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조회수 8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9.03
고양이 여인숙

25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93년 봄.
오늘 마침내 옥수수 씨를 무너져가는 담장을 따라서 뿌렸다. 아직은 스산한 바람이 대지
곳곳에 베여 있지만 오히려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가끔씩은 추스려 주는 것 같아서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다행히 담쟁이의 앙상한 혈관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집을 구할 수
가 있었다. 석 달 전 은주가 미국 코넬 대에서 돌아오는 그 다음 날부터 이사를 실행에
옮겼다. S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마침 갓 결혼한 자신의 조감독에게 아파트를 헐값에
넘기고 나의 새로운 집은 나의 간절한 요청에 못이겨 남양주군의 한적한 시골에 얻어주었
다.
은주가 특별히 부탁한 넓은 창고가 달려 있는 허물어져 가는 집이었지만 난 수시로 집을
조금씩 수리해나갔다. 은주가 거할 창고는 될 수 있는 한 밝은 색의 벽지를 발랐다. 그
리고 창가에 침대를 놓고 은주의 부탁을 따라서 창문은 밖에서 못질을 하고 어두운 브라
인드를 쳤다. 대문에 하얀 페인트 칠을 하고 마당의 포플러 나무 아래에는 작은 간이
의자도 놓았다. 그리고 동대문에서 사온 메추리들을 방목하기 위해서 나무 곳곳에 메추
리 집을 매달아 놓았다. 마당엔 가능하면 많은 밭을 만들어 나갔다. 가장 작은 방에는
노트 북과 오디오 시설을 갖추고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았다. 언제부턴가 잃어버렸던 글
을 쓴다는 행위를 문득 다시 시작하게 된 것도 남양주로 이사온 다음부터였다. 그러나 막
상 책상 앞에 앉으면 당장 무슨 자판을 눌러야 할지 막막하여 그냥 전원을 꺼버리는 경
우가 허다했다. 나의 의지는 은주가 떠나기 전에 꽤 괜찮은 사랑의 글을 창조해서 그녀를
감동시키고 싶었으나 웃기는 짓이란 상상이 자꾸만 들어갔다.
S가 이사 선물로 빨간 다마스 벤을 선물했다. 3년 전 나의 르망을 음주운전으로 쳐박고
난 후부터 항상 양심에 꺼려 있었다면서 선물한 것인데 그마저도 사실은 자신의 프로덕
션에서 소품으로 찬조받은 것을 헐값에 인수받았다고 한다.
난 가끔씩 그 다마스 벤을 타고 춘천까지 휑하니 달려 갔다오곤 했다. 봄을 맞이하는 춘
천의 밤은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이제 꽃망울을 터뜨릴 벛꽃 생각을 하자면 그렇게
가슴이 떨릴 수가 없었다. 빛바랜 억새풀들이 밀림처럼 우거진 호숫가에서 한 쌍의 연
인이 밤낚시를 한다. 커피 한 잔의 향기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빛을 넋이 나간 표
정으로 훔쳐보다간 깨어나곤 한다. 미친듯이 차를 몰아서 집으로 달려온다. 얼굴엔 만연
의 웃음을 머금고 그렇게 집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창고로 다가간다.
[은주, 은주!! 내가 왔어!! 나야!! 건석이야!! 제발 이 문 좀 열어!!]
그러나 창고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언제나 같은 말들이었다.
[저리 꺼져요!! ]
[은주 은주 어떤 모습이라도 난 괜찮아!! 난 니 남편이야 . 제발 이 문 열어!!]
어김없이 이 대목에서 은주의 발작이 시작된다. 병이 깨어지고 저녁에 넣어주었던 밥
그릇들이 박살난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의 각혈을 수반하는 신음소리다 .
[가요 . 저리 가요 . 제발 , 제발 .]
그날 밤 김포공항에서 침대차에 실려 내리던 은주의 모습은 마치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그 와중에서도 내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물빛 원피스의 단추를 꼭 끼게 잠근 그녀의 잘
룩한 허리를 보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 사랑하는 은주 .
마침내 완연한 초여름이었다. 벚꽃이 절정에 달하는 주간에는 한 발자국도 바깥으로 나가
지 않았다. 나도 그녀와 꼭 같이 죽어가고 싶었다 . 아주 느린 왈츠처럼 그렇게 죽어갔
으면 .

