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내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고양이 여인숙
18화. 내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세상이 주홍이었다. 어디선가 황토 바람이 휑하니 불어왔다. 그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쓰
고 내가 우두커니 서있다.
일그러진 형상의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 옆으로 세 갈래의 길이 주홍의 세상을 향
해서 조용히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나무들 곁에는 이미 처절하게 부숴진 버스 한 대가
바람에 끼이익 끼이익 소리를 내며 음산하게 내버려져 있다. 나는 천천히 그 버스를 향
해서 걸어간다.
버스로부터 여전히 고양이들의 피냄새와 절규하던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
다. 나의 다리가 가늘게 떨리고 내 이마에선 식은 땀이 흐른다. 내가 다가가자 버스의 운
전대가 핑그르르 돌아가고 있다.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가 내 등짝을 타고 오른다. 다
시 휑하니 불어오는 흙먼지 .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
버스에 오르고 싶었다 . 탈출하고 싶었다. 여전히 지옥만이 존재하는 이 혼미한 세상으로
부터 그렇게 탈출하고 싶었다. 이 버스에 오르기만하면 그냥 날 싣고 사랑하는 은주에게
로 데려다 줄 것만 같은 충동이 들었다. 여전히 날보고 컹컹 짖으며 반겨줄 져니가 있
는 곳으로 버스는 그렇게 날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
수차례 망설이며 난 조바심을 낸다. 마침내 나의 발은 천천히 문짝이 달아난 버스의 계단
으로 한 발을 가져간다.
그때였다 . 저쪽에서 뭔가가 바람에 또르르르 굴러왔다.
내가 눈을 돌렸을 때 내 앞에 멈춘 물체는 바로 마지막 희생자이던 그 여자의 목이었다.
퍼뜩 눈을 떴다.
머리가 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여전히 요란한 경보음 만이 허공 속에서 춤을 추고 있
었다. 구토가 날 것 같은 속쓰림을 겨우 추스리며 가까스로 일어났다. 주위는 그야 말로
한차례의 전쟁을 치룬 베트남의 햄버거 힐 고지를 연상케 만들었다. 천정을 바라봤다
. 발광을 하며 돌아가던 원형의 고리들은 어느새 멈추어 있었고 그 고리들 주변으론 병사
들의 M16이 빼곡히 달라붙어 마치 조각공원에 세워진 전위적인 실험작 한 점을 감상하는
듯했다. 그 쇠조각들 사이 사이에는 조각난 병사들의 잔재들이 빨래감처럼 너덜너덜 널
려 있었다.
나로 하여금 그들의 주검과 이 잔혹한 킬링필드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마저도 갖지 못하
게 하는 사건이 곧 발생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옆의 바닥을 바라봤다. 허리 아래
부분을 잃어버리고 동강이 난 채 나뒹굴고 있는 랜돌프의 허리에서 무엇인가가 마구 빠
져나가고 있었다. 코넬 대학의 심벌이 버클 위에 거창하게 새겨진 혁대였다.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뱀처럼 혁대는 그렇게 발버등치며 랜돌프의 허리를 탈출하고 있었다.
탈출한 혁대는 잽싸게 공중으로 튀어오르면서 천정에 매달린 M16의 꼬리에 가서 촥하고
달라붙는다. 그제서야 난 저 원형의 고리들이 엄청난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기구임을 알
게 되었고 이들이 은주를 이용해서 얼마나 잔혹한 실험들을 자행해 왔는지를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랜돌프의 말에 의하면 은주가 순간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을 발견해낸 것은 이미 90년 초였
고 그때부터 이들은 은주의 순간 이동을 막기 위해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그 결과 고안
해낸다는 것이 고작 이 공룡 같은 N극과 S극의 지남철임이 분명했다.
애시당초 이들은 은주의 심장병 수술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오직 어떻게 해서라도 은
주의 심장으로부터 그 빌어먹을 항생제 원료따위나 뽑아내려고 했던 게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은주의 심장이 마침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자 이들은 은주의 심장병 수
술마저도 이 기구 안에서 자행했던 것이다. 몇 시간 전에 일어났던 잔혹한 살상들도 두
개의 고리들이 상상 할 수 없는 엄청난 회전력으로 돌아가면서 군인들과 학생들을 가루
로 만든 게 분명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 확신이 자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도 난 은주를 향한 집착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만
은 사실이었다. 은주를 찾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은주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어디선가 쿵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나는
쪽을 향해서 휘청이며 다가갔다. 그 소리는 이미 가부압으로 박살이 난 블랙 박스 뒤
쪽에서 나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그 블랙 박스를 굽이치자 아, 피투성이의 한 병사가
굵은 전기 케이블을 본체로부터 뜯어 내고 있었다. 군화로 전기 박스를 쾅쾅 차며 두터
운 전선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 병사의 아래론 처참하게 찢기워진 은주가 벌벌
떨고 있었다. 병사의 마지막 발악과 함께 전선줄이 우두둑하고 떨어져 나올 때 난 정신
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놈은 분명히 은주를 바베큐를 만들 작정인 게 분명했다.
