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청풍(靑風) 4
4화. 청풍(靑風) 4
‘쉽지 않다. 쉽지 않아.
내공 심법의 깨달음이란 홀로 정진하여 이루어야 하는 법이라지만, 역시나 사부님의 도움 없이 익혀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삼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단공에 머물러,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구결의 이해도 충분하고, 내력도 쌓을만큼 쌓았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벽에 부딪쳤다. 어찌해야 할까.’
다른 장로께 여쭈어 보면 해답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될 말.
‘아니야.’
청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열 여섯, 특별한 친우(親友)조차 없이 오직 자하진기만을 벗하며 살아온 그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사부님이 화산파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기공(氣功)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비무에서 패배하여 돌아가신 분. 화산파의 자존심을 깎아먹은 치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그런 것은 귀를 닫아놓는다고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이야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말들을 듣고 있으면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자하진기는 사부님의 일생이 걸려있는 유작(遺作)인 것이다.
‘혼자 해야 돼.’
어찌 보면 어린 마음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사부의 고집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자하진기의 완성을 위해 융통성을 보이는 것. 청풍은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 청풍의 마음은 선현진인이 죽었을 때, 그 때 그대로, 마치 사부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안은 채, 장운대로 향한 청풍이다.
‘아! 오늘부터였나.’
바로 어제까지와는 다른 풍경이다.
화형권과 육합검법을 연마하는 대신, 모두 다 행낭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부터는 경공 수련이다. 화영보(花影步) 구결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날이 저물 때 까지 황석곡에 가서 경석을 모으고 돌아온다. 인솔하는 매화검수를 잘 따르도록.”
“예!”
보무 제자 이백이 절도 있는 대답소리를 울렸다.
경공 연마를 구실로 이백 여명이 경석 수집에 나서면 나머지 이백여 제자들은 이 장운대에서 무공 수련을 계속한다. 십일의 경석 수집이 끝나면 교대다. 그 다음 십일 동안에는, 장운대에 남았던 이백여 제자들이 약초 채집에 나서게 되는 구조였다.
청풍은 선발대다.
바로 오늘부터, 경석 수집에 나서야 했다.
‘시간이 아까운데.......’
청풍은 이미 두 번이나 이 경석 수집에 나가본 적이 있다. 상당히 곤욕스런 작업, 청풍은 사부의 죽음이후 처음으로 선검수로 진급하는 운대관 시험을 생각했다.
‘시험을 봐야 하나. 역시......’
그러고 보면 청풍의 나이도 이제 보무제자들 중, 적은 편이 아니었다.
십 이삼 세 보무제자들도 꽤 되는데다가, 계속하여 어린 제자들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아래에서 많아지면 위에서 잘려나가는 이들이 있어야 하는 법.
이십 세 까지도 운대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보무제자에 머무른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대부분 하산하기 마련이었으며 십 칠 팔세만 되도 스스로의 한계를 느낀 제자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 전체 보무 제자들의 숫자는 사, 오백 명 선에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탁! 탁! 타타탁!
황색 도복 이백여 제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장운대 수련장을 빠져 나왔다.
가파른 길을 따라 길 아닌 길을 넘고, 보법을 펼친다.
워낙에나 험한 산길이라, 경신술의 숙달 없이는 함부로 다닐 수 없다. 어린 보무 제자들이라고 특별히 챙겨주는 것은 없었으니, 굉장히 엄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련방식이 된다.
구결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면, 낙오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보무 제자들이 화영보의 구결을 되뇌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단 하나 청풍을 제외하고는.
‘더 진중하게. 마음을 조급하게 갖지 말고.’
청풍은 화영보의 구결을 따르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하진기 뿐이다.
화영보와 비슷한 동작을 쓰고 있기는 하다. 다른 이들 사이에서 굳이 눈에 띌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청풍이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하진기의 운용에 의해서다. 진기의 흐름 대로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자신만의 세계에만 빠져들어 있는 것이었다.
탁, 타탁.
“거기 조심! 가파르다.”
앞과 뒤에는 각각 매화검수들이 하나씩 따라붙어 있다.
청량한 목소리. 한 매화 검수가 이백 제자 모두에게 들릴 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폭을 작게 해라. 구결 암송을 잊지 마.”
그들의 역할은 보무제자들의 인솔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인솔 뿐 아니라, 경신술 수련의 사범 역할도 겸하는 것.
특히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보면, 보법 활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고, 전체 일행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매화 검수는 다른 것 같다.’
