지옥 속을 헤메이고 있어요 . 아니, 우리가 모르던 시간
의 역사 속에서 그 괴물들에게 희생 당한 수많은 영혼들이 오늘도 안식을 찾지 못한 채 울
부짖고 있어요!! 아실 거예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난 내리겠어!!]
내가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문을 열고 나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차가 휘청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혜수가 차의 시동을 건 것이다.
[도망만 친다고 해결되진 않아요!!]
차가 어느새 가볍게 출발하고 있었다.
[미쳤군!!]
[그래요!! 전 이미 육 개월 전에 미쳐버렸죠!! 이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사
는 거냐구요?!!]
[세우지 못해!!]
차는 헛바퀴를 돌며 모래 위를 마구 빠져나가고 있었다. 덜컹하며 차가 비포장 도로 위로
튀어오른다. 여유를 부리던 BMW가 그제서야 당황하며 해변을 가볍게 미끄러져 달려온
다
. 내가 얼핏 신혜를 바라보자 그녀는 울고 있었다. 여자는 주도 면밀한 계획 아래에서
나를 초대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녀가 계획하고 있는 비밀이 무엇이든 간에 다시는 이
따위 지랄같은 사건에 얽혀 들어선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차를 세워!!]
길의 끝에서 여자가 우회전을 하며 차를 세운다. 내가 신혜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리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내가 여자를 바라본다. 그녀가 뜷어질 듯이 백미러를 노려본다. 아니나 다를까 백미러를
통해서 BMW가 눈발을 헤치고 잽싸게 달려오고 있다.
삼봉 해수욕장 주변은 한국 소나무들이 빼곡히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유명하다.
그 소나무들 위로 눈이 쌓여가고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일렬로 늘어서 장관을 이루
는 것 같았다. 닭 쫒는 미친 개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던 BMW가 우리를 지나쳐 저만치
사
라져가고 이내 신혜는 프라이드를 좁은 소나무 숲 길 안으로 몰고 들어간다.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않아도 난 .]
[제 친구를 한 번만 만나주세요!! 보시면!!]
순간 차가 끼이익 왼쪽으로 꺽히며 소나무를 쾅하고 들이박고 만다. 내가 핸들을 꺽었던
것이다.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씩씩거리고 있을 뿐이었
다.
[정말 예의가 없군!! 내게 이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
신혜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여자에게 뭐라고 다시 쏘아대려다 그냥 돌아선다
. 그리고 문을 반쯤 열 때였다. 날 주춤하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몰려들어오는 눈발과
함께 새어나온다.
[어젯밤에도 도움을 청해왔어요 . 배에 분명히 분명히 글자가 새겨졌어요 . 엑소시스
트처럼 . 전 그게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인줄 알았어요 .]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윌리엄 피터 블레티어의 엑소시스트는 철저한 고증으로 씌여
졌고 혈액의 유압으로 글자 쓰기는 귀신 들린 자들의 아주 오랜 고전적인 메세지 전달 방
식이었다. 내가 다시 문을 쾅하고 닫는다.
[어디에 씌여졌지 ?]
혜수는 잠시 입술을 깨문다. 그러더니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전방을 노려본다.
[처음엔 배 부분이었어요 . 근데 근데 어제는 옷을 갈아 입히려는데 허벅지에 그래
요, 아주 선명한 글씨였어요 .]
[내용은 ?]
그녀가 입술을 깨문다.
[혜수야 너무 어두워 . 날 좀 구해줘 .]
내가 손바닥에 고인 땀을 무릎에다 쓱쓱 문질러 닦는다. 신혜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나
를 휙 바라본다.
[선생님만이 하실 수 있어요!! 전 알아요!! 그때 개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버스를 세
우던 선생님의 용기를 기억하고 있어요!!]
[난 아냐 .]
[왜요? 신혜가 개 한 마리보다 못해서 인가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알잖아!! 우린 다시 그 지옥 속으로 들어갈 수도,
또 들어가서도 안돼 .]
