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내 사랑을 얘기해 볼까?
고양이 여인숙
15화. 내 사랑을 얘기해 볼까?
사랑하는 건석씨 .
행복했었어요 .
약한 심장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나와 엄마를 버리고 내 나이만한 여자를 택
한 아버지가 저주스럽고 징그러웠어요.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갇힌 엄마를 면회하고
돌아서 나올 때는 몇 번이고 면도날을 지갑 속에 넣어 두었어요.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지요. 세상의 남자들은 性에 굶주렸고 사랑도 그 부차적인 선택일 뿐 내 기
나긴 방황과 절망을 치유해줄 그 어떤 남자도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으리라 믿었었지요.
사랑하는 건석씨.
당신은 이 모든 불신과 상처를 그 넓은 가슴으로 감싸 안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나
의 보석이었어요. 그 보석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고 나만이 몰래
꺼내어 음미하고 싶었어요.
책을 보는 척하며 당신을 훔쳐봤더랬어요. 곱쓸한 머리에 짙은 눈썹, 그리고 하얀 피부
에 언제나 진지하고 성실한 당신의 표정은 어떠한 문학서적보다도 내게는 더 신비스러웠지
요. 내게 많은 돈이 있었다면 당신의 책방 안에 진열된 모든 책들을 다 샀을 거예요. 무
슨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으나 약한 가슴만 콩쾅일 뿐 전 항상 텅 빈 방으로 돌아와야 했
죠.
녹음이 파도처럼 날 덮던 유월의 어느 날, 미지의 세계로 길 떠나자는 반젤리스의 상큼
한 불의 전차처럼 그렇게 당신이 제 앞으로 다가왔어요. 당신을 만났던 지난 2년은 행복
이란 단어가 유치하게 느껴졌어요. 당신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당신은 이세상 인간과는
다른 사랑으로 날 지켜줬어요. 아, 그 무슨 형용어로 당신이 내게 베푼 사랑을 표현하겠
어요? 술람미 여인을 향해 내뿜었던 그 많은 솔로몬의 찬양도 건석씨를 향한 제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을 거예요.
행복했어요 . 정말이지 더 이상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전 행복했어요.
사랑하는 건석씨 .
당신이 궁금해했던 그날 밤, 전 이미 세상과 등을 돌리려고 하고 있었어요. 백사장이란
마을 입구에서 사고로 우리가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제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어요 . 짙은 안개 속에서 당신의 손을 잡고 무어라고 말해야 했지만 저보다 훨씬
더 긴장한 당신의 표정을 읽곤 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너무도 가슴이 답답해왔어요 . 그 안개 속에서 고투하는 당신을 볼 때마다 그렇게 당신
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절 생각하자니 서러움과 찢어지는 아픔으로 전 거의 실신할 것만
같았어요.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예지의 능력이 생긴다잖아요. 전 그때 이미 우리가 엄청난 사건
속으로 빠져든 게 틀림이 없다고 느꼈지요. 성황당 나무 뒤의 그 음산한 마을 길로 접어
들 땐 제 심장은 이미 빛을 잃어가고 있었어요.
사랑하는 건석씨 .
마을의 식당 한가운데 앉아 있던 그 소녀 기억나시죠? 전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 그 소
녀도 나만큼 불행하고 어두운 삶을 살아왔음을 . 그리고 첫 눈에 그녀가 그토록 꿈꾸어
왔던 백마를 탄 남자가 건석씨 바로 당신이었음을 전 알 수 있었어요. 건석씨는 제가 눈
치를 챌 새라 조심했고 전 솔직히 질투도 생겼지요.
여인숙에 들어가자 마자 건석씨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어요 .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
막으로 여전히 날 사랑한다는 당신의 거친 숨소리를 내 귓가에 들으며 그렇게 마지막 눈
을 감고 싶었어요.
샤워를 끝내고 전 선풍기 바람 속에서 날 부르는 천사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죠. 이제 그
만 너의 약한 심장을 거두어가야겠다는 그런 노래 소리였어요 . 그때 주위를 둘러보니 온
통 악마들 투성이었어요 . 샤워를 마치고 내 곁에 누운 당신과 나의 그림자 뒤로 고양이
모양을 한 악마들이 혀를 날름대며 서성이고 있었지요 .