93년 여름.
이곳에 온 수확이라면 개구리 소리를 지천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
니를 따라서 불공드리러 갔던 산사에서 들었던 개구리 소리들이 얼마나 아름다왔던지 .
어머니가 그리웠다. 전화를 걸었다.
[니 아버지도 이젠 화가 풀렸나 보더라 . 내주 쯤엔 새 애기 데리고 한번 오너라 . 부
자 간에 인연을 아예 끊을 작정이냐? 니 아버지 성미가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두고보자
니 니가 한술 더 뜨는구나 . 그래, 새 애기 몸은 좀 어떠냐? 수술은 잘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만은 . 나도 몸이 예전같지가 않다 . 병원에 가니 다리 아픈 건 허리에서 다리로
통하는 혈관이 막혔다는구나 . 수술하면 된다는데 . 이 나이에 수술하자니 그렇고 .]
난 언제나처럼 예, 예만을 되풀이했지만 오늘만큼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겨우 겨
우 참아내고 있었다. 여전히 글은 써지 못하고 있었다. 내게 있었던 지난 4년 간의 악몽
들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글이란 내 머리 밖으로 튀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은주 이제부터 더워지는데 에어콘을 설치할께 . 그래도 되겠지 ?]
그녀가 아무 말이 없다. 그런 아침이면 난 마침내 은주가 죽었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자리
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은주 은주 안에 있는 거야 ?]
다리가 떨리고 내 애간장이 다 녹는다. 그제서야 은주가 마지막 호흡을 내뱉듯이 모기 같
은 목소리로 말한다.
[필 요 없어요 . 대신 건석씨 부탁이 있어요 .]
[뭐야. 말해봐!!]
오, 하나님 . 그녀의 생명을 하루 더 연장해주셨군요 .
[저 개를 사주세요 .]
처음엔 난 무슨 말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개라니 ?]
[세 마리로요 . 반드시 족보가 있는 사냥개로요 . 마스티피와 그레이 하운드 . 그리고
아이리쉬 세타, 이렇게 세 마리로 구해주세요 . 그럴 수 있죠 ?]
난 얼떨결에 구해볼께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은주가 나열한 개의 이름조차도 채 기억에
나질 않고 왜 마지막 순간에 은주가 개를 구하는 것인지 그것만이 궁금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서도 은주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 뿐이
었다. 그러나 난 개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했고 다시 한심하고 이기적이게도 급히 S를 찾
아야 했다.
잠에서 언뜻 깨어나야 했다.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밤새 우는 소리가 고즈넉히
들려왔다. 나의 이마로 막 손을 가져오던 S가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난다.
[왠 땀을 이렇게 흘리는 거야?]
S가 아주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으응 . 너 왔구나 . 웬일이야? 이렇게 밤늦게 .]
[마당으로 나가봐 .]
아, 난 한순간 내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마당의 빨간 다마스 밴 안에는 광추면 밖으로 떠
나보낸 져니를 꼭 빼닮은 독일산 사냥개 한 마리와 영국산 양털을 가진 아이리쉬종 한 마
리와 엄청난 지구력을 자랑한다는 정통 미국산 세퍼드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으르릉거리
고 있었다.
[휴, 뒤늦게 보신탕집 차릴 일 있냐? 웬 강아지 타령이냐 자, 여기 족보 증명서 . 그
거만 있으면 새끼들 교배 붙여서 수입 짭짭하게 올릴 수 있겠더라 .]
[어떻게 구했어 ?]
난 S의 정성에 스스로 탄복하며 족보첩을 훑어보다가 이내 S를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 S는 나의 눈빛을 읽고는 어린아이처럼 어깨에 잔뜩 힘을 준다.
[요즘 세상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냐 . 개새끼들, 열나게 많이 받아 쳐먹더라 .
영화 때려치우고 충무로에서 개장사하는 선배에게 부탁했는데 좌우간 아는 놈이 더 무섭
다니깐 . 야, 누가 믿겠냐? 개새끼 한 마리에 에어콘 한 대 값이라면 . 나도 영화 때려
치우고 이 장사나 해볼까?]
