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청풍(靑風) 3

조회수 16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8.19
3화. 청풍(靑風) 3


‘전신으로 풍부하게 기를 내 보낸다. 세맥까지 어루만지고, 자연스럽게 내 쉰다.’
가부좌를 틀 필요조차 없다.
모든 움직임이 곧, 내공 수련이다.
복잡한 구결보다, 자연기(自然氣)의 포용에 역점을 둔다.
‘그렇지. 그렇게.’
자하진기 이단공에 접어들면서 가장 먼저 생긴 변화는 기억력의 증대였다.
스쳐지나가듯 들었던 사부님의 가르침들이 환청처럼 들려와 그의 운기(運氣)를 도와주고 있다.
‘아니지. 조금 더 천천히. 그래, 거기에서 풀어주는 것이야.’
사부님.
어쩔 때는 정말로 곁에서 그를 이끌어 주고 계시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구소공은 육합이야. 오행기는 말 그대로 오행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이지. 자하진기는 육합도, 오행도, 사상도 아니란다. 자하진기는 음양이야. 음과 양의 이치를 따르면서도 둘을 따로 생각하지 않지. 자하(紫霞)는 곧 노을의 색깔이고, 새벽의 색깔이니까.......음과 양이 교차되는 순간이라 만유의 기운을 모두 품고 있어. 지금까지 있었던 화산파의 심법과는 틀리지. 때문에 이 사부를 좋아하지 않는 장로들도 많단다. 하지만 이 사부는 믿는다. 자하진기는 최고야. 큰 일을 이룰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사부님, 저도 믿어요.’
살아생전 사부님의 앞에서도 그랬듯이, 마음으로 대답하는 청풍이다. 일심으로 연련을 계속하는 그에게는 지속되는 발전과 힘의 축적이 함께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 중, 하단전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온 몸을 하나의 그릇으로 생각하거라. 몸 안의 우주(宇宙)를 느끼고, 스스로 흐르는 것을 거스르지 않는 거야.’
계절이 바뀌며 몇 벌 없는 도복의 두께가 달라질 때, 깊어진 자하진기는 또 한번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안법(眼法)을 따로 익히지 않았음에도 사물을 보는 눈이 무척이나 밝아졌다.
장운대 무관에서 배우는 화형권과 육합권의 투로가 훤하게 읽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초식이 복잡하지 않는 단순한 무공들.
가장 말단 제자들이 익히는 화형권과 육합검도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절기가 될 수 있다.
다만 보무제자들에게는 기본공을 절공으로 바꾸어 주는 상승 요결들을 가르쳐주지 않을 뿐이다. 화형권 육합권만이 아니다. 처음으로 배우는 비형권이나 이형권 역시 핵심되는 정수를 얻을 수 있다면 뛰어난 무공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거기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었구나!’
청풍은 이제 그러한 상승 요결들을 볼 수 있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권형과 검형 속에서 잡아낼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눈을 확신할 수 있는가이다.
절대 다수의 보무제자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홀로 보고 있으니, 스스로의 깨달음이 옳은 것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수련 사부께 여쭈어 보기에는 왠지 꺼려지는 바가 있다.
수련 사부에게 묻는 것은 어딘지, 스스로가 자하진기의 공능을 의심한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단공에 이르면 비로소 무공이 무엇인지 볼 수 있을 것이란다. 단순한 투로가 아니라 그 실체가 보인단 말이야.’
‘눈에 담아 둘게요. 제 눈을 믿어야죠. 기(氣)는 강한 믿음에서 연공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눈이 트이는 것에 이어, 청력, 미각, 후각, 촉각, 오감(五感)이 발달하였고, 특별한 수련을 하지 않음에도 근력과 유연성이 증대되었다.
십 사세, 한참 성장하고 있을 나이.
커가면서 이상적인 근골이 될 수 있도록, 자하진기가 그의 몸을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취운암에서 나와 주어야 되겠다. 이제 와서 정진암 숙소로 들어가기도 내키지 않을 터이니, 서벽의 풍암당(風庵堂)을 내어 주마.”