난 천사들에게 부탁을 했어요 . 건석씨를 두곤 절대로 갈 수 없다고 . 언제나 내 인생을
잡초밭처럼 흐트리던 운명이여,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록 쓰디 쓴 사랑의 담즙을 내게
던질 수 있는가라고 울부짖었어요 .
이윽고 건석씨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건석씬 수돗가의 캔 맥주 두 캔을 마시곤
옆 방으로 들어가서 잠이 들더군요. 고스톱을 치던 남자들도 잠이 들었구요 .
여인숙 내엔 온통 적막감과 얼음물 보다 더 차가운 살기만이 출렁이고 있을 때였어요. 누
군가가 사뿐하게 걸으며 내 방으로 들어오더군요 . 그것은 이미 육체를 떠난 제 영혼이
보기에는 검은 고양이의 모습이었으나, 아직 멈추지 않은 심장의 눈으로 볼 땐 여인숙을
들어오기 전에 봤던 그 아름다운 소녀였어요.
제게 다가온 그 소녀가 빨리 말했어요.
[어서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
전 그 소녀에게 조용히 말했죠.
[전 이미 심장이 멈추었답니다 . 하지만 하지만 사랑하는 건석씨를 생각하니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 어쩌면 좋죠 아가씨 저를 도와주세요 .]
그 소녀는 금새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조용히 나를 내려다봤어요. 그리고 부드러운 손
으로 내 얼굴을 어루 만지며 미소를 지었어요 .
[일어나세요 . 그리고 저 방에 잠 든 남자를 깨워서 빨리 달아나세요 .]
전 다시 그 소녀에게 말했답니다.
[전 당신을 알아요 . 당신은 나보다 건석씨가 더 염려가 되어서 온 거예요 . 그렇지 않나
요 ? 그러니 절 내버려 두세요 . 부디 부디 건석씨를 지켜주세요.]
소녀가 날 계속 바라봤고 전 더 간절히 사정을 했어요.
[저 남자의 숨소리가 들리나요 ? 들어봐요 . 이 세상에 저보다 더 달콤한 사랑의 찬가가
있다고 믿으세요 ? 약속해줘요 . 저 아름다운 사람을 저 착하고 순수한 영혼을 지켜주
겠다고 .]
소녀는 아주 당황하기 시작했어요 .
[빨리 빨리 약속해주세요 . 숨이 멈출 것만 같아요 제발 .]
그때 소녀가 재빨리 말하더군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예요.]
[그게 뭔가요? 말해보세요 .]
소녀가 잠시 망설였어요. 전 그런 소녀를 재촉했구요.
[제 영혼을 사세요.]
전 소녀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어떻게요 ?]
[이곳을 빠져나갈 동안만이예요. 이곳은 당신의 꿈 속에 존재하는 허구일 뿐이예요 . 이
곳만 빠져나가면 당신은 곧 정상인이 될 수 있을 거예요 . 그때까지 제 영혼을 사세요 .
]
[당신에겐 무슨 이득이 있나요?]
[광추면을 통과하는 순간 전 영원히 자유로워 질 거예요. 지금 당신의 세상에서 기다리
는 혼동하는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서 이 지옥을 빠져나갈 거예요 . 그리고 나비처럼 훨
훨 날아 세상의 비산비야를 떠돌면서 그렇게 살 거예요 . 가끔씩 건강해진 당신의 뜨락에
도 놀러가서 환하게 웃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할 거예요.]
[무슨 뜻인진 잘 몰라도 무엇이든지 할께요 . 건석씨만 건석씨만 안전하다면 무엇이든
지 할께요 .]
그때였어요 . 누군가가 여인숙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어요 . 엄청난 살육의 기계를 들
고 그렇게 말이예요 .
[쉿!]
[누구죠?]
[더러운 짐승이예요 . 빨리 당신의 남자를 깨워야 해요. 꼼짝 말고 여기 있어야 해요 .