혜수가 차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정신이 돌아오던 그 날 새벽 난 그 동안 나를 에워싸던 신을 비웃으며 신혜를 데리고 기
도원을 빠져나왔죠. 그리고 찾아 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어요. 지난 몇 달 동안 제가 한
것이라곤 다시 한 번 그 지옥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일 뿐이었죠.]
내가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혜수를 바라본다.
[그땐 우린 운이 좋았던 거야!!]
[다시 또 좋을 수도 있어요 .]
[지금은 안돼! 무슨 뜻인줄 알아? 지금은 안된다구!!]
혜수가 한동안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나의 뜻을 알았다는 듯이 시동을 건다. 박혀 있
던 소나무에서 차가 빠져나오면서 다시 넓은 비포장도로로 향한다. 차가 막 비포장 도로
로 접어들 때였다. 예의 그 시커먼 BMW가 끼이익하며 우리 앞을 막아선다. 더 이상 어
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을 다닌다는 게 좀 우스운 짓이란 생각도 들었
다. 혜수와 난 동시에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BMW에 탄 남자들도 차에서 내린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내가 차에서 내린 두 명의 남자들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
[시간 좀 내주시죠? 안에 계신 분들이 얘길 좀 했으면 하는데.]
짙은 코팅 윈도우가 스르르 내려가며 안에 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앞 좌석엔 미국
인이 타고 있었고 뒤엔 꽤 점잖은 듯한 30 대의 남자가 눈을 껌뻑이며 우리를 바라본다.
내가 혜수를 바라보자 그녀가 과감하게 뒷문을 열고 들어간다. 실례해요라고 짧게 말한
뒤 뒷의자에 앉은 혜수가 나를 보며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차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들어가자 마자 BMW는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인다. 우리가 어이없다는 표
정으로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혜수의 프라이드를 예의 두 남자가 몰고 온다.
[캔 아이 스피크 잉글리쉬?]
내가 혜수를 바라보기가 무섭게 혜수의 입에서 슈얼하는 딱딱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미국
인이 다소 안심이 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대화를 시작한다.
[전 미국방성에서 근무하는 스티븐 바우어라고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저
희들도 알만큼 안다는 겁니다.]
대체 뭔 말을 하시는 겁니까?]
나의 불쾌한 심기를 금새 누그러뜨리는 말이 미국인의 입으로부터 새어나온다.
[코넬 대학에서 치루어지던 연구 자료들을 다 조사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예일대와의
공동 연구로 진행되어 오던 자료, 즉 성은주씨의 자기최면 동화상 테잎에 담긴 내용들
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내 목젖이 꿀꺽인다.
[얼마나 찾아 헤메였는지 , 그 동화상 속의 세계 말입니다 . 결국 여기와서 감이 잡히는
군요 .]
[이봐요!]
[놀라운 사실입니다. 벌써부터 파장 측진기가 난리를 부리고 있습니다. 조사해 봤더니 두
분 다 이근처 백사장의 성황당 아래에서 발견된 경험을 가지고 있더군요 .]
혜수가 얼굴을 붉힌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자기최면은 뭐고, 동화상은 또 .]
[조급해하지 마십시요 . 잠시 후에 보여드릴테니까 .]
스티븐이란 남자가 발정기의 숫캐처럼 음산한 눈으로 혜수를 바라본다. 혜수 역시도 그
남자의 눈빛에 압도 당하여 침을 꼴깍 삼킨다. 내가 언성을 높인다.
[차 세워요!!]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시는가 보군.]
남자의 언성은 사뭇 위압적이었다. 내가 남자를 바라본다.
[성은주씨는 이제 며칠 후면 죽을 몸이고 죽기 전에 우린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
이 있소 .]
내가 남자를 천천히 바라본다.
[심장은 더 이상 복개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썩어 있고 이젠 그녀에게 고착된 의학적 관심
을 넘어서서 우린 성은주씨를 닮은 새로운 대체가 필요하단 거요 .]