조각난 수백개의 전선줄이 합선이 되면서 불똥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
전선줄을 들고 병사가 천천히 은주에게로 돌아선다. 은주는 허연 눈동자만이 가득한 얼
굴로 가쁜 숨을 내쉬며 천정을 올려다보며 헐떡이고 있었다. 냉동한 고깃덩어리처럼 빳
빳이 굳은 몸에는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놈이 미쳐 날뛰는 케이블을 천천히 은주의 머리 쪽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놈이 뭐라고 영
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덜 어쩌고 하면서 마침내 복수의 쾌감을 즐기려고 할 때였다
.
으아아하는 괴성과 함께 내가 놈을 덮쳤다. 갑자기 당한 일격에 병사가 휘청하면서 케이
블을 잡은 채 나와 함께 옆의 콘테이너 박스들을 치며 나뒹굴었다.
콘테이너 박스에 절단된 케이블이 닿으면서 퍼벅하는 소리를 내며 놈의 손을 가볍게 빠져
나간다. 미쳐서 날뛰는 케이블이 이쪽 저쪽 아무 곳이나 때리며 불똥을 놈과 나의 머리카
락 위로 마구 쏟아낸다. 놈이 눈을 둥글게 뜨며 나의 턱을 후려친다. 나의 턱이 픽하고
돌아가며 놈을 잡은 손을 놓치고 만다. 놈이 다시 케이블을 잡기 위해 졈프를 한다.
내가 다시 놈을 뒤에서 덮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일순간
어두워져 갔다. 분명히 내 심장 가까이에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아무 소
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완벽한 어둠, 오직 어둠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천천히 하나 둘 숫자를 헤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 마침내 나를 덮쳤던 어둠이 걷히고
천천히 주변의 모습들이 어렴풋이 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모습은
역시 케이블을 쥔 병사의 얼굴이었다. 놈이 낄낄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숨이 멎은 걸로 확신한 놈이 나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은주에게로 다가갔다.
놈이 은주의 머리통으로 케이블을 가져가고 있었다. 뭔가를 해야하는데 손가락 하나도 움
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은주와 나는 죽고 마는구나 . 빨리 이 미세한 심장의 박동이
멈추어주기를 빌었다 . 은주가 마른 고기처럼 튀겨지는 걸 보기 전에 빨리 내 숨이 먼저
끊어져 주기를 소원했다.
병사가 은주를 향해 재빨리 케이블을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케이블을 두 손에 움켜지고 놈이 내 곁으로 털썩 쓰러졌다. 놈의
머리에는 커다란 총알 구멍이 나 있었고 자신이 쥐고 있는 케이블에 의해 고기타는 냄새를
일으키며 펄떡펄떡 튀어오르고 있었다.
주변에는 금방 방균복을 입은 군인들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비상 구급통을 든
의사들도 있는 듯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지른다.
[페노바르비탈 구십 아냐 씨씨 더 주입해 .]
[치명적입니다 뢴트겐 쇼크을 써야 .]
[준비해 .]
누군가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진득한 액체가 주르륵 타내리는 넓은 흡착판을 내
가슴에 댄다. 퍽하는 충격과 함께 늘어져 가는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다.
[루고올 더줘 한번 더 .]
다시 섬뜩한 전기 충격이 희미해져가는 내 의식을 부른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침대차
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천정의 깨어져 나간 전구들이 치직거리며 내 시
야 속으로 휙휙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 속인 듯했다가 이내 나는 길다란 복도를 쏜
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새벽 4시 .
코넬 대학 메디컬 센터의 긴 복도를 빠져나올 때 마지막으로 본 시계의 침이었다. 어둡
고 음산한 분위기의 메디컬 센터 앞은 자가동력 장치도 고장이 났는지 연두빛의 조명들
만이 껌뻑거리며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기 저기 넋을 잃은 사람들이 향방없이 오가고 있었고 스피커를 통해 대단한 소동을 수
습하기 위한 다급한 목소리들이 마구 새어나왔다. 뒤늦게 도착한 병력들이 중구난방으로
방황하는 그 사이로 나는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날 내가 타고 왔던 스테
이션 웨건으로 다시 밀어 넣고 있었다.
칼 세이건 등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정령처럼 머물고 있는 이 유서깊은 교정에 나의 은주
를 내버려두고 다시 난 벌레처럼 구차하게 빠져나간다. 미국 제일의 단풍나무들이 아직은
신록으로 몸부림치는 이 아름다운 교정의 지하 음습한 곳에 다시 양놈들의 실험 대상물
로 내 사랑하는 은주를 남겨두고 난 낙엽조각보다 더 빛바랜 모습을 하고 빠져나가고 있다
.
무슨 슬픈 전설이 가득 담겨 있을 것 같은 아테네 신전을 닮은 건물들을 빠져나오면서도
난 그저 차가운 눈물 한 방울만을 똑하고 흘리는 무력하고 못난 남자 밖에 될 수 없었다.
꿈이었던가. 차는 씩씩거리며 우리가 왔던 루즈벨트 고속도로와는 정 반대인 시내 쪽으
로 달리고 있었다. 여전히 마지막 호흡을 헐떡이는 도시의 네온들이 재빨리 꼬리를 감추
며 차창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 차가운 한기와 졸음이 동시에 몰려왔다. 모든 것이 아련하고 지쳐왔다
. 폭죽처럼 터지던 병사들의 주검들이 어지럽게 눈 앞에서 맴을 돌았다.