그리고 어떠한 비명소리가 들려도 나오면 안돼요 . 문은 제가 잠그고 갈께요. 조용해지
고 나면, 아니 제가 당신의 남자를 무사히 지키는 걸 성공하고 나면 우리 계약은 곧 체
결될 거예요 .]
그 소녀가 나가고 근 한 시간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들어보지 못한 최악의 비명 소리들로
난무했어요 . 아, 무서웠어요 . 살려달라는 비명 소리가 메아리치고 제 바로 앞 방의 남
자들의 육신들이 찢기워져 나가는 소리가 피냄새와 함께 몰려왔어요 .
그리고 한참 후 제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두드리며 절규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땐 미
쳐버릴 것만 같았어요.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제 심장은 온몸을 억압한 채 조금도 움직이
려 들지 않았어요.
건석씨 . 사랑하는 건석씨 .
언젠가 당신이 우린 한날 한 시간에 죽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저는 밤을 새워 기도했지요
. 정말 그렇게 되어야 한다구요 . 아니, 정말이지 이기적인 저는 그게 불가능하다면 저
를 먼저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죠. 당신이 없는 단 한순간의 호흡이란 제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에 .
그래요 . 그 어리석은 기도를 드린 제가 그렇게 원망스러운 순간이었어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요 . 제 영혼을 기다리는 천사들도 감동을 하면서 조용히 나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
천사들이 한결같이 말하더군요 . 그 소녀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말라구요 .
전 나와 그 소녀는 이기적인 약속을 한 게 아니라 순수하다고 말했죠 .
천사들이 말했죠.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우린 조용히 기다리지만 이 세상에 그 사랑을
받아들일 만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그 길다랗고 하얀 손을 제게 펼쳤어요 . 아, 건석씨 . 제가 저 손을 잡지 않도록
힘을 주세요라고 외치고 있을 때 저의 입에서 천사들을 조금 더 지연시키는 말이 튀어나
왔어요 .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께요 . 아니, 어차피 사랑이란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 아닌가요? 제발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께요 .
천사들이 잠시 내미는 손을 멈추었어요 . 그리고 그들은 속삭였어요 .
아, 이 여자는 하나님과 닮은 사랑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때였어요 . 피투성이가 된 그 소녀가 내 방으로 들어오더군요 . 그 소녀는 금새라도 쓰
러질 것만 같았어요. 전 다급하게 물었죠 .
[어떻게 됐나요?]
[그 그 사람이 심하게 상처를 입었어요 .]
[아 건석씨 .]
마침내 난 그 소녀에게 모든 걸 맡겼어요 . 그 소녀는 제게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
[우리의 계획이 실패해서 우리의 천사같은 마음들이 악마로 변하더래도 그때는 서로를
원망하지 않기로 해요 . 후회없이 후회없이 사랑을 선택했노라고 말하도록 해요 .]
그리고 소녀는 눈을 감고 노오란 불덩어리로 변했어요. 꺼져가는 내 호흡을 밀쳐내고 그
소녀가 아주 천천히 내 코 속으로 들어왔어요 . 전 금새라도 일어날 수 있었어요 . 아니
, 피가 용솟음쳤어요 . 하늘을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
밖으로 나와보니 당신의 살점이 여러군데 뜯겨져 나간 채 거의 죽어가고 있었어요 . 다
행히 져니가 고양이 한 마리의 목을 문 채 절 바라보더군요 . 당신을 안고 방으로 들어
갔어요 .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 난 이렇게 살아났는데 당신은 이미 죽어가다니 로미오와 쥴리
엣도 이보다 더 비극적이진 않을 거예요라고 울부짖었지요 . 그때 내 속 깊은 곳에서 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은주씨 .
눈을 감으세요 .
그리고 건석씨의 상처 위에다 손을 얹으세요 .
느껴지나요 ? 끊어진 혈관이 다시 이어지는 걸 . 새로운 세포가 형성되고 신선한 피가
다시 심장으로부터 솟구치는 걸 .
은주씨 .
전 행복해요 .