[이 개새끼들 .]
내가 미국인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남자는 꿈쩍도 않고 날 노려본다. 내가 열을 올린다
.
[그럼 지금까지 은주를 볼모로 잡고 있었단 말야?]
남자가 천천히 내 손목을 잡고 억센 힘으로 비틀어 떼어낸다. 그리고 이제는 옆에 공포
로 떨고 있는 혜수를 향한다.
[볼모라뇨? 우린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그녀의 심장 몇 점을 떼어내려던 거 뿐이었죠
.]
[헛소리 하지 말아!!]
[헛소리는 자네가 지껄이고 있는 것 같군!! 그 악마같은 계집이 얼마나 영악했는질 알아
? 삼십 명의 희생자를 내곤 먼저 꼬리를 치더라구 . 당신같은 답답한 좀생원을 건드리
지 않는 조건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져가라는 거야 . 하지만 너무 썩어있더군 . 우린 그
동안 오히려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도구에 불과했어 .]
그 억지 같은 반론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떨군다. 날 비웃듯이 바라보던 스티븐이 이젠
혜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젠 아가씨 얘길 좀 해볼까? 친구 분이 꽤 심각하다는데 .]
[어떻게 .]
순진하긴 쯧쯧 하는 눈으로 남자가 비시시 웃는다. 그리고 혜수의 하얀 목젖을 훔쳐
보다가 남자가 입술에 침을 적시며 속 보이는 제안을 던져 놓는다.
[피차에 도움을 줄 수있는 문제가 아닐까? 안 그렇습니까? 목사님?]
내가 뒷좌석의 목사라는 남자를 바라봤을 때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남자는 하얗
게 쌓여가는 세상을 향해서 깊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도로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차는
멈추고 있었다. 거대한 알루미늄의 탑차가 눈에 덮여가며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 미국인 남자가 먼저 차에서 목사라는 남자가 내렸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려는 혜수의
팔을 잡고 내가 말한다.
[혜수, 아무 말도 듣지 마!!]
혜수가 나를 한동안 바라본다.
[어차피 이대로는 견딜 수 없는 일 아네요?]
혜수가 차에서 내리고 혼자 남겨진 차 안에선 다시 지독한 두통이 몰려오는 듯했다.
은주는 그동안 미국과 나의 아파트를 오가며 그들과 계약을 한 게 분명했다. 자신의 심장
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오만한 계약과 맞바꿔 가며 그들에게 제공한 게 분명했다. 하
지만 그 순진한 악마는 오히려 저 지독한 인간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고 어쩌면 나마저
이미 저들의 실험 도구로 전락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파괴된 심장이 견딜 수 없게 되자 내 가슴에 피를 토하며 실신하던 그녀는 지금
이 시간도 코넬 대학의 어두운 지하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의 생체실험 도구로 희생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한 채 그들을 노려봤을 때 이미 아무 것도 모르는 혜수는
그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가며 그 거대한 탑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안돼 . 다시는 안돼 .
하지만 이미 상황은 마지막 파국을 향하여 거대하게 치닫고 있는 게 분명했고 지금까지의
어떠한 공포도 어린애 장난으로 비웃고 마는 엄청난 죽음들이 내게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땅으로 내디디고 있었다. 하얀 눈이 소리없이 쌓이며 뽀드득 소
리를 내고 있었다.
20화. 상심의 바다
내가 막 그 작은 장롱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따르르릉 두 대의 전화가 요란하게 동
시에 스테레오로 울부짖고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난 장롱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다시 돌아서서 방을 나간다. 그리고 여전히 앵앵거리는 전화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벨이 지쳐갈 때 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
였다.
[흐흐흐흑 .]
[여보세요 . 누구십니까?]
여자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는지 겨우 말문을 턴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만나주세요 .]
[대체 누구십니까?]
한참 후 여자는 겨우 울음을 멈추고 꿋꿋하게 말한다.
