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희생자들

조회수 13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8.19
고양이 여인숙

8화. 희생자들


그해 사월이었던가? 벚꽃이 화창하게 핀, 은근히 내게도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
봄의 중턱에서 난 은주를 만났다.
87년 1월, 군복무를 마치고 신촌의 골목 안에서 난 조그마한 책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은주는 항상 서서 책을 훔쳐보곤 했다. 그녀는 그날 다 보지 못한 책에는 샤프로 연한
표시를 해놓곤 했는데 어느 날 내게 들킨 그녀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호된 꾸중을
듣고는 얼굴을 가리고 저만치 뛰어가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자꾸만 그 가난한 여대생이 생각이 났다. 난 참 바보같은 행동
을 했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여자가 나타나면 주려고 그녀가 읽다 만 책까지 준비해 놓고
지나가는 여자들이란 여자는 다 쳐다보며 결국 오월을 넘기고 있을 즈음이었다.
유월의 신록이 세상을 다 덮던 어느 날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입에 스카
치 테잎을 물고 월간지 포스터를 쇼 윈도우에 붙이려고 바둥거리고 있을 때 연한 물빛 원
피스를 곱게 입은 그녀가 쇼 윈도우 안으로 전시된 책들을 들여다보며 서성이고 있었다.
난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고 그녀는 화들짝 놀라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이번엔 놓치
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마구 달려갔다.
그렇다, 그렇게 은주는 내게 다가왔다.
사랑이 어떻게 내게로 왔는가 라는 싯구를 인용하지 않아도 은주는 아카시아 향처럼 신비
롭고 은은하게 내게 다가왔다. 사랑은 영원히 나를 비켜갈 뿐, 내 손엔 잡히지 않는, 영
원히 나와는 무관한 산 위에서 부는 낮 간지러운 시원한 바람인줄만 알고있던 내게 그
녀가 따스한 미풍으로 다가온 것이다.
저만치 어둠 속에서 서있던 은주가 슬픈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 해 유월 나의 책 방 앞에
서 은주를 겨우 따라가 붙들었을 때도 지금처럼 저런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란
입술로 날 바라보던 은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왜 그렇게 가슴 가득히 밀려오는 슬픔과 마침
내 내 고독의 무게를 샴푸의 거품을 걷어내듯이 마감시켜줄 사랑을 찾았다는 만감의 희열
을 교차시켰을까?
내가 거의 다 다가갔을 때 다시 신기루처럼 은주는 마구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 아니 하나 같이 날 따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사이로 그녀
는 마치 줌으로 바짝 당겨져 담겨지는 피사체처럼 어른거리며 그렇게 숨어 들어갔다.
난 미친듯이 은주를 찾아서 서성이었다. 어느새 은주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그토록 절
실하게 자신을 찾는 내 사랑의 다급함을 조소하며 관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이유야 어쨌든 분명히 은주에게 아주 기괴한 일이 벌어진 게 틀림이 없다라고 결론 짖자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정말 은주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이 지옥을 불사지를 때
까지 복수를 하리라고 다짐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때 예의 그 여인숙으로 여섯 명의 여행자들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그들에
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중년의 남녀들이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봤
다.
[왜 이래, 이사람 .]
[들어가지 마세요 , 저 여인숙 .]
그들이 날 마치 미친 놈 쳐다보듯 했다. 동시에 마을 사람들 역시도 일제히 날 노려봤다
.
[대체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예요?]
짙은 루즈를 칠한 여자가 껌을 찍찍 씹으며 날 올려다봤다.
[저 저 저 여인숙은 .]
뭐라고 설명을 해야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몰랐다. 불쑥 튀어나
온다는 말은 내가 생각해도 엉뚱한 단어들이었다.
[고양이 여인숙입니다!!]
순간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별 싱거운 놈 다 본다는 식으로 날 툭 치며
여인숙 안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한 여자는 젊은 사람이 참 안됐다라는 동정도 보내며
그들은 지옥 속으로 가뿐히 사라져 들어갔다.
그들이 여인숙으로 들어가자 마자 난 순식간에 날 노려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꼼작
없이 갖히고 말았다. 등줄기에 이만 볼트의 전류가 사정없이 타고 흘렀다. 내 발 밑으로
다이너마이터가 설치된 듯이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특히 그 상어
잡이 사내의 시선은 가히 가공하리만큼, 아예 날 삼킬듯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성황당 아래까지 왔는지 털썩 성황당 나무에 기대고 앉아 가쁜 호흡을 추스리기에
바빴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것들이 꿈이든 아니면 지독한 악몽이든 어쨌든 난 세상
과 격리된 부비 트랩에 갇힌 게 분명했다.