당신처럼 한 사람을 온 우주보다 더 크게 사랑할줄 아는 여인을 만났으니 .
저는 어느 때보다 더 행복하고 더 가슴이 뛰어요 .
은주씨 .
제가 그동안 살아온 지옥은 기억조차 하기 두려워요 .
밤마다 들려오는 살육의 비명들이 내 지친 영혼을 마구 짓밟고만 있었어요 .
저는 그 수천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오직 오늘 같은 밤을 기다려왔어요 .
당신처럼 아름다운 영혼, 당신처럼 곱고 순결한 영혼을 만나기를 .
은주씨 .
광추면을 통과할 때 제 육신과 영혼은 불에 타서 영원히 사라질 거예요 .
하지만 전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
죽어서라도 이곳을 한번 빠져나가보는 게 꿈이거든요 .
은주씨 .
이곳을 탈출하거든 건석씨와 함께 부디 행복하세요 .
심장병 수술을 받는 그 병원의 수술대 위에도 전 나비가 되어 날아갈 거예요 .
당신의 건강해진 모습을 기원하며 그렇게 건강해진 당신의 어깨에 올라 앉아 마구 춤을
출 거예요 .
은주씨 .
눈을 떠보세요 .
당신의 사랑하는 건석씨가 다 나았네요 .
난 두눈에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
은주 . 은주 .
마침내 광추면은 닫히고 내 몸은 점점 더 은주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다. 광추
면이 저 뒤로 보이고 있었다. 너무도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져니와 사랑하는 은주의 마지막 미소를 남겨두고 그렇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동시에 나의 영혼은 누워 있는 현실의 나의 몸으로 휙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급히 앰브란스를 부르던 S가 마치 유령을 보듯이 화들짝 놀라며 수화기를 떨어뜨리고 있
었다.
내가 그 기나긴 적막을 부수고 천천히 눈을 떴다 . 그 긴 적막의 끝에서 내 입에서 나오
는 말들이라곤 단 몇 마디였다.
[S야 . 빨리 은주를 불러줘 . 은주는 은주는 어디있어 ?]
15화. 내 사랑을 얘기해 볼까?
사랑하는 건석씨 .
행복했었어요 .
약한 심장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나와 엄마를 버리고 내 나이만한 여자를 택
한 아버지가 저주스럽고 징그러웠어요.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갇힌 엄마를 면회하고
돌아서 나올 때는 몇 번이고 면도날을 지갑 속에 넣어 두었어요.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지요. 세상의 남자들은 性에 굶주렸고 사랑도 그 부차적인 선택일 뿐 내 기
나긴 방황과 절망을 치유해줄 그 어떤 남자도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으리라 믿었었지요.
사랑하는 건석씨.
당신은 이 모든 불신과 상처를 그 넓은 가슴으로 감싸 안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나
의 보석이었어요. 그 보석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고 나만이 몰래
꺼내어 음미하고 싶었어요.
책을 보는 척하며 당신을 훔쳐봤더랬어요. 곱쓸한 머리에 짙은 눈썹, 그리고 하얀 피부
에 언제나 진지하고 성실한 당신의 표정은 어떠한 문학서적보다도 내게는 더 신비스러웠지
요. 내게 많은 돈이 있었다면 당신의 책방 안에 진열된 모든 책들을 다 샀을 거예요. 무
슨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으나 약한 가슴만 콩쾅일 뿐 전 항상 텅 빈 방으로 돌아와야 했
죠.
녹음이 파도처럼 날 덮던 유월의 어느 날, 미지의 세계로 길 떠나자는 반젤리스의 상큼
한 불의 전차처럼 그렇게 당신이 제 앞으로 다가왔어요. 당신을 만났던 지난 2년은 행복
이란 단어가 유치하게 느껴졌어요. 당신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당신은 이세상 인간과는
다른 사랑으로 날 지켜줬어요. 아, 그 무슨 형용어로 당신이 내게 베푼 사랑을 표현하겠
어요? 술람미 여인을 향해 내뿜었던 그 많은 솔로몬의 찬양도 건석씨를 향한 제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을 거예요.