[절 기억 못하시겠어요?]
순간 내 머리 곁으로 한 줄기 섬광이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그래 바로 그 여자다 .
[자기 수술 잘 끝나고 튼튼한 심장 가지고 돌아오면 우리 이런 데서 살자. 옥수수도 키우
고 원두막도 짓고 자기 좋아하는 담쟁이로 온통 집을 덮어버리고 그렇게 살자 .]
눈이 하얗게 내린 안면도의 바닷가에서 이제 막 기우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
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섬이었지만 어젯밤 뜻하지 않은 여자의 전화 한 통은 운명처
럼 날 다시 이 섬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어느 날 분풀이로 떠났던 아주 우연한 여행에서 시작되는 굴절된 공포의 기억들 . 내 스
스로 이름 붙여버린 소아병적인 발상의 이름 고양이 여인숙 . 그리고 져니 광추면 괴물
고양이 소녀 은주 왜 그 악몽들은 이토록 잔인하게 서른이 넘도록 내 인생에 달라붙
어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그렇게 오랫동안 맴을 돌며 서성이는 건가?
제발 제발 삼봉 해수욕장의 그 넓은 모래사장 위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눈을 감아도 파
도 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은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건석씨 왜 다시 이곳엘 왔나요 .
잊어야 해요 . 당신이 잡으려는 것들은 은주가 아네요 .
미완의 욕망만이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악마일 뿐이예요 .
이래선 안돼요 . 은주를 죽이세요 .
모두를 위하는 길이예요 .
이제 그만 제 영혼을 자유롭게 놓아주세요 .
안면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진득한 지옥의 탁한 냄새와 바로 얼마
전에 겪은 듯한 그 생생한 살육만이 안면도의 구석구석에 베여 있을 뿐, 정작 그리운 은
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삼봉 해수욕장의 그 넓은 해안길을 따라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 눈을 맞으며 그
냥 녹아버리고 싶었다. 백 날을 너의 창 문 앞에서 니가 창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다 마
침내 눈사람이 되어 버려도 좋다라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오늘은 은주를 만나는 그
순간까지 그냥 이대로 눈사람이 되고 싶었다.
파도가 밀려나간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등대 뒤로 한 척의 배
가 가물거리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 .]
내가 눈을 번쩍 뜨며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그래, 그 여자였다. 다소 헬쑥해진 모습이
었지만 미친듯이 공격해오던 살인 고양이 떼들을 향해 폭죽처럼 사진기 후레쉬를 터뜨리
던 그 여자였다.
[맞군요 . 선생님 .]
여자는 금새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난 마치 악몽이 내 눈 앞에 재현되는 듯
이 덜덜 떨리는 눈으로 여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떻게 .]
[줄곧 선생님을 찾았더랬어요 . 89년 8월에 선생님과 그 여자분이 성황당 옆 납골당에서
발견된 사건이 접수되어 있더군요 . 아시겠지만 안면 경찰서엔 작년 8월 저희들의 피해
사건도 접수되어 있었구요 .]
내가 꿈결처럼 여자를 바라본다.
[저희들이란 .]
여자가 잠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발끝으로 툭툭 모래 속에 박힌 소라껍질을 파낸다.
[신혜와 나 이렇게 둘 말이죠 .]
겨우 말문을 열던 여자가 풀썩 자리에 쓰러지듯이 쪼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마구 울기 시작한다. 여자는 설움이 북받치는지 한참을 울뿐이었
다. 하얀 눈은 그녀의 남루한 어깨 위에 쌓이다가 이내 바람에 우르르 떨어진곤 한다. 내
가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세운다.
[자, 자 .]
[죄송해요 . 이렬려구 했던 게 아닌데 선생님을 뵈니 갑자기 너무 무서워져서 .]
[압니다 . 사실 저도 한순간 너무 무서웠습니다 .]
여자가 어린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내게 손을 스윽 내어민다.
[인사가 늦었죠. 전 혜수라고 해요 . 신혜수 .]