S가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며 자는 동안 난 마루에 나와 앉아 시종일관 창고 쪽을 향해
서 코를 일으켜 세우며 크르릉거리는 세 마리의 개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은주는
대체 저 세 마리의 개를 무엇에다 쓰려는 것일까. 왠지 두려운 생각이 물밀 듯이 몰려왔
다.
창고 쪽에서도 심상찮은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은주가 분명히 창고의 문틈을 통해 마당
의 개들을 노려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놀라운 비극을 .

마루의 기둥에 기대어 잠든 나를 깨운 건 S였다. 아침 일찍 촬영이 있어서 가야한다는 S
를 다마스 벤에 태우고 정류장까지 가는 새벽은 풋풋한 여름의 냄새가 온몸을 파고 들었
다. 여전히 졸음이 가득한 눈을 한 S가 입을 연다.
[석아, 우리 참 비극 투성이의 세상에 산다 , 그지?]
난 아무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
[넌 알고 있을 거야 . 개가 필요한 곳을 .]
나의 예상 밖의 질문에 S가 나를 바라본다.
[스무 고개야. 빨리 맞춰봐.]
S가 날 어이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하품을 하며 답을 한다.
[세 마리 다 사냥개니까 사냥을 하려는 거겠지 .]
[어떤 사냥?]
[세 마리 다 속도감이 엄청 뛰어난 종류니까 빠른 짐승들 .]
[빠른 짐승엔 무엇이 있을까?]
[허다하지 .]
[주인이 총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의 사냥감은?]
[음 인간하고 친한 종류겠지 .]
[빠르면서 인간하고 친한 건 뭐가 있을까?]
[동물원을 탈출한 사자, 호랑이, 치이타, 독수리, 살쾡이, 좀 현실적으로 가자면 고양이
도 되겠구 . 또 .]
[그 가운데서 개하고 사이가 안 좋은 동물은?]
[그야, 고양이겠지 하지만 그깐 고양이 잡는데 무슨 저따위 삭막한 개들이 필요하겠냐?
그냥 쥐덫을 깔아 놓지 .]
[그 고양이들이 특수한 고양이라면?]
[예를 들면 ?]
[으음 무지무지 빠르고, 험악하고 극단적으론 사람을 잡아 먹는 고양이라면?]
[우하하 그런 고양이라면 저 개들로도 턱없겠다 .]
[그래도 저 개들이 필요한 경우는?]
[으음 만약에 그 고양이들이 빛으로 이루어졌다면 개들이 아주 제격이지 .]
순간 난 버스를 끼익하고 세웠다. 이미 환하게 밝은 아침의 햇살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
보는 S의 얼굴 전면에 실루엣처럼 피어오른다. 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 있다.
[무슨 말이야? 그 고양이 들이 빛으로 이루어졌을 경우라는 말.]
[글자 그대로야 . 넌 학교 다닐 때 안배웠냐? 코르페니쿠스의 회전이라구 하나? 개들이
형광등을 보고 짖는 것은 빛의 활동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던 선생님 말씀 .]
[그래 기억나 . 개의 눈엔 전류가 한 프레임씩 끊어져서 보인다는 설 .]
[빛을 영화 필름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 눈이 읽어들일 수 있는 빛의 가시적 한계가
초당 24프레임이라면 개의 눈은 초당 48프레임을 읽어낼 수 있다는 논리지 . 그러니 웬간
한 빠른 빛들도 개에게는 느림보가 되는 셈이지 . 근데 그 따위 것들이 대체 사냥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나는 아무 말없이 천천히 다시 악셀레다를 밟는다. 나의 얼굴에서 세상의 모든 아침은 아
주 천천히 어두워진다.

93년 가을.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고도 변기 위에 앉아서 배설을 해야 하는 참혹한 이율배반적 감
정 때문에 더 죽고싶다는 어느 시인의 싯귀처럼 난 익어가는 옥수수를 뚝뚝 분질러내고 있
었다.
그 옥수수를 곱게 삶아서 은주의 재를 뿌렸던 북한강에 하나씩 던져넣고 싶은 가을의 하
루이다. 은주가 마침내 그 긴 병마와의 여정을 마감하고 내 곁을 떠난 뒤 3주가 지났지
만 난 여전히 창고 앞을 왔다 갔다하는 버릇만은 못 버리고 있었다. 아직도 창고 속에서
은주와 카이로와 반젤리스를 훈련시키는 은주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날 잡아봐!! 이 똥개 새끼들아!! 죽어가는 나도 못 잡으면서 그 괴물들을 어떻게 상대하
려고 하는거야!!]