행복했어요 . 정말이지 더 이상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전 행복했어요.
사랑하는 건석씨 .
당신이 궁금해했던 그날 밤, 전 이미 세상과 등을 돌리려고 하고 있었어요. 백사장이란
마을 입구에서 사고로 우리가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제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어요 . 짙은 안개 속에서 당신의 손을 잡고 무어라고 말해야 했지만 저보다 훨씬
더 긴장한 당신의 표정을 읽곤 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너무도 가슴이 답답해왔어요 . 그 안개 속에서 고투하는 당신을 볼 때마다 그렇게 당신
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절 생각하자니 서러움과 찢어지는 아픔으로 전 거의 실신할 것만
같았어요.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예지의 능력이 생긴다잖아요. 전 그때 이미 우리가 엄청난 사건
속으로 빠져든 게 틀림이 없다고 느꼈지요. 성황당 나무 뒤의 그 음산한 마을 길로 접어
들 땐 제 심장은 이미 빛을 잃어가고 있었어요.
사랑하는 건석씨 .
마을의 식당 한가운데 앉아 있던 그 소녀 기억나시죠? 전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 그 소
녀도 나만큼 불행하고 어두운 삶을 살아왔음을 . 그리고 첫 눈에 그녀가 그토록 꿈꾸어
왔던 백마를 탄 남자가 건석씨 바로 당신이었음을 전 알 수 있었어요. 건석씨는 제가 눈
치를 챌 새라 조심했고 전 솔직히 질투도 생겼지요.
여인숙에 들어가자 마자 건석씨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어요 .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
막으로 여전히 날 사랑한다는 당신의 거친 숨소리를 내 귓가에 들으며 그렇게 마지막 눈
을 감고 싶었어요.
샤워를 끝내고 전 선풍기 바람 속에서 날 부르는 천사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죠. 이제 그
만 너의 약한 심장을 거두어가야겠다는 그런 노래 소리였어요 . 그때 주위를 둘러보니 온
통 악마들 투성이었어요 . 샤워를 마치고 내 곁에 누운 당신과 나의 그림자 뒤로 고양이
모양을 한 악마들이 혀를 날름대며 서성이고 있었지요 .
난 천사들에게 부탁을 했어요 . 건석씨를 두곤 절대로 갈 수 없다고 . 언제나 내 인생을
잡초밭처럼 흐트리던 운명이여,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록 쓰디 쓴 사랑의 담즙을 내게
던질 수 있는가라고 울부짖었어요 .
이윽고 건석씨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건석씬 수돗가의 캔 맥주 두 캔을 마시곤
옆 방으로 들어가서 잠이 들더군요. 고스톱을 치던 남자들도 잠이 들었구요 .
여인숙 내엔 온통 적막감과 얼음물 보다 더 차가운 살기만이 출렁이고 있을 때였어요. 누
군가가 사뿐하게 걸으며 내 방으로 들어오더군요 . 그것은 이미 육체를 떠난 제 영혼이
보기에는 검은 고양이의 모습이었으나, 아직 멈추지 않은 심장의 눈으로 볼 땐 여인숙을
들어오기 전에 봤던 그 아름다운 소녀였어요.
제게 다가온 그 소녀가 빨리 말했어요.
[어서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
전 그 소녀에게 조용히 말했죠.
[전 이미 심장이 멈추었답니다 . 하지만 하지만 사랑하는 건석씨를 생각하니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 어쩌면 좋죠 아가씨 저를 도와주세요 .]
그 소녀는 금새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조용히 나를 내려다봤어요. 그리고 부드러운 손
으로 내 얼굴을 어루 만지며 미소를 지었어요 .
[일어나세요 . 그리고 저 방에 잠 든 남자를 깨워서 빨리 달아나세요 .]
전 다시 그 소녀에게 말했답니다.
[전 당신을 알아요 . 당신은 나보다 건석씨가 더 염려가 되어서 온 거예요 . 그렇지 않나
요 ? 그러니 절 내버려 두세요 . 부디 부디 건석씨를 지켜주세요.]