내가 그녀의 작고 고운 손을 꼭 쥐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차 가지고 오셨나요?]
[아뇨.]
[그럼 제 차로 들어가실래요?]
여자가 가리킨 해변 입구에 빨간 프라이드 한 대가 조용히 서있다.
[그래요, 날씨가 차군요 . 들어갑시다.]
차가 있는 곳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쏴한 바닷바람이 우리 두 사람의 흐트러진 추억들
을 선명하게 재조립해주는 것 같았다. 여자는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잔혹했던 기
억들이 다만 꿈이었다는 듯이 대화의 꼬리를 풀어나갔다.
[아무리 부인해도 이젠 어쩔 수 없군요 . 아세요?]
여자가 갑자기 나를 휙 바라본다. 여자의 파리한 입술이 무겁던 기분을 퍽이나 쇄락(灑落
)시킨다.
[그 지옥을 온전한 상태로 빠져나온 사람이 우리 둘 뿐이란 사실.]
[다행이군요.]
[말씀해주세요.]
여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날 또렷히 바라본다.
[버스에 탔던 그 여자분 .]
순간 악몽이 나를 덮친다.
괴물의 날카로운 손에 목이 잡힌 여자의 친구 입에서 벌컥 벌컥 튀어 나오던 선혈의 덩어
리. 혜수라는 이 여자의 후레쉬 공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괴물이 고통스러운 듯이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여자의 목을 잡고 힘을 가하던 소리.
으드득 하는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이 거의 거꾸로 돌아가고 , 혜수라는 여자
가 비명을 지르며 괴물을 향해 덤벼들고 , 괴물의 등짝에 올라타서는 마구 괴물을 때리던
여자의 얼굴로 퍽하고 튀어오르던 피 . 그 선혈이 홍수처럼 여자의 얼굴 위에서 타내리
고 , 동시에 흔들리는 버스 구석으로 마구 굴러가던 그 머리 .
지금도 수시로 악몽 속에서 나를 향해 굴러오는 여자의 머리 .
혜수라는 여자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기고 있었다. 그 이후 이 여자는 실신을 했으니까 .
운전대를 잡아!!> 내가 은주에게 소리를 지르고 날 바라보던 은주 . 은주가 맞다면
운전대를 잡아!! 지난 달 내가 가르쳐 줬잖아!!>
[그분은 정상이겠죠? 아님 신혜처럼 송장이거나 .]
내가 언뜻 현실로 돌아오며 창백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본다.
[그럼 친구는 .]
[완전히 넋이 나갔어요 . 대소변도 못가릴 정도예요 .]
프라이드 안은 꽤 넉넉했다. 여자가 보온 병의 두껑을 열고 커피를 따라준다.
[절 만나자고 한 건 .]
[저 사람들은 누군가요?]
혜수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명의 남자가 얼른 수풀 속에 감추어 두었던 BM
W로 올라탄다. 내가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안면도로 오던 버스의 꽁무니에 붙어 끝
없이 나를 따라오던 저 낯선 이방인들 .
[신경쓰지 말아요.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 .]
내가 고개를 뒤로 뉘이며 눈을 감는다.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연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고 답해주세요 . 전 지금 벼랑의 끝에 내어 몰려 있어요 . 살
아내고 싶어요 .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을 지푸라기 정도로 이용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
어요 . 아시겠죠? 유일하게 절 이해하실 분이 선생님뿐이란 걸 .]
[ .]
여자가 정지된 BMW를 노려보면서 말을 잇는다.
[마을 사람들이 신혜와 절 발견했을 당시엔 저 역시도 혼이 나간 상태였다더군요 . 신혜
의 부모님과 저의 부모님은 우리 둘을 곧장 꽤 유명하다는 기도원에 입원시켰나봐요 . 다
행히 길진 않았다더군요 .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제가 정신이 돌아온 거예요 . 기적이 일
어났다고 기도원에 잔치가 벌어졌죠 . 설명드리지 않아도 기적따윈 웃기는 쇼맨쉽이란
걸 잘 아실 거예요 . 선생님에 대해서 조사했었죠. 선생님도 작년 8월 24일 새벽 4시에
오랜 정신착란에서 깨어나셨더군요.]