그러면 어김없이 개들이 미쳐서 날뛰는 소리가 창고 안에서 가득히 들린다. 우당탕 . 뭔
가가 사정없이 무너지고 은주의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은주와
함께 세 마리의 개들도 미쳐가고 있었다. 나? 난 이미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
가를 가늠하기를 포기한지 오래 전이 아니었던가.
개의 이름은 은주가 붙인 것이다. 아이리쉬 세타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은주라고 부르고
, 그레이 하운드를 반젤리스의 음산한 대곡 <미스터 카이로의 친구> 제목을 따서 카이로
라 이름하고, 마스티프를 반젤리스라고 붙였다.
난 죽어가고 있었다 .
가을은 더 이상의 만삭의 풍요로움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맞이하
는 가을인지도 몰랐다 . 떨어지는 포플러 나무의 노오란 이파리 하나의 무게에도 난 미칠
것만 같았다 . 그리움 . 이것의 광폭함과 변덕스러움을 달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을까
? 눈만 감으면 은주가 날 부르고 있었다. S는 통속적인 노랫말 몇 구절로 날 위로한다.
세월이 약일 거야 . 하지만 세월이 가져다주는 위로는 오직 분노의 십자성이었다. 어느
날 내 인생을 이토록 절묘하게 시궁창에 쳐박은 그 고양이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입천장
까지 차올라서 거의 숨도 못쉴 것 같은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술병이 가을의 석양을 받으며 온통 나의 마당을 뒹굴고 있다. 나를 위안하고 나를 유혹
하는 저 술병들의 아우성 그 속에서 여전히 은주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
[그래요 . 그 분노를 키우세요 . 그 분노만이 이토록 끈질긴 비극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예요 . 아, 당신의 마음 깊숙이에 있는 그 분노를 키우세요 .]
다시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93년 겨울.
눈이 내린다.
다시 눈이 내린다. 텅빈 이 시골의 마당에 눈이 쌓이고 있다. 세 마리의 개들은 그 큰눈
을 끔벅이며 내 눈치를 살피기에 바쁘다. 내가 끼니를 굶으면 은주란 녀석이 어술렁거리
며 내게 다가와서 옷소매를 문다. 그리고 밥을 달라고 칭얼거린다. 막상 밥을 차려주면
반젤리스와 카이로는 신나게 먹어치우지만 은주는 내가 먼저 먹기 전에는 꼼짝도 않는다
. 은주가 남기고 간 세 마리의 개를 바라보며 난 이상하게도 점점 잔혹해지는 복수의 일
념에 휩싸인다. 저들을 데리고 지금이라도 당장 안면도의 바닷가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
을 간신히 억누른다.
그 겨울 난 역시 한 줄의 글도 쓰질 못한다. 출판사 사장과 함께 날 들여다보러 왔던 S
가 흉가로 변해버린 나의 집을 보고는 안색이 노래진다. 그렇다,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죄이다.

94년 봄.
다시 봄이 왔다.
더 이상 내게 아무 의미없는 봄의 여신이 그 화려한 옷 자락을 휘날리며 내게로 다가온다
. 오늘은 용기를 내어 서울로 입성했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로 악마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인간이 복수
의 감정에 노예가 되면 누구나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저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가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서울로 온 건 내가 운영하던 신촌의 그 책방으로 가보고 싶어서였다. 클랙션 소리
가 요란하다 . 7년 전의 신촌과는 완연히 바뀌어져 있는 거리들의 모습에 아찔한 현기증
만 들뿐이었다. 이미 가벼운 옷으로 갈아 입은 여대생들이 재잘거리며 활보하는 이 거리
에는 내가 건져야할 어떠한 추억의 파편조차 깔려있지 않았다. 어느 뚱뚱한 중년의 여자
가 운영하는 책방 안에는 은주를 닮은 여자가 로보트처럼 우두커니 선 채 책을 읽고 있었
다. 난 떨리는 손을 천천히 쇼윈도우로 가져갔다. 그리고 책방 안을 들여다보며 한없이
옅게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내게 꿈결처럼 찾아온 사랑은 그토록 짧은 한숨만 남
겨둔 채 공기처럼 피안의 세월 너머로 꺼져 버렸다. 쇼 윈도우에 어른거리는 내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려 거친 수염 위로 마구 스며들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다본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즐겁고 세련된 봄의 한낯을 온 몸으로 맞아
들이며 희락하고 있었다. 때로는 들끓는 젊음의 환호성으로, 그러면서 주저없는 함박
웃음으로 생의 신비가 주는 고통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난 무엇인가?
