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혼동

조회수 14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8.19
고양이 여인숙

10화. 혼동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제발 가만히 좀 있어요 .]
은주는 힘이 드는 듯 온 몸이 땀으로 뒤덮혀가고 있었다. 그 순간 참으로 신비로운 현상
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손목의 벌어진 살점에서 노란 빛들이 숙주처럼 번져나오면서 파
괴된 조직들이 차츰 하나로 접목이 되는 게 아닌가?
그녀는 계속해서 경련을 일으키며 정신을 집중시키는 듯했다. 은주의 입술이 떨려오고 하
얀 브라우스는 이내 땀으로 흠뻑 젖어가면서 하얀 속살이 감미롭게 비쳐나왔다. 잠시 후
그녀의 경련이 끝이 나고 나의 온몸에는 생기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뒤로 털썩
나가떨어지더니 풀섶에 누워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난 그녀에게로 마구 다가갔다.
[넌 악마야! 날 살려내고 착한 척을 해도 넌 악마야!!]
은주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저쪽 구석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져니에게로 다
가갔다. 혀를 길게 빼내고 가쁜 숨을 내쉬며 죽어가던 져니가 은주가 다가가 손을 내어
밀자 으르릉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져니의 상처로 손을 가져
갔다.
져니는 잠시 조용해졌다.
져니의 상처에서 나오던 피가 멎으면서 상처에서 예의 그 노란 빛들이 상처를 녹이면서
보글보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난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애원을 했다.
[그래, 니가 착한 악마라는 건 인정을 할께!! 그러니 제발 은주를 돌려줘!! 부탁이야!
! 은주를 돌려줘!!]
그때 그녀가 갑자기 눈을 뜨며 날 천천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서 슬픈 우수가 가득히
전해져왔다.
[믿어줘요. 전 은주예요.]
[이봐, 은주는 불쌍한 여자야!! 그녀를 이렇게 내게서 빼앗아가면 안돼!! 은주는 은주
는 .]
은주가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는다.
[내 인생의 전부야 .]
여기까지 말하던 난 그만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그런지 눈물이 아픔처럼
밀려왔다. 그렇게 어이없이 떠나보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고 선풍
기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두고 그 방을 나온 내가 이토록 저주스럽고
한심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내 머리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가락 몇 개가 있었다. 그래,
은주다. 난 얼른 고개를 들었다.
[왜 차를 타지 않았나요? 이렇게 모든 것을 저주하고 절망할 바에야 건석씬 그 버스를
타고 갔었어야죠.]
은주가 금새라도 쓰러질 듯한 푸석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난 은주를 두고 갈 순 없었어!!]
[그런 은주가 당신 앞에 있잖아요 .]
은주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로 내 손을 가져갔다.
[만져봐요. 건석씨가 사랑하는 은주예요. 전 여전히 당신 곁에 있어요.]
난 무슨 끔찍한 것을 만진 듯이 얼른 손을 뺐다. 그리고 은주를 노려봤다.
[니가 아무리 인간이 되려고 해도 인간의 사랑만큼은 이해하지도 소유하지도 못할 거야
!! 이 살인자!! 이 거짓말장이!! 이 지옥불에 떨어질 악마야!! 널 죽이고 말 거야!! 널
반드시 죽이고 말 거야!!]
나의 광적인 흥분과 분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은주의 왼쪽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똑하고
타내렸다. 어느새 생생해진 져니가 저쪽 나무 아래로 설렁설렁 기어가서는 바닥에 배를
깔고 누어서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가요?]
은주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몇 걸음을 떼던 은주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잠시
후 은주가 힘없이 픽하고 꼬꾸러지는 것이 보였다.

밤새 은주는 헛소리를 했다. 땀에 젖은 온몸은 갑자기 오한으로 떨기도 했고 온갖 종류
의 추억을 헛소리로 토해놓기도 했다.
[ 비행기표는 어떡하죠 ? 건석씨 건석씨 날 날 버리지 않는다고 약속해줘요 .]