내가 식은 땀을 흘리며 여자를 휙 노려본다.
[요점이 뭐요?]
여자가 나를 한동안 바라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틀렸군요 .]
[뭐가 틀렸다는 거지?]
[도와주세요!! 제 친구는 지금 지옥 속을 헤메이고 있어요 . 아니, 우리가 모르던 시간
의 역사 속에서 그 괴물들에게 희생 당한 수많은 영혼들이 오늘도 안식을 찾지 못한 채 울
부짖고 있어요!! 아실 거예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난 내리겠어!!]
내가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문을 열고 나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차가 휘청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혜수가 차의 시동을 건 것이다.
[도망만 친다고 해결되진 않아요!!]
차가 어느새 가볍게 출발하고 있었다.
[미쳤군!!]
[그래요!! 전 이미 육 개월 전에 미쳐버렸죠!! 이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게 사
는 거냐구요?!!]
[세우지 못해!!]
차는 헛바퀴를 돌며 모래 위를 마구 빠져나가고 있었다. 덜컹하며 차가 비포장 도로 위로
튀어오른다. 여유를 부리던 BMW가 그제서야 당황하며 해변을 가볍게 미끄러져 달려온
다
. 내가 얼핏 신혜를 바라보자 그녀는 울고 있었다. 여자는 주도 면밀한 계획 아래에서
나를 초대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녀가 계획하고 있는 비밀이 무엇이든 간에 다시는 이
따위 지랄같은 사건에 얽혀 들어선 안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차를 세워!!]
길의 끝에서 여자가 우회전을 하며 차를 세운다. 내가 신혜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리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내가 여자를 바라본다. 그녀가 뜷어질 듯이 백미러를 노려본다. 아니나 다를까 백미러를
통해서 BMW가 눈발을 헤치고 잽싸게 달려오고 있다.
삼봉 해수욕장 주변은 한국 소나무들이 빼곡히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유명하다.
그 소나무들 위로 눈이 쌓여가고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일렬로 늘어서 장관을 이루
는 것 같았다. 닭 쫒는 미친 개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던 BMW가 우리를 지나쳐 저만치
사
라져가고 이내 신혜는 프라이드를 좁은 소나무 숲 길 안으로 몰고 들어간다.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않아도 난 .]
[제 친구를 한 번만 만나주세요!! 보시면!!]
순간 차가 끼이익 왼쪽으로 꺽히며 소나무를 쾅하고 들이박고 만다. 내가 핸들을 꺽었던
것이다.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씩씩거리고 있을 뿐이었
다.
[정말 예의가 없군!! 내게 이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
신혜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여자에게 뭐라고 다시 쏘아대려다 그냥 돌아선다
. 그리고 문을 반쯤 열 때였다. 날 주춤하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몰려들어오는 눈발과
함께 새어나온다.
[어젯밤에도 도움을 청해왔어요 . 배에 분명히 분명히 글자가 새겨졌어요 . 엑소시스
트처럼 . 전 그게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인줄 알았어요 .]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윌리엄 피터 블레티어의 엑소시스트는 철저한 고증으로 씌여
졌고 혈액의 유압으로 글자 쓰기는 귀신 들린 자들의 아주 오랜 고전적인 메세지 전달 방
식이었다. 내가 다시 문을 쾅하고 닫는다.
[어디에 씌여졌지 ?]
혜수는 잠시 입술을 깨문다. 그러더니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전방을 노려본다.
[처음엔 배 부분이었어요 . 근데 근데 어제는 옷을 갈아 입히려는데 허벅지에 그래
요, 아주 선명한 글씨였어요 .]
[내용은 ?]
그녀가 입술을 깨문다.