그럼 빠져나갈 수있는 방법은? 모든 트랩은 빠져 나갈 수 있는 비상구라는 게 있다. 심지
어는 뫼비우스의 띠조차도 한 차원과 그 이변의 차원이 교차되는 그 분기점이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대체 어디가 그 분기점이란 말인가? 분명히 조금 전의 그 버스가 내가 살던 세
상이라는 차원과 모든 것이 역행하는 이 지옥이라는 차원의 교차로를 오가는 열쇠가 분명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저쪽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 그
물체를 향해 촛점을 맞추었다. 다가오는 물체는 예의 그 검은 독일산 세퍼트였다. 내게
로 다가온 그 검은 친구는 반가운 듯이 꼬리를 흔들며 내 가슴에 코를 박고는 킁킁 냄새
를 맡곤 했다. 그가 쩝쩝거리며 내 뺨을 핥을 때 그의 목에서 뭔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 목걸이였다. 금색의 연결줄 끝에는 하트 모양의 사진첩이 달려있었다. 그 사진첩의 뒷
쪽에는 뭔가 새겨놓은 글씨가 보였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그 글씨를 비추어보
았다. 영어로 씌여진 개의 이름인 듯했다.
[져 니, 져니? 니 이름이구나.]
[컹컹!!]
짧게 두 번 짖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번에는 목걸이의 뚜껑을 열고 안을 비추
어 보았다. 사진첩 안에는 등산모를 쓴 꽤 나이가 든 남자가 져니를 껴안고 웃고 있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남자는 퍽 자상하고도 부드럽게 보였고 한때의 행복했던 이들의 모
습에 가슴이 찡해왔다.
[이분이 너의 주인이니?]
[우우웅 .]
한순간 져니가 허공을 바라보며 슬프게 울었다. 난 어떻게든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난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난 건석이라고 해.]
내가 손을 내어밀자 져니도 자신의 앞발을 내어밀어 내 손 위에다 얹는다. 이 적막한 세
계에서 만난 우리는 너무도 반가운 동지인냥 굳세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때였다. 져니가 위를 바라보며 크르릉거렸다. 우리 위의 확성기에서 잡음이 흘러나왔
다. 치지직거리던 잡음들이 어느새 몇 개의 또렷한 분절음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난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민 여러분 치지직 어젯밤의 분열된 . 특히 실망스럽 . 저 . 동생의 . 재판에 .
회부 오늘 밤 모두 단결된 행동을 3번 선박의 위생문제 새로운 소독 ]
여기까지 듣자 더 듣지 않아도 대충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이들은 오늘 밤도 그
여인숙에서 잔혹한 살상을 벌릴 것이라는 신호임에 분명했다. 그래, 좀 높은 곳에 가서
그 여인숙을 관찰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 위를 바라보았다. 바짝 마른 나무 위
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는 군데군데 흠이 나있었기 때문에 쉽게 오를 수가 있었다
.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을 선택하고는 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될 수 있는 한 편안
한 자세로 앉았다. 확성기가 저 아래에 보이고 져니는 여전히 나무 곁 바닥에 바짝 배를
댄 채 쭈그리고 앉아 나와 동일하게 저 길끝의 마을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끔씩 시원한 바람이 내 머리칼을 쭈뼛이 쓸어올리며 어둠 속으로 날아가곤 했다. 두
시간이 지나자 졸음이 퍼붇기 시작했다. 가끔씩 주사바늘처럼 촉수를 꽂는 모기들 때문
에 졸음이 달아나긴 해도 잠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날 공격해왔다.
여기서 졸다가 떨어지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고 거듭 다짐하면서 졸음을 쫒고 있을 때
였다. 문득 어느 순간 져니의 크르릉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여인숙 쪽을 바라봤을 때 아, 그곳엔 내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
었다.
마을의 여기 저기에서 주홍빛보다 더 붉은 불덩이들이,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고양이 형체
의 불덩어리들이 쒹쒹 바람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쏟아오르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고
양이 형체의 불덩어리들은 마구 예의 그 여인숙 안으로 일제히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그
것은 마치 거대한 불꽃놀이와도 같은 어떻게 보면 가슴이 저리리만큼 현란한 축포들의
집합체와도 같았다. 아니, 아예 그 여인숙 전체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져니도 나와 마찬 가지로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서 빙
빙 원을 그리며 짖어대더니 마침내 그 불꽃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져니!! 져니!!]