추억 한 조각에 떠밀리어 이곳까지 온 나는 그야말로 잠시 깨어나보니 삼상지탄(參商之
歎)의 파문당한 남루하기 짝이 없는 거지 꼴을 하고 있었다. 재빨리 걷기 시작했다. 여
전히 내게 눈물이란 게 남아있음을 신기해하며 난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빨
리 걸으면 걸을 수록 은주가 저만치에서 나비처럼 날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꽃망울을 터뜨리는 벚꽃 나무 아래를 은주가 그 파란 입술을 다물며 아주 느린 모습
으로 날 돌아다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난 가로수를 붙잡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내게 이토록 가혹한 운명을 허락한 신
과 소리쳐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내 고통의 무게가 저주스러워서 그렇게 엉엉 소리내어 울
었다. 그렇게 봄은 나를 신촌의 벚꽃 나무 아래에 내버려 둔 채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
고 있었다.

94년 여름.
50년만의 살인 더위의 연속이었다. 세 마리의 개들도 나의 출전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
리다가 지쳐버린 듯이 마당에 배를 깐 채 혀를 길게 빼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폭풍이
든 뭐든 제발 시원한 빗줄기 한번만이라도 보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다.
[건석아, 노올자!!]
언제나처럼 뚱뚱한 몸짓으로 환하게 웃으며 S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세 마리의 개들
이 먼저 S를 알아보고 뛰어가서 안긴다.
[그래, 그래, 니네들도 줄려고 푸짐하게 사왔으니 설치지 마라!!]
삼겹살 굽는 냄새에 놈들이 안절부절 그 자체다. 포플러 나무 아래에 멍석을 깔고 S가 설
치한 자칭 자동 바베큐 기계라는 구식 연탄 화로 위로 재래식 석쇠가 놓이고 고기들이 지
글거리며 탄다.
[자, 사랑하는 친구여. 한 잔 받아라!]
S와 함께 나누는 이 소주맛이야 말로 유일하게 내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나날이었
다. 가끔씩 S가 돌아보지도 않고 던져주는 고기들은 어김없이 개들의 입 속으로 골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S가 비명을 지르며 개에게로 달려간다.
[으악!! 뱉어내!! 빨리!! 새까맣게 탄 것 먹으면 암 걸린단 말야!! 니네들 새끼 낳기만
을 눈빠지게 기다리는데!!]
개의 입 속에서 고기를 꺼내느라 난리를 치루는 그를 보며 난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 . 저토록 착한 친구에게만은 나의 계획을 말해야지 .
[S야 나 .]
개하고 실랑이를 벌이던 S가 나를 돌아본다.
[나 떠날 거야 .]
[떠나다니? 어디로?]
S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내게로 다가온다.
[은주의 유언이야! 이제 실행할 때가 되었어 .]
[야, 대체 무슨 유언인데 이토록 썰렁한 분위기를 창출해내냐? 대체 어디로 간단 말야
?]
내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소주 한잔을 급히 들이킨다.
[악마 사냥!]
S가 날 한동안 바라본다.
[언제 쯤이면 철들래?]
[난 .]
[바보야, 은주씬 정상이 아니었어 . 그런 은주씨 말을 듣고 악마사냥인지 나발인지를 떠
나겠다구? 대체 니 나이가 몇이냐? 우리 할망구가 날 보고 시근 없다지만 넌 정말 도가
한참 지나친다 . 떠난다면 대체 어디로 간다는 거냐?]
내가 S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래, 역시 내가 말하는 게 아니었어 . 못 들은 걸루 해 .]
야, 임마! 어떻게 못 들은 걸루 하냐? 너 요즘 면도도 하구, 보아하
니 .]