소녀가 날 계속 바라봤고 전 더 간절히 사정을 했어요.
[저 남자의 숨소리가 들리나요 ? 들어봐요 . 이 세상에 저보다 더 달콤한 사랑의 찬가가
있다고 믿으세요 ? 약속해줘요 . 저 아름다운 사람을 저 착하고 순수한 영혼을 지켜주
겠다고 .]
소녀는 아주 당황하기 시작했어요 .
[빨리 빨리 약속해주세요 . 숨이 멈출 것만 같아요 제발 .]
그때 소녀가 재빨리 말하더군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예요.]
[그게 뭔가요? 말해보세요 .]
소녀가 잠시 망설였어요. 전 그런 소녀를 재촉했구요.
[제 영혼을 사세요.]
전 소녀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어떻게요 ?]
[이곳을 빠져나갈 동안만이예요. 이곳은 당신의 꿈 속에 존재하는 허구일 뿐이예요 . 이
곳만 빠져나가면 당신은 곧 정상인이 될 수 있을 거예요 . 그때까지 제 영혼을 사세요 .
]
[당신에겐 무슨 이득이 있나요?]
[광추면을 통과하는 순간 전 영원히 자유로워 질 거예요. 지금 당신의 세상에서 기다리
는 혼동하는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서 이 지옥을 빠져나갈 거예요 . 그리고 나비처럼 훨
훨 날아 세상의 비산비야를 떠돌면서 그렇게 살 거예요 . 가끔씩 건강해진 당신의 뜨락에
도 놀러가서 환하게 웃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할 거예요.]
[무슨 뜻인진 잘 몰라도 무엇이든지 할께요 . 건석씨만 건석씨만 안전하다면 무엇이든
지 할께요 .]
그때였어요 . 누군가가 여인숙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어요 . 엄청난 살육의 기계를 들
고 그렇게 말이예요 .
[쉿!]
[누구죠?]
[더러운 짐승이예요 . 빨리 당신의 남자를 깨워야 해요. 꼼짝 말고 여기 있어야 해요 .
그리고 어떠한 비명소리가 들려도 나오면 안돼요 . 문은 제가 잠그고 갈께요. 조용해지
고 나면, 아니 제가 당신의 남자를 무사히 지키는 걸 성공하고 나면 우리 계약은 곧 체
결될 거예요 .]
그 소녀가 나가고 근 한 시간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들어보지 못한 최악의 비명 소리들로
난무했어요 . 아, 무서웠어요 . 살려달라는 비명 소리가 메아리치고 제 바로 앞 방의 남
자들의 육신들이 찢기워져 나가는 소리가 피냄새와 함께 몰려왔어요 .
그리고 한참 후 제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두드리며 절규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땐 미
쳐버릴 것만 같았어요.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제 심장은 온몸을 억압한 채 조금도 움직이
려 들지 않았어요.
건석씨 . 사랑하는 건석씨 .
언젠가 당신이 우린 한날 한 시간에 죽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저는 밤을 새워 기도했지요
. 정말 그렇게 되어야 한다구요 . 아니, 정말이지 이기적인 저는 그게 불가능하다면 저
를 먼저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죠. 당신이 없는 단 한순간의 호흡이란 제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에 .
그래요 . 그 어리석은 기도를 드린 제가 그렇게 원망스러운 순간이었어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요 . 제 영혼을 기다리는 천사들도 감동을 하면서 조용히 나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
천사들이 한결같이 말하더군요 . 그 소녀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말라구요 .
전 나와 그 소녀는 이기적인 약속을 한 게 아니라 순수하다고 말했죠 .
천사들이 말했죠.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우린 조용히 기다리지만 이 세상에 그 사랑을
받아들일 만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그 길다랗고 하얀 손을 제게 펼쳤어요 . 아, 건석씨 . 제가 저 손을 잡지 않도록
힘을 주세요라고 외치고 있을 때 저의 입에서 천사들을 조금 더 지연시키는 말이 튀어나
왔어요 .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께요 . 아니, 어차피 사랑이란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 아닌가요? 제발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께요 .