요즘 들어 특히 느끼는 바다.
자하진기가 이단공의 막바지에 이르러 감각이 예민해진 점도 있겠지만, 그렇게 진기로서 느끼는 것 이외에도 매화검수들에겐 확실히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는 특질이 있었다.
잘 벼려진 명검(名劍)과도 같은 기도다.
이십 대 정도의 후기지수들, 기껏 십년, 또는 십 수년의 차이밖에 없음에도 어떻게 그렇게 고강한 기운을 발할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자하진기를 얼마나 더 익혀야 저 수준에 이를 수 있을까?’
한참 걸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자하진기가 최고라는 사부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겠지만, 문제는 청풍 자신이 느끼는 스스로의 자질이다. 스스로 천부적인 무재(武才)라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하진기 하나만을 익히기에도 벅찬 마당이다.
워낙에 화형권, 육합검의 투로를 등한시 한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또래의 제자들과 화형권, 육합검 비무를 할 때면 겨우 겨우 패배만을 면할 뿐,·통쾌하게 이겨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직 멀었나보다. 나는.......’
흔들리는 눈빛에 안타까움이 묻어 나온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청풍은 자하진기를 모른다.
제 단전 안에 축기를 이루고 있는 진기의 수준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자하진기는 신공(神功)이다.
신공에는 신공에 어울리는 비기(秘技)가 필요하다.
진기를 활용할 수 있는 무공만 제대로 익힌다면, 다른 보무제자들은 결코 청풍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가르치는 무공들이 문제인 것이다. 비형권이나 화형권 정도로는 안 된다.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 상승 요결을 끌어낼 수 있는 청풍이었지만, 그것으로는 진신 내공을 끌어낼만한 진결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뭐, 늦으면 어때. 언제든 될 수 있겠지.’
몇 걸음 더 가파른 산길을 타 내리는 사이, 청풍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달리 했다. 조급함을 떨쳐버린 맑은 눈에 더 이상 실망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공은.......경쟁하기 위해 익히는 것이 아니니까.’
낙천적인 성격이다.
이 역시 자하진기와 함께 사부님이 남겨준 것, 천성적으로 선한 심성에 더해진 또 하나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휘이이이잉.
주홍색 바위를 타고 부는 바람이 황석곡에 거의 다 이르렀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조금 더 가자 조그만 정자 하나가 보인다.
적색 기와, 분홍 장식이 조화로운 색조를 띄고 있는 매화정(梅花亭)이었다.
황석곡 측면 능선에 위치한 매화정은 화산의 장중함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지다.
하늘 높이 솟은 연화봉과 운대봉을 한눈에 담아둘 수 있는 곳, 쉬어가는 구름이 머무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다시 정렬하라. 여기까지는 갑조. 여기까지는 을조. 저번에 나누었던 방식대로 움직인다.”
매화정을 기점으로 이백여 제자들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 황석곡으로 들어간다. 어린 제자들은 덜 위험한 동쪽 진입로로, 십 오세 이상의 제자들은 북쪽 진입로로 이동해야 했다.
처처처척.
금새 대열을 갖춘 제자들, 생활로 익숙해진 엄정함이었다.
“유 사형, 오랜만이네요.”
매화정을 지나치려니,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있다. 뜻밖의 일.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소녀가 거기에 있었다.
“연 사매. 오랜만이다. 언제 올라왔느냐.”
연 사매라 불린 이. 매화정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는 여인임에도 무척이나 큰 키를 지녔다. 늘씬한 체구에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니, 그 모습 가히 선녀에 비길 정도라, 그녀를 보는 보무제자들의 눈이 모두 다 휘둥그레졌다.
“어젯 밤에요. 보무제자들인가요?”
“그래.”
“수고 하셔야겠네요. 보무제자들도, 모두들 고생이군요.”
스스로의 위치에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성정을 지녔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보무제자들을 향하여 웃 음짓는 그녀다.
가파른 산을 탄 제자들의 피로를 한 번에 앗아갈 만큼 시원한 미소였다.
연선하. 매화검수다.
방년 이십 오세, 오년 전 이십 세의 나이에 소요관을 통과한 여걸이었다.
이제 겨우 입문한 제자들이야 모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무제자들이 그녀를 안다.
워낙에 유명하니까.
잘 알고 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천재 여협, 아기자기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고도 맑은 눈을 지닌, 대단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검수였다.
“왠 여자 아이냐?”