누군가가 내 곁으로 살며시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였다.
[제가 말했죠 . 더 이상 당신이 꿈꾸던 은주는 없다고 .]
그리고 그녀의 혀가 내 전신을 핥아내고 있었다. 난 차츰 몸을 뒤틀며 옅은 숨결을 토해
낼 뿐 아무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더이상 바보 같은 짓 말고 돌아가세요 . 내가 얼마나 영악한지 아직도 모르고 있군요
.]
나의 와이셔츠가 위로 말려 올라가고 은주의 혀가 나의 배꼽으로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체모 위로 은주의 입김이 이슬처럼 맺혀가고 .
[난 죽지 않아요 우린 약속했죠 한날 한시에 죽겠다고 .]
어느듯 은주가 혁대를 가볍게 풀어헤치고 있었다. 목젖이 꿀꺽이며 난 옅은 탄성을 자아
낸다 . 은주가 입술을 적시며 속삭인다.
[난 어디든 갈 수 있어요 . 당신의 의심만 아니었다면 난 나비가 되려고 했죠 . 그래서
바람처럼 당신 곁에 머물려고 했죠 . 날이 밝거든 비행기를 타세요 .]
나의 허리가 위로 꺽히고 아, 우주가 요동하고 있었다. 나의 아래에 있던 은주는 순식간
에 내 귓볼을 깨물고 있었고 다시금 격정적인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무도 믿지 말아요 . 명심해요 . 난 어디든 있을 거예요 .]
눈을 떴다. 요란한 새소리들이 사방에서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340헥타르의 어마어마한 면적에서 뿜어져나오는 산림들의 호흡이 훅하고 코 안으로 밀려
들어 왔다. 마천루가 치솟은 뉴욕의 한가운데에서 우거진 신록의 오아시스로 사람들을 유
혹하는 센트럴 파크의 위장부위에 내가 잠들어 있었다.
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웨건 안을 살폈다. 펄럭이는 서류 몇 장과 어젯밤 마시던 커핀
잔만이 바람에 챠임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왔다. 산발적인 공원 벤취에서 잠을 자던 부랑자들이 음산한 눈으로 낯선 이방
인을 주시한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간이 수돗가에 가서 머리를 담갔다. 차가운
물줄기에 정신이 번쩍하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센트럴 파크에 차를 버리고 지하철과 택시를 이용해서 코넬 대학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정오의 열기가 후끈 달아 올라 있었다. 절대로 은주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
미 고양이 여인숙에서 이건석은 죽었고 지금의 이건석은 그냥 껍질 뿐인, 배알도 없는
한심한 놈이라도 좋았다. 무릎을 꿇고 사정이라도 해보리라.
신기했다. 메인 데스크로 가는 복도는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새벽의 그 잔혹한
살상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저 .]
두터운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나를 바라본다.
[전 성은주씨의 남편되는 사람입니다.]
여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수화기를 든다. 그리고 잠시 후 예의 엘
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검은 정장을 한 건장한 남자 두 사람이 걸어 나온다. 난 단번에
그들이 영화 속에 나오는 FBI 뭣쯤이나 되는 작자들인 걸 알아 챌 수 있었다. 내가 여
자를 휙 쳐다본다.
[이 나라엔 인권도 뭣도 없는 나라야?!! 내가 이대로 물러갈 줄 알아?!! 무슨 수를 써
서라도 .]
순간 두 명의 남자가 나의 팔을 꽉 조인다. 그리고 나는 어린 소년처럼 가볍게 남자들에
게 들려서 두번째로 병원에서 추방당해야 했다.
한 명의 남자가 노스웨스튼 데스크에서 나의 출국 수속을 밟고 있었다. 내 주머니엔 사랑
하는 은주와 함께 돌아오기 위한 KAL 왕복 쿠폰의 남은 비행기 표 두 장이 쓸쓸하게 침
묵하고 있었다.
저녁 8시 30분 행 스페셜 좌석을 배정 받는 절차는 신속하게 치루어 지고 있었다. 황급
히 컴퓨터를 두드리며 가끔씩 날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여자의 손을 나 역시 침을 꼴깍 삼
키며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비행기란 비행기는 좌석이 다 차서 날 좀 떠나지 못하게 해주렴 . 어떻게 은주를
두고 또 다시 떠나란 말인가 . 그러나 그런 기적은 날 치며 비켜 지나갔고 난 8시 30분
까지 그 복잡한 케네디 공항의 대합실 한켠에서 두 명의 남자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내
비뚤어진 인생에 대해서 깊이 추스려볼 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망연한 이방인과 로보트 같은 두 명의 남자들을 기이한 눈으로 바
라보았고 이미 말라버린 내 눈에선 눈물도 나질 않았다. 지금쯤 쓰레기가 된 은주를 두
고 저들이 자행할 만행을 생각하자니 다시 분노와 슬픔이 몰려왔다.
난 천천히 두 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제발 제발 .]