천사들이 잠시 내미는 손을 멈추었어요 . 그리고 그들은 속삭였어요 .
아, 이 여자는 하나님과 닮은 사랑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때였어요 . 피투성이가 된 그 소녀가 내 방으로 들어오더군요 . 그 소녀는 금새라도 쓰
러질 것만 같았어요. 전 다급하게 물었죠 .
[어떻게 됐나요?]
[그 그 사람이 심하게 상처를 입었어요 .]
[아 건석씨 .]
마침내 난 그 소녀에게 모든 걸 맡겼어요 . 그 소녀는 제게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
[우리의 계획이 실패해서 우리의 천사같은 마음들이 악마로 변하더래도 그때는 서로를
원망하지 않기로 해요 . 후회없이 후회없이 사랑을 선택했노라고 말하도록 해요 .]
그리고 소녀는 눈을 감고 노오란 불덩어리로 변했어요. 꺼져가는 내 호흡을 밀쳐내고 그
소녀가 아주 천천히 내 코 속으로 들어왔어요 . 전 금새라도 일어날 수 있었어요 . 아니
, 피가 용솟음쳤어요 . 하늘을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
밖으로 나와보니 당신의 살점이 여러군데 뜯겨져 나간 채 거의 죽어가고 있었어요 . 다
행히 져니가 고양이 한 마리의 목을 문 채 절 바라보더군요 . 당신을 안고 방으로 들어
갔어요 .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 난 이렇게 살아났는데 당신은 이미 죽어가다니 로미오와 쥴리
엣도 이보다 더 비극적이진 않을 거예요라고 울부짖었지요 . 그때 내 속 깊은 곳에서 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은주씨 .
눈을 감으세요 .
그리고 건석씨의 상처 위에다 손을 얹으세요 .
느껴지나요 ? 끊어진 혈관이 다시 이어지는 걸 . 새로운 세포가 형성되고 신선한 피가
다시 심장으로부터 솟구치는 걸 .
은주씨 .
전 행복해요 .
당신처럼 한 사람을 온 우주보다 더 크게 사랑할줄 아는 여인을 만났으니 .
저는 어느 때보다 더 행복하고 더 가슴이 뛰어요 .
은주씨 .
제가 그동안 살아온 지옥은 기억조차 하기 두려워요 .
밤마다 들려오는 살육의 비명들이 내 지친 영혼을 마구 짓밟고만 있었어요 .
저는 그 수천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오직 오늘 같은 밤을 기다려왔어요 .
당신처럼 아름다운 영혼, 당신처럼 곱고 순결한 영혼을 만나기를 .
은주씨 .
광추면을 통과할 때 제 육신과 영혼은 불에 타서 영원히 사라질 거예요 .
하지만 전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
죽어서라도 이곳을 한번 빠져나가보는 게 꿈이거든요 .
은주씨 .
이곳을 탈출하거든 건석씨와 함께 부디 행복하세요 .
심장병 수술을 받는 그 병원의 수술대 위에도 전 나비가 되어 날아갈 거예요 .
당신의 건강해진 모습을 기원하며 그렇게 건강해진 당신의 어깨에 올라 앉아 마구 춤을
출 거예요 .
은주씨 .
눈을 떠보세요 .
당신의 사랑하는 건석씨가 다 나았네요 .
난 두눈에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
은주 . 은주 .
마침내 광추면은 닫히고 내 몸은 점점 더 은주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다. 광추
면이 저 뒤로 보이고 있었다. 너무도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져니와 사랑하는 은주의 마지막 미소를 남겨두고 그렇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동시에 나의 영혼은 누워 있는 현실의 나의 몸으로 휙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급히 앰브란스를 부르던 S가 마치 유령을 보듯이 화들짝 놀라며 수화기를 떨어뜨리고 있
었다.
내가 그 기나긴 적막을 부수고 천천히 눈을 떴다 . 그 긴 적막의 끝에서 내 입에서 나오
는 말들이라곤 단 몇 마디였다.
[S야 . 빨리 은주를 불러줘 . 은주는 은주는 어디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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