“하하, 딸 하나 낳았어요.”
약간은 산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성격을 지녔다.
그 모습에서 섬서성을 떨쳐 울리는 천류검의 달인, 천류여협의 명성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멋진 여자였다.
“........그 괴이한 농담은 여전하구나. 상원진인께서 들으셨다가는 징벌을 면치 못할 이야기다.”
“에그, 딱딱하기는. 유사형도 여전하네요 뭘. 이 아이는 그 산서신협 서자강 대협의 장중보옥이죠. 인사드려라. 얘야.”
열 두세 살 정도의 귀여운 여자아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수줍어하는 기색은 찾아 볼 수 없다. 도리어 한 발 나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서영령이라고 해요.”
맑은 목소리다.
아직은 어리디 어린 소녀지만, 그 얼굴에서 앞으로 대단한 미인이 될 조짐을 볼 수 있었다. 매화검수의 정기어린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태도하며, 움츠러들지 않는 대담한 모습이 또 한 명의 여협 탄생을 예고하는 듯 했다.
“나는 매화검수 유자서다. 대협을 닮은 듯 대단한 기질이 ,보이는구나.”
“감사합니다.”
서영령이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옆에서 서영령의 어깨를 감싸 안은 연선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귀엽죠? 나도 나중에 딸이나 낳을까 봐요.”
“누가 너를 데려가겠느냐. 걱정이다.”
“어머, 농담도 할 줄 아네요. 기억해 두겠어요. 서자강 대협은 지금, 장문인을 뵙고 있을 거구요. 아이는 화산 구경이나 시켜줄 겸, 데리고 나온 거죠.”
“그렇구나. 서 대협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다더냐.”
“잘은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경우, 저번 강호행 때, 우연히 친분을 쌓을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이번에 들어오면서 만나게 되었어요. 서 대협 말씀으로는 그냥, 화산파가 어떤지 궁금해서 왔다 하시대요. 영령의 말벗이나 되어 달라고 부탁하시던데........뭐, 달리 말하자면 놀러온 거라 할 수 있대요.”
“그러냐.”
유자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산서신협만한 고수가 아무런 목적 없이 놀러 온다? 화산파에? 모르는 일이다.
산서신협은 그 무공이 화경에 이른 절정 고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근본 내력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직접 그 무공을 견식해본 사람조차 드물어, 출신 문파, 뒷 배경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경계를 해 볼만한 이라 할 수 있다.
경각심을 일으키던 유자서의 시선이 서영령에 닿았다.
뭐가 어찌되었든 산서신협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온 것은 아닐 것 같기는 하다.
순진한 눈빛의 서영령.
어린 딸이 여기에 있다.
화산파 제자들이 어떤 이들인지 궁금했던 듯, 보무제자들을 하나 하나 찬찬히 훑어보고 있는 서영령이다.
문제를 일으킬 요량이었으면, 이처럼 어린 딸을 동행하고 이곳에 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럼 가 봐야 되겠다. 간만에 보니 반갑구나. 가끔 본산에도 올라오고 그러거라.”
“알았어요.”
매화검수 유자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재빨리 대열을 수습하고 보무제자를 이끈다. 저녁까지 목표량을 채우고, 장운대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나 촉박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썰물처럼 이동해 버린 후.
서영령이 연선하를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있잖아. 화산파 제자들 중에도 굉장히 잘 생긴 사람이 있네.”
“누가? 유 사형? 설마.”
“당연히 아니지. 중간쯤에 있던 제자 말야.”
“그래? 누굴 말하는 거지?”
“못 봤어? 눈에 띄던데. 그런 미남은 흔치 않아. 나이가 들면 더 멋있어 질걸?”
“아이고. 못 말린다. 너 몇 살이니? 벌써부터 남자 이야기를 하고.”
“왜 어때서?”
“말을 말아야지.”
“뭐, 언니 눈에는 무공 강한 사람밖에 안 보일테니까.”
“점점.......대체 누가, 얼마나 잘 생겼길래 그래?”
“나중에 한 번 알아봐. 언니. 아마 여기 여제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할걸?”
“내 참. 여기 제자들이 뭐 그런 것 신경 쓸 것 같니?”
“신경 쓸걸? 언니랑은 다르잖아. 언니는 천재고. 다른 언니들은 천재가 아니니까.”
“벌써부터 이렇게 여우같아가지고, 나중엔 얼마나 속을 썩이련지.”