모든 것이 혼동 그 자체였다. 지금 내 곁의 은주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악마인가?
아니면 여전히 천사같은 향기로움으로 내 가슴 깊숙이에서 시를 쓰게하고 노래를 하게
하는 내 하나뿐인 사랑인가?
저 멀리 새벽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태양은 여전히 동일하게 이 저주받은 지옥 위에도 비
추기 위해 그 한귀퉁이를 보이고 있었다.
오전의 태양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난 은주를 나무 아래 그늘진 곳으로 옮겼다. 은주는
여전히 식은 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물 , 물 .]
은주가 물을 찾았다. 져니 가자라는 신호와 함께 져니가 잽싸게 나를 따랐다. 어젯밤 밥
을 먹던 그 식당으로 들어갔다. 물이 있는 냉장고를 봐두었기 때문이다. 냉장고 속에서
플라스틱 콜라 병 속에 든 차가운 얼음물을 꺼냈다. 내가 먼저 물을 마시고 져니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다른 한 병을 들고 식당을 나와서 은주 쪽으로 뛰어가려다가 문
득 여인숙이 생각났다.
여인숙의 입구에서 잠시 안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적막만이 감돌뿐이었다. 어젯밤의 그
여행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여인숙 안은 간밤에 있었던 대학살의 피냄새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듯했다.
내가 얼른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여인숙의 방 하나에 곤색 등산용 가방 하나가 눈에 띄
였다. 난 얼른 신발을 신은 채로 그 방으로 뛰어들어가서 가방을 집어들었다. 분명히 필
요한 것이 있을 것 같았다. 난 가방을 들고 은주가 있는 곳으로 마구 뛰었다.
은주에게 물을 먹이고 플라스틱 얼음병을 얼음주머니로 이용해서 은주의 열기를 닦아냈다
. 한참을 그렇게 하자 은주는 겨우 평온히 잠들기 시작했다. 난 잠시 숨을 돌리고 가져온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져니가 다가와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우선 참치 통조림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난
원터치의 통조림 두껑을 따서는 져니에게 주었다. 게눈 감추듯이 금새 깡통을 비운 져니
가 다시 입맛을 쩝쩝 다시기에 하나를 더 따주고는 급히 가방을 뒤져나갔다.
소위 맥가이버 칼이라는 다용도 칼집이 나왔고 다섯개들이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1회용
부탄가스통이 들어있었다. 껌이 몇 통 들어있었고 스포츠 신문이 눈에 띄였다. 난 껌을
하나 빼내어 씹으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이 고립된 땅에서의 신문은 야릇한 흥분같은
것을 안겨주곤했다.
1면에서 2면까지가 온통 조규제란 신성투수에 대해 기록하고 있었다. 레이더스 조규제 통
산 4게임 연승, 대선배 선동렬을 울리다란 낯선 헤드 카피 앞에서 난 당황할 수 밖에 없
었다. 레이더스에 조규제라니? 그저께 서울을 떠나오기 전만 해도 벌써부터 올해 신인왕
에 유력하다는 조규제란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비틀거리는 레이더스에 4게임 연속
승리를 안겨줄 정도라면 나 모르는 사이에 프로야구 시합이 하루에 대여섯 게임이나 치루
어졌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LG 무서운 태풍의 눈 어쩌고 하는 헤드
카피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울 토박이인 나를 깨어나게 하던 MBC는 어디로 사라지고
어디서 나타난 LG가 펄펄 날뛰고 있는가?
난 마구 신문을 펼쳤다.
90년 로마 월드컵의 영웅 통일 독일 감독 베켄바우어 본 스포츠지와 단독 인터뷰!!