뭔가를 말해야 하는데 도무지 어떤 단어도 제대로 내 목구멍을 통과하는 게 없었다. 그냥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그렇게 한동안 흐르는 눈물을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흘
려야 했다. 두 놈은 검은 안경 속에서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전방만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운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승무원에게 담요 한 장을 부탁해서는 그 담요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잠을 청했다. 귓 속에 꽂힌 헤드폰을 통해서 맑고 고운 목소리의 <짐 스
테인만>이 그대 없이는(Whitout You)>을 부른다. 마치 실로폰 소리같은 에어 서프라이
(Air Supply)의 일렉트릭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머라이어 캐리나 해리 닐슨 보다도 더 호
소력 있는 고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난 얼른 채널을 바꾸었다. 쇼팽의 왈츠 시 샾 마이너
가 청명하게 흐르고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사랑은 어차피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니
냐고 천사에게 묻던 은주의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왔다. 마침내 난 가슴을 펄럭이
며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그렇게 나즈막히 담요 속의 그 텅 빈 어
둠 속에서 울고 또 울었다. 쇼팽은 내 울음소리에 맞추어 디 플랫으로 변한 곱고 한없
이 정결한 왈츠로 손내밀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주홍이었다. 어디선가 펄럭이며 먼지들이 몰려온다. 그 바람에 나의 머리
칼이 위로 흐트러진다. 음악은 어느새 장엄한 신디사이저의 베이스 음으로 바뀌어지고 있
었다. 어디선가 너무도 익숙하게 들은 끊이지 않는 전자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음악을 따라 내가 천천히 주변을 살핀다. 음악은 분명히 부숴진 버스 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이 음악은 은주가 <불의 전차>와 함께 최고의 영화 음악으로 꼽던 리
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런너>의 테마 음이 분명했다. 시 마이너의 독특한 16 비트음이 끝
없이 연결되는 무거운 선율 때문에 쉽게 잊혀지지 않던 반젤리스의 음악이 분명했다.
내가 버스 속을 바라봤을 때 버스의 핸들이 끼이익 돌아가고 있었다. 버스는 내가 올라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마침내 버스 속으로 들어간다.
내 발 아래로 뭔가 물커덩하고 밟힌다. 여전히 체온이 식지 않은 고양이들의 육질이었다
. 마침내 내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운전석에 앉는다. 그리고 천천히 핸들을 잡는다.
그리고 시동을 걸기 위해 키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소름 끼치는 목소
리로 말한다.
[당신은 결국 절 찾아올 거예요 .]
난 이 지독한 공포를 탈출하기 위해 후다닥 담요를 벗어제치고 옆좌석을 바라봤다. 그때
내 입으로부터 아악!!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의 옆 좌석에는 이미 고양이의 형체로 변한
은주가 혀를 날름대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불이 켜지고 급히 스튜디어스가 달려왔다. 잠을 자던 몇몇 사람들이 깨어나서는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인가보군 어쩌고 하며 다시 잠을 청한다. 여전히 반젤리스의 섬뜩한 음
악이 흐르는 헤드폰을 온통 땀에 젖은 내 머리로부터 걷어내며 여승무원이 물을 가져오라
고 신호를 보낸다.
물을 따라주며 악몽을 꾸셨나보군요 라고 달래는 승무원의 얼굴을 미친듯한 눈으로 바라봤
다. 다시 승무원이 돌아가고 난 너무도 오싹한 기운에 주위를 돌아봤다. 불현듯 코넬 대
학교로 가던 차 안에서 랜돌프가 한 말이 생각났다.
[성은주씨는 순간 공간 전이 이동을 합니다.]
그렇다. 내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동안 어쩌면 은주는 고의로 그 메디컬 센터에 볼모
로 잡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분명 저 뒷쪽 화장실 쪽으로 번쩍이는 눈빛이 보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장실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리는 사정없이 후들거리고 가끔씩 승객들
의 코고는 소리들이 비행기 안을 가득히 채우곤 했다.
저쪽의 여승무원이 나를 보더니 다시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승무원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비행기 안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좁은 승객 복도를 통과해서 뒷쪽의 화
장실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 열린 화장실 문으로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내가 떨리는 손을 화장실 문을 향해 천천히 가져갈 떄였다. 갑자기 화장실 문이 와락
열리면서 한 중년의 남자가 바지춤을 훔치며 나왔다.
화들짝 놀라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비틀거리며 저만치 사라져 가고 난 지
친 어깨를 벽에 기대었다.
아마도 난 미쳐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쁜 숨을 내쉬는 나위 뒤로 휘미한 목소리가 새
어 나왔다.
[돌아보지 말아요 . 집에서 기다리겠어요 . 건석씨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환희를
준비한 채 . 기억하세요 . 이제부터 시작이예요 .]
난 점점 그 자리에 선 채 얼어붙고 있었다. 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봤다.
그러나 여전히 은주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김포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뉴욕과의 시간 차로 여전히 해가 떨어지지 않은 저녁 무렵이었
다.
난 미친듯이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마구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렇게 신호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울렸을 때 누군가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
상대방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은주야?!! 은주?!!]
철컥하고 수화기를 내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난 수화기를 던져 놓고 공항을 빠져 나
갔다. 그리고 이미 누군가가 올라 타려는 택시를 잽싸게 파고 들었다.
[아저씨, 빨리 빨리 안산으로 .]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택시 기사는 마침내 악셀레타를 밟기 시작했다.