“언니, 정말 알아보고, 꼭 가르쳐 줘야 돼? 이름이 뭔지 말야.”
“알았다. 알았어. 이 꼬맹아.”
어느 봄 날의 매화정이다.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다.
하늘은 그 수레바퀴를 천천히, 그리고 단호하게 굴려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 었다.
경석은 악기를 만들 때 쓰는 돌이다.
두 개의 돌을 마주쳐 보았을 때, 소리가 가볍고 맑게 울려야 진짜였다.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는 돌들은 아무리 모아도 쓸모가 없었다.
경석을 모으는 작업은 반나절에 걸쳐 진행된다.
반 나절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황석곡에 널려 있는 돌맹이들 사이사이, 한 발작을 움직일 때도 화영보에 의해 움직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제대로만 한다면 분명 좋은 수련방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보무제자들이나 그들을 감독하는 매화검수들이나 그런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매화검수 한 명이 인솔하는 제자들만 백 명.
매화검수들이 그들을 일일이 봐 줄 수는 없다.
스스로 열심인 제자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수련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는 것이다.
특히나 청풍은 처음부터 화영보의 연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무엇을 배우든, 따르는 시늉만을 한다. 내면에서는 온전히 그 혼자서 쓰는 시간이었다.
간간히 떠오르는 약간의 상념들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자하진기 연마에 전념한다.
‘매화검수.......여자인데도 그렇게 대단하다니.’
지금은 잠시의 휴식, 상념의 시간이다.
매화검수 연선하의 모습.
연약한 이들. 여인은 보호해야 할 존재. 사부님께 배웠던 것인데, 그가 본 연선하는 그 가르침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딱, 따악, 딱.
‘너무 시끄럽구나. 청각을 줄이자. 여긴.......안 좋아. 생각하기에도, 수련하기에도.’
돌을 맞부딪치는 소리가 석벽을 울리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안 좋은 돌을 걸러내기 위해 모두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집중하자. 거의 되었어. 이제 거의 안 들린다.’
오감을 통제하는 청풍이다. 오감을 각각 따로. 청력을 최소한으로 줄여 소음을 막아내고 있었다.
‘훨씬 났구나.’
골몰히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경석들을 골라내며 작업을 멈추지 않는 상태다.
장운대에서 무공을 배울 때와 같다.
겉으로는 마치 육합검을 펼치는 것 같아도, 내부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이 일어난다.
바깥과 안이 다른 것.
그것이 가능한 것은 자하진기 덕분이다.
오감과 정신의 분리였다.
청각을 막아 놓았어도, 몸은 듣고 있다. 보통 기이한 일이 아니었지만, 정작 청풍은 그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모른다. 신비함을 일상으로 만드는 것. 자하진기의 공능이었다.
‘여자.......매화검수.......뭐 매화검수니까 그럴 수 있겠지.’
원래 하던 생각으로 돌아간 청풍이다.
여인이라도, 강할 수 있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헌데........그 여자 아이는 뭘까. 그렇게 어린데도, 내력이 상당한 것 같았는데.......’
연선하의 옆에 있던 서영령을 떠올렸다.
작고, 어리지만 자유분방한 생기(生氣)가 기억에 남는다. 서영령은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다. 미묘한 차이. 청풍은 그런 것도 분간해 낼 수 있었다.
‘세상은 정말 넓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확실히, 운대관 시험을 보기는 해야겠다.’
선검수가 되어도 넘어야할 관문이 많다.
천화관을 통과하여 평검수가 되어야 비로소 강호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 면에서는 보무제자가 선검수보다 더 자유로울지 모른다.
보무제자에게는 화산파의 진산 무공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입문에서 하산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선검수는 처음으로 상승 무공을 접하는 위치라 강호행에 큰 제약을 받게 된다. 혼자서는 절대 산 밑으로 내려갈 수 없다. 무공 유출도 유출이지만, 다른 위험도 많기 때문이었다.
강호행에 제약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보무제자들 보다 훨씬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선검수다. 적어도 이런 쓸데없는 노동에는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선검수가 되어서 배우는 무공들에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 더 나아갈 수 있는 길.’
운대관 시험을 고려하게 된 청풍이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었다.
선검수가 되어도 해답은 없다.
오행기와 구소공, 암향표, 천류검, 태을검에는 그가 구하는 진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기(氣)는 느끼고자 하는 사람,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힘을 빌려준다.
준비가 안 되었을 뿐.