뭐라구? 내년에 있을 월드컵 기다리는 재미로 살아온 내게 독일이 이미 우승을 해버렸다
구?!! 너무도 정신이 없어 급히 상단의 발행 날짜를 보았다. 그때 더 큰 전율이 내 뒷
통수를 때리고 있었다. 90년 8월 10일 이라는 숫자가 또렷이 박혀 있었다. 손이 벌벌 떨
려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엇그제 서울을 떠나던 날이 89년 8월 8일이
아니었던가? 스포츠지의 서울 판이 하루 먼저 발행된다는 것을 고려하고 계산해보면 어
제가 이미 내가 서울을 떠난 지 2년이 흐르고 이틀이 지났단 말이 아닌가? 그럼 오늘은?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 달아나고 난 털썩 바닥에 드러누웠다. 세상이, 아니 온 우주가
하늘 위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설사 일어날 수가 있다손 치더라도 하필이
면 왜 나여야 하는가? 내가 대체 살아오면서 무슨 악한 일을 그렇게 많이 했다고 이다지
도 혹독한 징벌을 내리는가? 아니야 이건 여전히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드러 누운
채 뒷통수를 땅에다가 몇 번이고 박았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건 현실이었다.
그때 저 쪽에서 통조림 두껑을 핥고 있던 져니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끙끙거리
며 내 옷소매를 잡고 일어나라고 했다.
[제발 난 지금 그럴 기분이 아냐 .]
그러나 져니는 계속해서 내게 일어날 것을 강요했다. 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서 져니의
뒤를 따라갔다. 져니는 조금 빠른 걸음걸이로 날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내가 뒤쳐
지면 자신이 잠시 멈추어 서서 날 휙 뒤돌아보곤 사이가 좁혀질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냇
물이 졸졸 흐르는 냇가를 지나서 져니는 약간 높은 언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져니가 날 최종 데려간 곳은 일본산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 펼쳐진 아담한 언덕배기의
잔디밭이었다.
그 언덕을 숨가쁘게 오른 져니가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마구 짖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그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족제비 한 마리가 약간 움푹한 흙무더기를 파헤치다 져니에
게 혼줄이 나서 달아나고 있었다.
져니가 날 보고 컹컹 짖으며 다가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난 아주 의아한 눈으로 져니가
가리킨 곳으로 다가갔다. 그 흙무더기 안에서는 악취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져니가 그
구덩이를 앞 발로 파헤칠수록 악취는 더 심하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얼마 파질 않아 구
덩이 속에선 허벅지 아래로 잘린 사람의 장단지 부분이 끔찍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완전히 부패되어 뼈만 앙상히 남아 있었지만 등산용 신발과 두터운 양말로 미루어
보아 아, 져니의 주인이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져니를 바라보았다.
[우우우우 .]
져니가 하늘을 바라보며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져니는 토막난 주인의 시체 한 토막을 물
고 와서 여기에 장사를 지낸 게 틀림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슬픔에 져니
의 목을 가만히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그의 귀에 대고 나즈막히 속삭였다.
[져니야, 무덤은 이렇게 다시 파헤쳐선 안돼는 거야. 너의 그 슬픔과 복수심은 알지만 내
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구나.]
난 다시 그 무덤을 덮기 위해서 흙들을 끌어모았다. 내 곁에서 져니가 컹컹거리며 짖어
댔다. 그리고 져니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흙 속으로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것은
얼마 파지 않아 금새 알 수가 있었다. 져니의 주인이 사용하던 등산용 가방이었다. 져
니는 내가 여인숙에서 등산용 가방을 들고 나와서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읽자 문
득 자신의 주인과 함께 묻었던 이 가방이 생각난 게 틀림이 없었다.
난 무덤을 흙으로 덮고 주위에서 단단한 돌들을 가져와서 무덤을 치장했다. 돌아서는 길
에 져니는 몇 번이고 주인의 무덤을 바라보며 반드시 복수를 하겠노라고 주인에게 약속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돌아왔을 땐 이미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은주는 많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성급히 져니의 주인이 남겨두고간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엔 대부분 어려운 논문집들과
물리학에 관계된 책들만이 수북하게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발견한 두터운 일기
장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지금 이 순간도 내게 주어진 시간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아나고 있다. 부디 이 일기 속에
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길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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