져니를 불렀지만 이미 져니는 저만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구나. 어제 새벽
의 그 아스라한 위험 속에서 날 구한 것도 져니였구나. 대체 저 개는 어떻게 이 고독한
살육의 벌판 위에서 혼자 남아 저토록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금 저 여인숙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살육의 잔혹들을 상상하자
니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람 소리와 함께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한기가 엄습해왔다. 어디선
가 이미 경험했던 익숙한 공포라고 느끼는 순간 어제 새벽의 살육의 전조가 꼭 이러했다는
육감이 날 스쳐 지나갔다. 머리 끝이 쭈볏이 서는 살기에 온 긴장을 곤두 세우고 있을
때였다.
뚝 뚝 차가운 무엇인가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돋는가? 그러나 그
차가운 느낌은 내 팔뚝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문득 팔뚝에 묻은 액체를 쓰윽 닦아낼 때
그것은 아직도 온기가 식지 않은 피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위를 올려다
보았다. 거의 순식간에 후드득거리며 설탕물 같은 진득한 피 몇 덩이들이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피의 판막 사이로 내가 본 것은 나무가지를 아슬하게
지탱한 채 덩그러니 달려있는 거대한 인육 덩어리였다. 끈적거리며 타고 내리는 내 얼굴
위의 피 사이로 얼핏 본 것은 심하게 뜯겨져 나간 살점의 덩어리 였다.
너덜한 내용물을 연꼬리처럼 휘날리며 계속 분비물을 뱉어내는 살점사이로 삐죽 삐죽 튀
어나온 갈비뼈 몇 대가 더 참극의 잔재로 남아있었다. 동시에 그 거대한 덩어리는 연약
한 나무가지들을 투드득 부러뜨리며 내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빨리 피해야 한다는 본능
적인 반사신경에 하마터면 밑으로 떨어질 뻔한 것을 겨우 균형을 잡았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가 마구 쏟아져 내려왔다. 절단된 고기 덩어리는 다행히 내 머리 위
몇 센티 위에서 가지에 걸려 멈추었고 그 위 쪽으로 어젯밤의 괴물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바람에 뻣뻣한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두운 가지 위에 솜털처럼
가볍게 앉아선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난 빨리 도망을 가야했다. 미친듯이 허둥지둥 나무를 내려왔다. 아니, 아예 굴러 떨어지
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이리라.
나무가지들에 의해 긁혀져 나가는 살갗의 따가움을 느끼며 겨우 바닥에 쿵하고 닿았다. 비
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다시금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내 앞
에 우두커니 선 괴물이 내 목을 콱하고 잡았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손목의 힘으로 내목을
잡은 괴물이 뒤의 나무에다가 날 힘껏 쳐박았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놈이 날 바라보더니 아직도 창자들이 끼어있는 이빨 사이
로 혀를 날름거리며 냄새를 풍겨댔다. 그보다 더 소름끼치는 것은 그놈의 입으로부터 예
의 확성기에서 들리던 노인의 목소리가 재빨리 쏟아져 나왔다.
[바보같은 놈아!! 넌 그때 떠났어야 했어!! 그 기집애 때문에 버스를 탈 기회를 줬잖아!
! 지겨운 놈, 어떻게 죽여줄까?!! 몇 토막을 내어줄까?!!]
놈이 번쩍이는 갈고리 같은 손톱을 털 사이로 일으켜 세웠다. 날카롭고 잘 길들어진 그
흉기가 천천히 내 머리통 위로 쳐들려 올라 갔다. 난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래, 어쩌
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없이 치루어지는 살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가능하면 놈이 빨
리 끝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주위가 한동안 조용했다. 난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군가가 놈이 쳐든 팔을 잡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사라졌던 은주였다.
괴물이 잡아먹을 듯이 은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은주 역시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 무거
운 표정의 은주를 바라보며 아니 혹시나 했던 모든 상상의 가능성을 그대로 재현시키며
내앞에 서있는 은주 , 내 은주.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왜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폭풍처럼 밀려왔을까?
괴물과 은주의 침묵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의 침묵 사이에 놓여진 나. 그리고 하늘
에 총총히 뜬 별들의 무리 사이로 언젠가 혀끝으로 밀려 들어오던 은주의 눈물 한 방울 닮
은 똑하고 떨어지는 유성의 그림자.
속절없는 새벽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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