S가 작은 방을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다시 글도 끄적이는 것 같은데 조짐이 이상하잖아 .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변
한 다더라 . 앗, 이건 취소!! ]
내가 씽굿 웃는다.
[아쭈? 웃었어 .]
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주가 죽기 전날 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
긴 말은 여전히 지글거리며 타는 고기 내음만큼이나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건석씨 약속해줘요 . 그 세계에 남겨두고 온 또 하나의 은주를 죽여주겠다고 . 믿지 말
아요 . 내가 떠나고 마음 약한 당신이 은주가 그리워서 찾아간 그 세계의 은주를 . 그녀
가 죽는 날 나 역시 영원한 평안을 누릴 거예요 . 건석씨 당신을 믿어도 되겠죠? 당신
만이 이 지루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예요 . 사랑한다는 말 차마 할 수
없는 절 이해해주시겠죠 ? 아 나비가 되게 해주세요 . 바람에 실려 강물에 떠밀리어
당신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당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주세요 . 그래서 당신 겨
드랑이에서 나는 땀내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 머리카락 한 올도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세요 . 그럴 거죠 ? 하지만 하지만 왠지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 한없이 착한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
난 요즘 글을 쓰고 있다. 신나게 키보드와의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개구리 울음 소리
에 맞추어 그렇게 강약을 조절하며 글을 쓰고 있다. 그 글의 시작은 사랑하는 S에게 보내
는 편지로 시작되고 있다.

사랑하는 친구 S 보아라 .

우리가 밤새워 토론하던 인본주의의 병폐니, 니체가 남기고 간
니힐리즘의 유산이니 하던 것들이 이밤 눈물처럼 내 가슴에 스
며든다.
지난 5년간 갑자기 돌변해가는 날 지켜보던 안스러운 너의 시
선이 눈 앞에 선하다.
우리는 문학이란 서슬이 퍼런 칼날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
둥쳐왔고 누구보다도 그 생존이 주는 비굴함과 참흉(慘凶)에
가까운 배고픔을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난 너를 "사랑
하는 이란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한 형용어로 기꺼이 이 편
지를 시작한다.
이 원고를 너에게 보내겠다는 확고한 의지는 아직 서지 않았지
만 이 원고가 네 손에 들려져 있을 때에는 이미 난 픽션과 넌
픽션의 경계선에 존재한다는 삼계제천(三界諸天)의 모든 욕망
을 접어둔 채 어떠한 모양으로라도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원고를 읽어나가면서 마치 날 미친놈 취급하면서도 한편으
로 니가 가졌던 그 많은 지난 5년간의 궁금증들이 하나씩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풀려져 나가리라 믿는다.
5년전 그 여름의 중턱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은주의
수술을 맡았던 미국 심장병학회에서 발견했다는 그 극비의 사
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 앞에서조차 미친 듯이 세 마리의
족보있는 개를 사들이던 은주의 그 황당한 최후라든지 (적어도
네 눈에 비친),
그토록 사랑했던 은주와 나의 사랑이 악몽처럼 식어져가는 것
을 지켜보며 그토록 안스러워하던 내 친구여 .
무엇이 그토록 내 의식의 덩어리를 너무도 완벽하게 쇄편, 쇄설
조각내며 지옥으로 몰고갔는지 넌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빠져들지 말기 바란다.
그 악마는 너와 나의 주변에서 온갖 잡다한 이론들 ,
양자물리학이니, 오펜하이머의 우주론까지 들먹이며 너의 지식
의 포만감 속에서 기생하려들테니까 .
부탁한다.
이 허황된 이야기를 읽고 혹시 일말의 진실이라도 있는 듯 나
를 찾아나서는 그런 우스광스런 짓은 하지 말아주길 간원한다.
다만 너에게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밤이기에 적잖은 밤을 세워 이 글들을 써내려간다.
사랑하는 친구여,
지금부터 너의 모든 상식을 잠시 내려놓고 5년 전의 그 무덥던
여름으로 나와 함께 잠시 거슬러 올라가자 .
모든 논리와 흥겨운 이성을 배냇냄새 비릿한 원초의 상태로 돌
려놓고 말이다 .

94년 7월 7일
친구 건석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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