그저 청풍은 그 해답이 자신의 안에 이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쉽지 않다. 쉽지 않아.
내공 심법의 깨달음이란 홀로 정진하여 이루어야 하는 법이라지만, 역시나 사부님의 도움 없이 익혀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삼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단공에 머물러,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구결의 이해도 충분하고, 내력도 쌓을만큼 쌓았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벽에 부딪쳤다. 어찌해야 할까.’
다른 장로께 여쭈어 보면 해답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될 말.
‘아니야.’
청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열 여섯, 특별한 친우(親友)조차 없이 오직 자하진기만을 벗하며 살아온 그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사부님이 화산파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기공(氣功)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비무에서 패배하여 돌아가신 분. 화산파의 자존심을 깎아먹은 치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그런 것은 귀를 닫아놓는다고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이야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말들을 듣고 있으면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자하진기는 사부님의 일생이 걸려있는 유작(遺作)인 것이다.
‘혼자 해야 돼.’
어찌 보면 어린 마음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사부의 고집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자하진기의 완성을 위해 융통성을 보이는 것. 청풍은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 청풍의 마음은 선현진인이 죽었을 때, 그 때 그대로, 마치 사부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안은 채, 장운대로 향한 청풍이다.
‘아! 오늘부터였나.’
바로 어제까지와는 다른 풍경이다.
화형권과 육합검법을 연마하는 대신, 모두 다 행낭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부터는 경공 수련이다. 화영보(花影步) 구결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날이 저물 때 까지 황석곡에 가서 경석을 모으고 돌아온다. 인솔하는 매화검수를 잘 따르도록.”
“예!”
보무 제자 이백이 절도 있는 대답소리를 울렸다.
경공 연마를 구실로 이백 여명이 경석 수집에 나서면 나머지 이백여 제자들은 이 장운대에서 무공 수련을 계속한다. 십일의 경석 수집이 끝나면 교대다. 그 다음 십일 동안에는, 장운대에 남았던 이백여 제자들이 약초 채집에 나서게 되는 구조였다.
청풍은 선발대다.
바로 오늘부터, 경석 수집에 나서야 했다.
‘시간이 아까운데.......’
청풍은 이미 두 번이나 이 경석 수집에 나가본 적이 있다. 상당히 곤욕스런 작업, 청풍은 사부의 죽음이후 처음으로 선검수로 진급하는 운대관 시험을 생각했다.
‘시험을 봐야 하나. 역시......’
그러고 보면 청풍의 나이도 이제 보무제자들 중, 적은 편이 아니었다.
십 이삼 세 보무제자들도 꽤 되는데다가, 계속하여 어린 제자들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아래에서 많아지면 위에서 잘려나가는 이들이 있어야 하는 법.
이십 세 까지도 운대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보무제자에 머무른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대부분 하산하기 마련이었으며 십 칠 팔세만 되도 스스로의 한계를 느낀 제자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 전체 보무 제자들의 숫자는 사, 오백 명 선에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탁! 탁! 타타탁!
황색 도복 이백여 제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장운대 수련장을 빠져 나왔다.
가파른 길을 따라 길 아닌 길을 넘고, 보법을 펼친다.
워낙에나 험한 산길이라, 경신술의 숙달 없이는 함부로 다닐 수 없다. 어린 보무 제자들이라고 특별히 챙겨주는 것은 없었으니, 굉장히 엄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련방식이 된다.
구결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면, 낙오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보무 제자들이 화영보의 구결을 되뇌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단 하나 청풍을 제외하고는.
‘더 진중하게. 마음을 조급하게 갖지 말고.’
청풍은 화영보의 구결을 따르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하진기 뿐이다.
화영보와 비슷한 동작을 쓰고 있기는 하다. 다른 이들 사이에서 굳이 눈에 띌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청풍이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하진기의 운용에 의해서다. 진기의 흐름 대로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자신만의 세계에만 빠져들어 있는 것이었다.
탁, 타탁.
“거기 조심! 가파르다.”
앞과 뒤에는 각각 매화검수들이 하나씩 따라붙어 있다.
청량한 목소리. 한 매화 검수가 이백 제자 모두에게 들릴 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폭을 작게 해라. 구결 암송을 잊지 마.”
그들의 역할은 보무제자들의 인솔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인솔 뿐 아니라, 경신술 수련의 사범 역할도 겸하는 것.
특히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보면, 보법 활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고, 전체 일행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매화 검수는 다른 것 같다.’