18화. 내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세상이 주홍이었다. 어디선가 황토 바람이 휑하니 불어왔다. 그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쓰
고 내가 우두커니 서있다.
일그러진 형상의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 옆으로 세 갈래의 길이 주홍의 세상을 향
해서 조용히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나무들 곁에는 이미 처절하게 부숴진 버스 한 대가
바람에 끼이익 끼이익 소리를 내며 음산하게 내버려져 있다. 나는 천천히 그 버스를 향
해서 걸어간다.
버스로부터 여전히 고양이들의 피냄새와 절규하던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
다. 나의 다리가 가늘게 떨리고 내 이마에선 식은 땀이 흐른다. 내가 다가가자 버스의 운
전대가 핑그르르 돌아가고 있다.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가 내 등짝을 타고 오른다. 다
시 휑하니 불어오는 흙먼지 .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
버스에 오르고 싶었다 . 탈출하고 싶었다. 여전히 지옥만이 존재하는 이 혼미한 세상으로
부터 그렇게 탈출하고 싶었다. 이 버스에 오르기만하면 그냥 날 싣고 사랑하는 은주에게
로 데려다 줄 것만 같은 충동이 들었다. 여전히 날보고 컹컹 짖으며 반겨줄 져니가 있
는 곳으로 버스는 그렇게 날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
수차례 망설이며 난 조바심을 낸다. 마침내 나의 발은 천천히 문짝이 달아난 버스의 계단
으로 한 발을 가져간다.
그때였다 . 저쪽에서 뭔가가 바람에 또르르르 굴러왔다.
내가 눈을 돌렸을 때 내 앞에 멈춘 물체는 바로 마지막 희생자이던 그 여자의 목이었다.
퍼뜩 눈을 떴다.
머리가 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여전히 요란한 경보음 만이 허공 속에서 춤을 추고 있
었다. 구토가 날 것 같은 속쓰림을 겨우 추스리며 가까스로 일어났다. 주위는 그야 말로
한차례의 전쟁을 치룬 베트남의 햄버거 힐 고지를 연상케 만들었다. 천정을 바라봤다
. 발광을 하며 돌아가던 원형의 고리들은 어느새 멈추어 있었고 그 고리들 주변으론 병사
들의 M16이 빼곡히 달라붙어 마치 조각공원에 세워진 전위적인 실험작 한 점을 감상하는
듯했다. 그 쇠조각들 사이 사이에는 조각난 병사들의 잔재들이 빨래감처럼 너덜너덜 널
려 있었다.
나로 하여금 그들의 주검과 이 잔혹한 킬링필드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마저도 갖지 못하
게 하는 사건이 곧 발생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옆의 바닥을 바라봤다. 허리 아래
부분을 잃어버리고 동강이 난 채 나뒹굴고 있는 랜돌프의 허리에서 무엇인가가 마구 빠
져나가고 있었다. 코넬 대학의 심벌이 버클 위에 거창하게 새겨진 혁대였다.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뱀처럼 혁대는 그렇게 발버등치며 랜돌프의 허리를 탈출하고 있었다.
탈출한 혁대는 잽싸게 공중으로 튀어오르면서 천정에 매달린 M16의 꼬리에 가서 촥하고
달라붙는다. 그제서야 난 저 원형의 고리들이 엄청난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기구임을 알
게 되었고 이들이 은주를 이용해서 얼마나 잔혹한 실험들을 자행해 왔는지를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랜돌프의 말에 의하면 은주가 순간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을 발견해낸 것은 이미 90년 초였
고 그때부터 이들은 은주의 순간 이동을 막기 위해 무척 고심했을 것이다. 그 결과 고안
해낸다는 것이 고작 이 공룡 같은 N극과 S극의 지남철임이 분명했다.
애시당초 이들은 은주의 심장병 수술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오직 어떻게 해서라도 은
주의 심장으로부터 그 빌어먹을 항생제 원료따위나 뽑아내려고 했던 게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은주의 심장이 마침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자 이들은 은주의 심장병 수
술마저도 이 기구 안에서 자행했던 것이다. 몇 시간 전에 일어났던 잔혹한 살상들도 두
개의 고리들이 상상 할 수 없는 엄청난 회전력으로 돌아가면서 군인들과 학생들을 가루
로 만든 게 분명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 확신이 자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도 난 은주를 향한 집착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만
은 사실이었다. 은주를 찾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은주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어디선가 쿵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나는
쪽을 향해서 휘청이며 다가갔다. 그 소리는 이미 가부압으로 박살이 난 블랙 박스 뒤
쪽에서 나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그 블랙 박스를 굽이치자 아, 피투성이의 한 병사가
굵은 전기 케이블을 본체로부터 뜯어 내고 있었다. 군화로 전기 박스를 쾅쾅 차며 두터
운 전선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 병사의 아래론 처참하게 찢기워진 은주가 벌벌
떨고 있었다. 병사의 마지막 발악과 함께 전선줄이 우두둑하고 떨어져 나올 때 난 정신
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놈은 분명히 은주를 바베큐를 만들 작정인 게 분명했다.