[혜수야 너무 어두워 . 날 좀 구해줘 .]
내가 손바닥에 고인 땀을 무릎에다 쓱쓱 문질러 닦는다. 신혜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나
를 휙 바라본다.
[선생님만이 하실 수 있어요!! 전 알아요!! 그때 개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버스를 세
우던 선생님의 용기를 기억하고 있어요!!]
[난 아냐 .]
[왜요? 신혜가 개 한 마리보다 못해서 인가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알잖아!! 우린 다시 그 지옥 속으로 들어갈 수도,
또 들어가서도 안돼 .]
혜수가 차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정신이 돌아오던 그 날 새벽 난 그 동안 나를 에워싸던 신을 비웃으며 신혜를 데리고 기
도원을 빠져나왔죠. 그리고 찾아 온 곳이 바로 이곳이었어요. 지난 몇 달 동안 제가 한
것이라곤 다시 한 번 그 지옥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일 뿐이었죠.]
내가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혜수를 바라본다.
[그땐 우린 운이 좋았던 거야!!]
[다시 또 좋을 수도 있어요 .]
[지금은 안돼! 무슨 뜻인줄 알아? 지금은 안된다구!!]
혜수가 한동안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나의 뜻을 알았다는 듯이 시동을 건다. 박혀 있
던 소나무에서 차가 빠져나오면서 다시 넓은 비포장도로로 향한다. 차가 막 비포장 도로
로 접어들 때였다. 예의 그 시커먼 BMW가 끼이익하며 우리 앞을 막아선다. 더 이상 어
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을 다닌다는 게 좀 우스운 짓이란 생각도 들었
다. 혜수와 난 동시에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BMW에 탄 남자들도 차에서 내린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내가 차에서 내린 두 명의 남자들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
[시간 좀 내주시죠? 안에 계신 분들이 얘길 좀 했으면 하는데.]
짙은 코팅 윈도우가 스르르 내려가며 안에 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앞 좌석엔 미국
인이 타고 있었고 뒤엔 꽤 점잖은 듯한 30 대의 남자가 눈을 껌뻑이며 우리를 바라본다.
내가 혜수를 바라보자 그녀가 과감하게 뒷문을 열고 들어간다. 실례해요라고 짧게 말한
뒤 뒷의자에 앉은 혜수가 나를 보며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차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들어가자 마자 BMW는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인다. 우리가 어이없다는 표
정으로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혜수의 프라이드를 예의 두 남자가 몰고 온다.
[캔 아이 스피크 잉글리쉬?]
내가 혜수를 바라보기가 무섭게 혜수의 입에서 슈얼하는 딱딱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미국
인이 다소 안심이 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대화를 시작한다.
[전 미국방성에서 근무하는 스티븐 바우어라고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저
희들도 알만큼 안다는 겁니다.]
대체 뭔 말을 하시는 겁니까?]
나의 불쾌한 심기를 금새 누그러뜨리는 말이 미국인의 입으로부터 새어나온다.
[코넬 대학에서 치루어지던 연구 자료들을 다 조사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예일대와의
공동 연구로 진행되어 오던 자료, 즉 성은주씨의 자기최면 동화상 테잎에 담긴 내용들
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내 목젖이 꿀꺽인다.
[얼마나 찾아 헤메였는지 , 그 동화상 속의 세계 말입니다 . 결국 여기와서 감이 잡히는
군요 .]
[이봐요!]
[놀라운 사실입니다. 벌써부터 파장 측진기가 난리를 부리고 있습니다. 조사해 봤더니 두
분 다 이근처 백사장의 성황당 아래에서 발견된 경험을 가지고 있더군요 .]
혜수가 얼굴을 붉힌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자기최면은 뭐고, 동화상은 또 .]
[조급해하지 마십시요 . 잠시 후에 보여드릴테니까 .]