요즘 들어 특히 느끼는 바다.
자하진기가 이단공의 막바지에 이르러 감각이 예민해진 점도 있겠지만, 그렇게 진기로서 느끼는 것 이외에도 매화검수들에겐 확실히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는 특질이 있었다.
잘 벼려진 명검(名劍)과도 같은 기도다.
이십 대 정도의 후기지수들, 기껏 십년, 또는 십 수년의 차이밖에 없음에도 어떻게 그렇게 고강한 기운을 발할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자하진기를 얼마나 더 익혀야 저 수준에 이를 수 있을까?’
한참 걸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자하진기가 최고라는 사부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겠지만, 문제는 청풍 자신이 느끼는 스스로의 자질이다. 스스로 천부적인 무재(武才)라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하진기 하나만을 익히기에도 벅찬 마당이다.
워낙에 화형권, 육합검의 투로를 등한시 한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또래의 제자들과 화형권, 육합검 비무를 할 때면 겨우 겨우 패배만을 면할 뿐,·통쾌하게 이겨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직 멀었나보다. 나는.......’
흔들리는 눈빛에 안타까움이 묻어 나온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청풍은 자하진기를 모른다.
제 단전 안에 축기를 이루고 있는 진기의 수준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자하진기는 신공(神功)이다.
신공에는 신공에 어울리는 비기(秘技)가 필요하다.
진기를 활용할 수 있는 무공만 제대로 익힌다면, 다른 보무제자들은 결코 청풍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가르치는 무공들이 문제인 것이다. 비형권이나 화형권 정도로는 안 된다.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 상승 요결을 끌어낼 수 있는 청풍이었지만, 그것으로는 진신 내공을 끌어낼만한 진결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뭐, 늦으면 어때. 언제든 될 수 있겠지.’
몇 걸음 더 가파른 산길을 타 내리는 사이, 청풍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달리 했다. 조급함을 떨쳐버린 맑은 눈에 더 이상 실망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공은.......경쟁하기 위해 익히는 것이 아니니까.’
낙천적인 성격이다.
이 역시 자하진기와 함께 사부님이 남겨준 것, 천성적으로 선한 심성에 더해진 또 하나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휘이이이잉.
주홍색 바위를 타고 부는 바람이 황석곡에 거의 다 이르렀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조금 더 가자 조그만 정자 하나가 보인다.
적색 기와, 분홍 장식이 조화로운 색조를 띄고 있는 매화정(梅花亭)이었다.
황석곡 측면 능선에 위치한 매화정은 화산의 장중함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지다.
하늘 높이 솟은 연화봉과 운대봉을 한눈에 담아둘 수 있는 곳, 쉬어가는 구름이 머무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다시 정렬하라. 여기까지는 갑조. 여기까지는 을조. 저번에 나누었던 방식대로 움직인다.”
매화정을 기점으로 이백여 제자들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 황석곡으로 들어간다. 어린 제자들은 덜 위험한 동쪽 진입로로, 십 오세 이상의 제자들은 북쪽 진입로로 이동해야 했다.
처처처척.
금새 대열을 갖춘 제자들, 생활로 익숙해진 엄정함이었다.
“유 사형, 오랜만이네요.”
매화정을 지나치려니,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있다. 뜻밖의 일.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소녀가 거기에 있었다.
“연 사매. 오랜만이다. 언제 올라왔느냐.”
연 사매라 불린 이. 매화정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는 여인임에도 무척이나 큰 키를 지녔다. 늘씬한 체구에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니, 그 모습 가히 선녀에 비길 정도라, 그녀를 보는 보무제자들의 눈이 모두 다 휘둥그레졌다.
“어젯 밤에요. 보무제자들인가요?”
“그래.”
“수고 하셔야겠네요. 보무제자들도, 모두들 고생이군요.”
스스로의 위치에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성정을 지녔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보무제자들을 향하여 웃 음짓는 그녀다.
가파른 산을 탄 제자들의 피로를 한 번에 앗아갈 만큼 시원한 미소였다.
연선하. 매화검수다.
방년 이십 오세, 오년 전 이십 세의 나이에 소요관을 통과한 여걸이었다.
이제 겨우 입문한 제자들이야 모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무제자들이 그녀를 안다.
워낙에 유명하니까.
잘 알고 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천재 여협, 아기자기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고도 맑은 눈을 지닌, 대단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검수였다.
“왠 여자 아이냐?”
“하하, 딸 하나 낳았어요.”