조각난 수백개의 전선줄이 합선이 되면서 불똥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
전선줄을 들고 병사가 천천히 은주에게로 돌아선다. 은주는 허연 눈동자만이 가득한 얼
굴로 가쁜 숨을 내쉬며 천정을 올려다보며 헐떡이고 있었다. 냉동한 고깃덩어리처럼 빳
빳이 굳은 몸에는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놈이 미쳐 날뛰는 케이블을 천천히 은주의 머리 쪽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놈이 뭐라고 영
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덜 어쩌고 하면서 마침내 복수의 쾌감을 즐기려고 할 때였다
.
으아아하는 괴성과 함께 내가 놈을 덮쳤다. 갑자기 당한 일격에 병사가 휘청하면서 케이
블을 잡은 채 나와 함께 옆의 콘테이너 박스들을 치며 나뒹굴었다.
콘테이너 박스에 절단된 케이블이 닿으면서 퍼벅하는 소리를 내며 놈의 손을 가볍게 빠져
나간다. 미쳐서 날뛰는 케이블이 이쪽 저쪽 아무 곳이나 때리며 불똥을 놈과 나의 머리카
락 위로 마구 쏟아낸다. 놈이 눈을 둥글게 뜨며 나의 턱을 후려친다. 나의 턱이 픽하고
돌아가며 놈을 잡은 손을 놓치고 만다. 놈이 다시 케이블을 잡기 위해 졈프를 한다.
내가 다시 놈을 뒤에서 덮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일순간
어두워져 갔다. 분명히 내 심장 가까이에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아무 소
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완벽한 어둠, 오직 어둠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천천히 하나 둘 숫자를 헤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 마침내 나를 덮쳤던 어둠이 걷히고
천천히 주변의 모습들이 어렴풋이 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모습은
역시 케이블을 쥔 병사의 얼굴이었다. 놈이 낄낄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숨이 멎은 걸로 확신한 놈이 나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은주에게로 다가갔다.
놈이 은주의 머리통으로 케이블을 가져가고 있었다. 뭔가를 해야하는데 손가락 하나도 움
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은주와 나는 죽고 마는구나 . 빨리 이 미세한 심장의 박동이
멈추어주기를 빌었다 . 은주가 마른 고기처럼 튀겨지는 걸 보기 전에 빨리 내 숨이 먼저
끊어져 주기를 소원했다.
병사가 은주를 향해 재빨리 케이블을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케이블을 두 손에 움켜지고 놈이 내 곁으로 털썩 쓰러졌다. 놈의
머리에는 커다란 총알 구멍이 나 있었고 자신이 쥐고 있는 케이블에 의해 고기타는 냄새를
일으키며 펄떡펄떡 튀어오르고 있었다.
주변에는 금방 방균복을 입은 군인들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비상 구급통을 든
의사들도 있는 듯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지른다.
[페노바르비탈 구십 아냐 씨씨 더 주입해 .]
[치명적입니다 뢴트겐 쇼크을 써야 .]
[준비해 .]
누군가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진득한 액체가 주르륵 타내리는 넓은 흡착판을 내
가슴에 댄다. 퍽하는 충격과 함께 늘어져 가는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기분이다.
[루고올 더줘 한번 더 .]
다시 섬뜩한 전기 충격이 희미해져가는 내 의식을 부른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침대차
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천정의 깨어져 나간 전구들이 치직거리며 내 시
야 속으로 휙휙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 속인 듯했다가 이내 나는 길다란 복도를 쏜
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새벽 4시 .
코넬 대학 메디컬 센터의 긴 복도를 빠져나올 때 마지막으로 본 시계의 침이었다. 어둡
고 음산한 분위기의 메디컬 센터 앞은 자가동력 장치도 고장이 났는지 연두빛의 조명들
만이 껌뻑거리며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기 저기 넋을 잃은 사람들이 향방없이 오가고 있었고 스피커를 통해 대단한 소동을 수
습하기 위한 다급한 목소리들이 마구 새어나왔다. 뒤늦게 도착한 병력들이 중구난방으로
방황하는 그 사이로 나는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날 내가 타고 왔던 스테
이션 웨건으로 다시 밀어 넣고 있었다.
칼 세이건 등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정령처럼 머물고 있는 이 유서깊은 교정에 나의 은주
를 내버려두고 다시 난 벌레처럼 구차하게 빠져나간다. 미국 제일의 단풍나무들이 아직은
신록으로 몸부림치는 이 아름다운 교정의 지하 음습한 곳에 다시 양놈들의 실험 대상물
로 내 사랑하는 은주를 남겨두고 난 낙엽조각보다 더 빛바랜 모습을 하고 빠져나가고 있다
.
무슨 슬픈 전설이 가득 담겨 있을 것 같은 아테네 신전을 닮은 건물들을 빠져나오면서도
난 그저 차가운 눈물 한 방울만을 똑하고 흘리는 무력하고 못난 남자 밖에 될 수 없었다.
꿈이었던가. 차는 씩씩거리며 우리가 왔던 루즈벨트 고속도로와는 정 반대인 시내 쪽으
로 달리고 있었다. 여전히 마지막 호흡을 헐떡이는 도시의 네온들이 재빨리 꼬리를 감추
며 차창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 차가운 한기와 졸음이 동시에 몰려왔다. 모든 것이 아련하고 지쳐왔다
. 폭죽처럼 터지던 병사들의 주검들이 어지럽게 눈 앞에서 맴을 돌았다.