스티븐이란 남자가 발정기의 숫캐처럼 음산한 눈으로 혜수를 바라본다. 혜수 역시도 그
남자의 눈빛에 압도 당하여 침을 꼴깍 삼킨다. 내가 언성을 높인다.
[차 세워요!!]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시는가 보군.]
남자의 언성은 사뭇 위압적이었다. 내가 남자를 바라본다.
[성은주씨는 이제 며칠 후면 죽을 몸이고 죽기 전에 우린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
이 있소 .]
내가 남자를 천천히 바라본다.
[심장은 더 이상 복개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썩어 있고 이젠 그녀에게 고착된 의학적 관심
을 넘어서서 우린 성은주씨를 닮은 새로운 대체가 필요하단 거요 .]
[이 개새끼들 .]
내가 미국인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남자는 꿈쩍도 않고 날 노려본다. 내가 열을 올린다
.
[그럼 지금까지 은주를 볼모로 잡고 있었단 말야?]
남자가 천천히 내 손목을 잡고 억센 힘으로 비틀어 떼어낸다. 그리고 이제는 옆에 공포
로 떨고 있는 혜수를 향한다.
[볼모라뇨? 우린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그녀의 심장 몇 점을 떼어내려던 거 뿐이었죠
.]
[헛소리 하지 말아!!]
[헛소리는 자네가 지껄이고 있는 것 같군!! 그 악마같은 계집이 얼마나 영악했는질 알아
? 삼십 명의 희생자를 내곤 먼저 꼬리를 치더라구 . 당신같은 답답한 좀생원을 건드리
지 않는 조건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져가라는 거야 . 하지만 너무 썩어있더군 . 우린 그
동안 오히려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도구에 불과했어 .]
그 억지 같은 반론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떨군다. 날 비웃듯이 바라보던 스티븐이 이젠
혜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젠 아가씨 얘길 좀 해볼까? 친구 분이 꽤 심각하다는데 .]
[어떻게 .]
순진하긴 쯧쯧 하는 눈으로 남자가 비시시 웃는다. 그리고 혜수의 하얀 목젖을 훔쳐
보다가 남자가 입술에 침을 적시며 속 보이는 제안을 던져 놓는다.
[피차에 도움을 줄 수있는 문제가 아닐까? 안 그렇습니까? 목사님?]
내가 뒷좌석의 목사라는 남자를 바라봤을 때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남자는 하얗
게 쌓여가는 세상을 향해서 깊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도로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차는
멈추고 있었다. 거대한 알루미늄의 탑차가 눈에 덮여가며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 미국인 남자가 먼저 차에서 목사라는 남자가 내렸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려는 혜수의
팔을 잡고 내가 말한다.
[혜수, 아무 말도 듣지 마!!]
혜수가 나를 한동안 바라본다.
[어차피 이대로는 견딜 수 없는 일 아네요?]
혜수가 차에서 내리고 혼자 남겨진 차 안에선 다시 지독한 두통이 몰려오는 듯했다.
은주는 그동안 미국과 나의 아파트를 오가며 그들과 계약을 한 게 분명했다. 자신의 심장
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오만한 계약과 맞바꿔 가며 그들에게 제공한 게 분명했다. 하
지만 그 순진한 악마는 오히려 저 지독한 인간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고 어쩌면 나마저
이미 저들의 실험 도구로 전락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파괴된 심장이 견딜 수 없게 되자 내 가슴에 피를 토하며 실신하던 그녀는 지금
이 시간도 코넬 대학의 어두운 지하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의 생체실험 도구로 희생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한 채 그들을 노려봤을 때 이미 아무 것도 모르는 혜수는
그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가며 그 거대한 탑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안돼 . 다시는 안돼 .
하지만 이미 상황은 마지막 파국을 향하여 거대하게 치닫고 있는 게 분명했고 지금까지의
어떠한 공포도 어린애 장난으로 비웃고 마는 엄청난 죽음들이 내게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땅으로 내디디고 있었다. 하얀 눈이 소리없이 쌓이며 뽀드득 소
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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