약간은 산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성격을 지녔다.
그 모습에서 섬서성을 떨쳐 울리는 천류검의 달인, 천류여협의 명성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멋진 여자였다.
“........그 괴이한 농담은 여전하구나. 상원진인께서 들으셨다가는 징벌을 면치 못할 이야기다.”
“에그, 딱딱하기는. 유사형도 여전하네요 뭘. 이 아이는 그 산서신협 서자강 대협의 장중보옥이죠. 인사드려라. 얘야.”
열 두세 살 정도의 귀여운 여자아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수줍어하는 기색은 찾아 볼 수 없다. 도리어 한 발 나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서영령이라고 해요.”
맑은 목소리다.
아직은 어리디 어린 소녀지만, 그 얼굴에서 앞으로 대단한 미인이 될 조짐을 볼 수 있었다. 매화검수의 정기어린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태도하며, 움츠러들지 않는 대담한 모습이 또 한 명의 여협 탄생을 예고하는 듯 했다.
“나는 매화검수 유자서다. 대협을 닮은 듯 대단한 기질이 ,보이는구나.”
“감사합니다.”
서영령이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옆에서 서영령의 어깨를 감싸 안은 연선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귀엽죠? 나도 나중에 딸이나 낳을까 봐요.”
“누가 너를 데려가겠느냐. 걱정이다.”
“어머, 농담도 할 줄 아네요. 기억해 두겠어요. 서자강 대협은 지금, 장문인을 뵙고 있을 거구요. 아이는 화산 구경이나 시켜줄 겸, 데리고 나온 거죠.”
“그렇구나. 서 대협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다더냐.”
“잘은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경우, 저번 강호행 때, 우연히 친분을 쌓을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이번에 들어오면서 만나게 되었어요. 서 대협 말씀으로는 그냥, 화산파가 어떤지 궁금해서 왔다 하시대요. 영령의 말벗이나 되어 달라고 부탁하시던데........뭐, 달리 말하자면 놀러온 거라 할 수 있대요.”
“그러냐.”
유자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산서신협만한 고수가 아무런 목적 없이 놀러 온다? 화산파에? 모르는 일이다.
산서신협은 그 무공이 화경에 이른 절정 고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근본 내력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직접 그 무공을 견식해본 사람조차 드물어, 출신 문파, 뒷 배경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경계를 해 볼만한 이라 할 수 있다.
경각심을 일으키던 유자서의 시선이 서영령에 닿았다.
뭐가 어찌되었든 산서신협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온 것은 아닐 것 같기는 하다.
순진한 눈빛의 서영령.
어린 딸이 여기에 있다.
화산파 제자들이 어떤 이들인지 궁금했던 듯, 보무제자들을 하나 하나 찬찬히 훑어보고 있는 서영령이다.
문제를 일으킬 요량이었으면, 이처럼 어린 딸을 동행하고 이곳에 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럼 가 봐야 되겠다. 간만에 보니 반갑구나. 가끔 본산에도 올라오고 그러거라.”
“알았어요.”
매화검수 유자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재빨리 대열을 수습하고 보무제자를 이끈다. 저녁까지 목표량을 채우고, 장운대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나 촉박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썰물처럼 이동해 버린 후.
서영령이 연선하를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있잖아. 화산파 제자들 중에도 굉장히 잘 생긴 사람이 있네.”
“누가? 유 사형? 설마.”
“당연히 아니지. 중간쯤에 있던 제자 말야.”
“그래? 누굴 말하는 거지?”
“못 봤어? 눈에 띄던데. 그런 미남은 흔치 않아. 나이가 들면 더 멋있어 질걸?”
“아이고. 못 말린다. 너 몇 살이니? 벌써부터 남자 이야기를 하고.”
“왜 어때서?”
“말을 말아야지.”
“뭐, 언니 눈에는 무공 강한 사람밖에 안 보일테니까.”
“점점.......대체 누가, 얼마나 잘 생겼길래 그래?”
“나중에 한 번 알아봐. 언니. 아마 여기 여제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할걸?”
“내 참. 여기 제자들이 뭐 그런 것 신경 쓸 것 같니?”
“신경 쓸걸? 언니랑은 다르잖아. 언니는 천재고. 다른 언니들은 천재가 아니니까.”
“벌써부터 이렇게 여우같아가지고, 나중엔 얼마나 속을 썩이련지.”