누군가가 내 곁으로 살며시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였다.
[제가 말했죠 . 더 이상 당신이 꿈꾸던 은주는 없다고 .]
그리고 그녀의 혀가 내 전신을 핥아내고 있었다. 난 차츰 몸을 뒤틀며 옅은 숨결을 토해
낼 뿐 아무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더이상 바보 같은 짓 말고 돌아가세요 . 내가 얼마나 영악한지 아직도 모르고 있군요
.]
나의 와이셔츠가 위로 말려 올라가고 은주의 혀가 나의 배꼽으로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체모 위로 은주의 입김이 이슬처럼 맺혀가고 .
[난 죽지 않아요 우린 약속했죠 한날 한시에 죽겠다고 .]
어느듯 은주가 혁대를 가볍게 풀어헤치고 있었다. 목젖이 꿀꺽이며 난 옅은 탄성을 자아
낸다 . 은주가 입술을 적시며 속삭인다.
[난 어디든 갈 수 있어요 . 당신의 의심만 아니었다면 난 나비가 되려고 했죠 . 그래서
바람처럼 당신 곁에 머물려고 했죠 . 날이 밝거든 비행기를 타세요 .]
나의 허리가 위로 꺽히고 아, 우주가 요동하고 있었다. 나의 아래에 있던 은주는 순식간
에 내 귓볼을 깨물고 있었고 다시금 격정적인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무도 믿지 말아요 . 명심해요 . 난 어디든 있을 거예요 .]
눈을 떴다. 요란한 새소리들이 사방에서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340헥타르의 어마어마한 면적에서 뿜어져나오는 산림들의 호흡이 훅하고 코 안으로 밀려
들어 왔다. 마천루가 치솟은 뉴욕의 한가운데에서 우거진 신록의 오아시스로 사람들을 유
혹하는 센트럴 파크의 위장부위에 내가 잠들어 있었다.
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웨건 안을 살폈다. 펄럭이는 서류 몇 장과 어젯밤 마시던 커핀
잔만이 바람에 챠임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왔다. 산발적인 공원 벤취에서 잠을 자던 부랑자들이 음산한 눈으로 낯선 이방
인을 주시한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간이 수돗가에 가서 머리를 담갔다. 차가운
물줄기에 정신이 번쩍하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센트럴 파크에 차를 버리고 지하철과 택시를 이용해서 코넬 대학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정오의 열기가 후끈 달아 올라 있었다. 절대로 은주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
미 고양이 여인숙에서 이건석은 죽었고 지금의 이건석은 그냥 껍질 뿐인, 배알도 없는
한심한 놈이라도 좋았다. 무릎을 꿇고 사정이라도 해보리라.
신기했다. 메인 데스크로 가는 복도는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새벽의 그 잔혹한
살상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저 .]
두터운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나를 바라본다.
[전 성은주씨의 남편되는 사람입니다.]
여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수화기를 든다. 그리고 잠시 후 예의 엘
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검은 정장을 한 건장한 남자 두 사람이 걸어 나온다. 난 단번에
그들이 영화 속에 나오는 FBI 뭣쯤이나 되는 작자들인 걸 알아 챌 수 있었다. 내가 여
자를 휙 쳐다본다.
[이 나라엔 인권도 뭣도 없는 나라야?!! 내가 이대로 물러갈 줄 알아?!! 무슨 수를 써
서라도 .]
순간 두 명의 남자가 나의 팔을 꽉 조인다. 그리고 나는 어린 소년처럼 가볍게 남자들에
게 들려서 두번째로 병원에서 추방당해야 했다.
한 명의 남자가 노스웨스튼 데스크에서 나의 출국 수속을 밟고 있었다. 내 주머니엔 사랑
하는 은주와 함께 돌아오기 위한 KAL 왕복 쿠폰의 남은 비행기 표 두 장이 쓸쓸하게 침
묵하고 있었다.
저녁 8시 30분 행 스페셜 좌석을 배정 받는 절차는 신속하게 치루어 지고 있었다. 황급
히 컴퓨터를 두드리며 가끔씩 날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여자의 손을 나 역시 침을 꼴깍 삼
키며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비행기란 비행기는 좌석이 다 차서 날 좀 떠나지 못하게 해주렴 . 어떻게 은주를
두고 또 다시 떠나란 말인가 . 그러나 그런 기적은 날 치며 비켜 지나갔고 난 8시 30분
까지 그 복잡한 케네디 공항의 대합실 한켠에서 두 명의 남자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내
비뚤어진 인생에 대해서 깊이 추스려볼 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망연한 이방인과 로보트 같은 두 명의 남자들을 기이한 눈으로 바
라보았고 이미 말라버린 내 눈에선 눈물도 나질 않았다. 지금쯤 쓰레기가 된 은주를 두
고 저들이 자행할 만행을 생각하자니 다시 분노와 슬픔이 몰려왔다.
난 천천히 두 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제발 제발 .]