“언니, 정말 알아보고, 꼭 가르쳐 줘야 돼? 이름이 뭔지 말야.”
“알았다. 알았어. 이 꼬맹아.”
어느 봄 날의 매화정이다.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다.
하늘은 그 수레바퀴를 천천히, 그리고 단호하게 굴려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 었다.
경석은 악기를 만들 때 쓰는 돌이다.
두 개의 돌을 마주쳐 보았을 때, 소리가 가볍고 맑게 울려야 진짜였다.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는 돌들은 아무리 모아도 쓸모가 없었다.
경석을 모으는 작업은 반나절에 걸쳐 진행된다.
반 나절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황석곡에 널려 있는 돌맹이들 사이사이, 한 발작을 움직일 때도 화영보에 의해 움직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제대로만 한다면 분명 좋은 수련방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보무제자들이나 그들을 감독하는 매화검수들이나 그런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매화검수 한 명이 인솔하는 제자들만 백 명.
매화검수들이 그들을 일일이 봐 줄 수는 없다.
스스로 열심인 제자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수련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는 것이다.
특히나 청풍은 처음부터 화영보의 연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무엇을 배우든, 따르는 시늉만을 한다. 내면에서는 온전히 그 혼자서 쓰는 시간이었다.
간간히 떠오르는 약간의 상념들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자하진기 연마에 전념한다.
‘매화검수.......여자인데도 그렇게 대단하다니.’
지금은 잠시의 휴식, 상념의 시간이다.
매화검수 연선하의 모습.
연약한 이들. 여인은 보호해야 할 존재. 사부님께 배웠던 것인데, 그가 본 연선하는 그 가르침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딱, 따악, 딱.
‘너무 시끄럽구나. 청각을 줄이자. 여긴.......안 좋아. 생각하기에도, 수련하기에도.’
돌을 맞부딪치는 소리가 석벽을 울리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안 좋은 돌을 걸러내기 위해 모두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집중하자. 거의 되었어. 이제 거의 안 들린다.’
오감을 통제하는 청풍이다. 오감을 각각 따로. 청력을 최소한으로 줄여 소음을 막아내고 있었다.
‘훨씬 났구나.’
골몰히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경석들을 골라내며 작업을 멈추지 않는 상태다.
장운대에서 무공을 배울 때와 같다.
겉으로는 마치 육합검을 펼치는 것 같아도, 내부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이 일어난다.
바깥과 안이 다른 것.
그것이 가능한 것은 자하진기 덕분이다.
오감과 정신의 분리였다.
청각을 막아 놓았어도, 몸은 듣고 있다. 보통 기이한 일이 아니었지만, 정작 청풍은 그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모른다. 신비함을 일상으로 만드는 것. 자하진기의 공능이었다.
‘여자.......매화검수.......뭐 매화검수니까 그럴 수 있겠지.’
원래 하던 생각으로 돌아간 청풍이다.
여인이라도, 강할 수 있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헌데........그 여자 아이는 뭘까. 그렇게 어린데도, 내력이 상당한 것 같았는데.......’
연선하의 옆에 있던 서영령을 떠올렸다.
작고, 어리지만 자유분방한 생기(生氣)가 기억에 남는다. 서영령은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다. 미묘한 차이. 청풍은 그런 것도 분간해 낼 수 있었다.
‘세상은 정말 넓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확실히, 운대관 시험을 보기는 해야겠다.’
선검수가 되어도 넘어야할 관문이 많다.
천화관을 통과하여 평검수가 되어야 비로소 강호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 면에서는 보무제자가 선검수보다 더 자유로울지 모른다.
보무제자에게는 화산파의 진산 무공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입문에서 하산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선검수는 처음으로 상승 무공을 접하는 위치라 강호행에 큰 제약을 받게 된다. 혼자서는 절대 산 밑으로 내려갈 수 없다. 무공 유출도 유출이지만, 다른 위험도 많기 때문이었다.
강호행에 제약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보무제자들 보다 훨씬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선검수다. 적어도 이런 쓸데없는 노동에는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선검수가 되어서 배우는 무공들에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 더 나아갈 수 있는 길.’
운대관 시험을 고려하게 된 청풍이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었다.
선검수가 되어도 해답은 없다.
오행기와 구소공, 암향표, 천류검, 태을검에는 그가 구하는 진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기(氣)는 느끼고자 하는 사람,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힘을 빌려준다.
준비가 안 되었을 뿐.
그저 청풍은 그 해답이 자신의 안에 이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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