뭔가를 말해야 하는데 도무지 어떤 단어도 제대로 내 목구멍을 통과하는 게 없었다. 그냥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그렇게 한동안 흐르는 눈물을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흘
려야 했다. 두 놈은 검은 안경 속에서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전방만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운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승무원에게 담요 한 장을 부탁해서는 그 담요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잠을 청했다. 귓 속에 꽂힌 헤드폰을 통해서 맑고 고운 목소리의 <짐 스
테인만>이 그대 없이는(Whitout You)>을 부른다. 마치 실로폰 소리같은 에어 서프라이
(Air Supply)의 일렉트릭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머라이어 캐리나 해리 닐슨 보다도 더 호
소력 있는 고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난 얼른 채널을 바꾸었다. 쇼팽의 왈츠 시 샾 마이너
가 청명하게 흐르고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사랑은 어차피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니
냐고 천사에게 묻던 은주의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왔다. 마침내 난 가슴을 펄럭이
며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그렇게 나즈막히 담요 속의 그 텅 빈 어
둠 속에서 울고 또 울었다. 쇼팽은 내 울음소리에 맞추어 디 플랫으로 변한 곱고 한없
이 정결한 왈츠로 손내밀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주홍이었다. 어디선가 펄럭이며 먼지들이 몰려온다. 그 바람에 나의 머리
칼이 위로 흐트러진다. 음악은 어느새 장엄한 신디사이저의 베이스 음으로 바뀌어지고 있
었다. 어디선가 너무도 익숙하게 들은 끊이지 않는 전자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음악을 따라 내가 천천히 주변을 살핀다. 음악은 분명히 부숴진 버스 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이 음악은 은주가 <불의 전차>와 함께 최고의 영화 음악으로 꼽던 리
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런너>의 테마 음이 분명했다. 시 마이너의 독특한 16 비트음이 끝
없이 연결되는 무거운 선율 때문에 쉽게 잊혀지지 않던 반젤리스의 음악이 분명했다.
내가 버스 속을 바라봤을 때 버스의 핸들이 끼이익 돌아가고 있었다. 버스는 내가 올라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마침내 버스 속으로 들어간다.
내 발 아래로 뭔가 물커덩하고 밟힌다. 여전히 체온이 식지 않은 고양이들의 육질이었다
. 마침내 내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운전석에 앉는다. 그리고 천천히 핸들을 잡는다.
그리고 시동을 걸기 위해 키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소름 끼치는 목소
리로 말한다.
[당신은 결국 절 찾아올 거예요 .]
난 이 지독한 공포를 탈출하기 위해 후다닥 담요를 벗어제치고 옆좌석을 바라봤다. 그때
내 입으로부터 아악!!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의 옆 좌석에는 이미 고양이의 형체로 변한
은주가 혀를 날름대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불이 켜지고 급히 스튜디어스가 달려왔다. 잠을 자던 몇몇 사람들이 깨어나서는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인가보군 어쩌고 하며 다시 잠을 청한다. 여전히 반젤리스의 섬뜩한 음
악이 흐르는 헤드폰을 온통 땀에 젖은 내 머리로부터 걷어내며 여승무원이 물을 가져오라
고 신호를 보낸다.
물을 따라주며 악몽을 꾸셨나보군요 라고 달래는 승무원의 얼굴을 미친듯한 눈으로 바라봤
다. 다시 승무원이 돌아가고 난 너무도 오싹한 기운에 주위를 돌아봤다. 불현듯 코넬 대
학교로 가던 차 안에서 랜돌프가 한 말이 생각났다.
[성은주씨는 순간 공간 전이 이동을 합니다.]
그렇다. 내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동안 어쩌면 은주는 고의로 그 메디컬 센터에 볼모
로 잡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분명 저 뒷쪽 화장실 쪽으로 번쩍이는 눈빛이 보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장실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리는 사정없이 후들거리고 가끔씩 승객들
의 코고는 소리들이 비행기 안을 가득히 채우곤 했다.
저쪽의 여승무원이 나를 보더니 다시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승무원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비행기 안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좁은 승객 복도를 통과해서 뒷쪽의 화
장실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 열린 화장실 문으로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내가 떨리는 손을 화장실 문을 향해 천천히 가져갈 떄였다. 갑자기 화장실 문이 와락
열리면서 한 중년의 남자가 바지춤을 훔치며 나왔다.
화들짝 놀라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비틀거리며 저만치 사라져 가고 난 지
친 어깨를 벽에 기대었다.
아마도 난 미쳐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쁜 숨을 내쉬는 나위 뒤로 휘미한 목소리가 새
어 나왔다.
[돌아보지 말아요 . 집에서 기다리겠어요 . 건석씨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환희를
준비한 채 . 기억하세요 . 이제부터 시작이예요 .]
난 점점 그 자리에 선 채 얼어붙고 있었다. 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봤다.
그러나 여전히 은주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김포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뉴욕과의 시간 차로 여전히 해가 떨어지지 않은 저녁 무렵이었
다.
난 미친듯이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마구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렇게 신호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울렸을 때 누군가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
상대방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은주야?!! 은주?!!]
철컥하고 수화기를 내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난 수화기를 던져 놓고 공항을 빠져 나
갔다. 그리고 이미 누군가가 올라 타려는 택시를 잽싸게 파고 들었다.
[아저씨, 빨리 빨리 안산으로 .]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택시 기사는 마침내 악셀레타를 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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