사부님과의 거처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풍암당은 멀다.
장운대에서 무공들을 배우고, 오일에 한 번 씩, 노부암 학연당(學硏堂)에서 학문을 습득하기 위해 오가려면 봉우리 두개와 오리에 걸친 긴 능선을 지나쳐야 된다.
“예. 알겠습니다.”
청풍은 일언반구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쉽게 하지 못하는 편인데다가, 거처를 옮기는 것도 기실, 별반 대단할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어차피, 사부님도 안 계신 곳이니까.
이 순간의 청풍.
어린 시절 모두를 그곳에서 보냈지만, 그것을 깊은 추억으로 받아들이기엔 아직은 어린 나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직도, 다른 장로를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게냐?”
“예.”
“진심으로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어서 운대관에나 응시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 역시 약초 채집과 부옥 수집에 참가해야만 한다. 규율이기 때문이다. 일년 가까이 규율을 어기며 배려를 해 주었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알았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그다지 운대관, 서검수에는 미련이 없었다.
차라리 풍암당 먼 곳으로 가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거기서 라면 더욱 더 자하진기에 전념할 수 있으니까. 기실, 취운암은 장운대와 너무 가깝고,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 집중에 방해되는 바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무공 수련에 별반 의욕이 없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검문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할 바에는 도문(道門)에 몸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다. 사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성심껏 수련하는 제자들의 분위기는 망치지 않았으면 싶다.”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절도와 극기를 강조하는 정원진인이다.
상처받을 만도 한 이야기였지만 청풍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착하고 순하지만 그렇다고 나약한 심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까지 풍암당으로 가겠습니다.”
절도있게 포권을 취한 청풍을 보며, 정원진인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들어 답례하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역시나 화산파다.
지금까지 취운암에서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감지덕지하라는 듯한 느낌.
확고하게 잡혀있는 원칙대로 움직이는 내사(內事)에는 최소한의 예외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도 아쉽기는 한가 봐요. 사부님.’
취운암.
연화봉 기상 높은 바위들 밑으로 매화가지 세 줄기 늘어뜨린 곳.
기억나는 모든 시간들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청풍은 마음을 다 잡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자하진기를 남겼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사부님과 함께 있다.
장소 따윈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음 날 풍암당으로 향하는 청풍의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물은 왜일까.
생각과 감정. 항상 같이 움직일 수는 없는 이치에, 소년 청풍은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넘기며 새로운 곳,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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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가 가장 괜찮은 것 같아?”
“글쎄. 하운 사형도 괜찮고, 동한 사형도 좋고.”
“동한 사형은 너무 냉담해서 싫어. 게다가 본산제자고........”
“나랑은 다르네.”
“성일 사형은 어때?”
“글쎄. 성일 사형은 아직 선검수지 않어?”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매화검수쯤 되면 이미 사람이 아니잖아.......종일 무공에만 매달리고.......”
“하긴.......역시 그러면 매사형인가?”
“매사형 정도면 최고지. 하지만 매 사형도 곧 매화검수가 되어 버릴걸? 본산제자도 아니면서......곧 소요관에 도전한대.”
“매 사형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우리보다 한 살 많아. 열 일곱이라고 들었어.”
“근데 벌써 매화검수라고? 속가면서? 너무한 것 아냐?”
“게다가 얼굴도 잘 생겼잖아. 본산제자처럼 투박하지도 않고 말이지. 진이가 그러는데, 품행도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대.”
“심하다.......추영 언니 쯤은 되야 바라 볼 수 있겠네.”
“얘는........추영 언니가 어디 그런 데 신경 쓸 사람이니?”
“그렇긴 해.”
“아휴........운대관도 그렇게 어려웠는데, 우리는 언제나 천화관에 도전할 수 있지? 매 사형이나 하운 사형이나, 벌써 저만큼 멀리 가 버리고.......”
“모르지. 추영언니가 옥녀검법 펼치는 것 본 적 있는데, 우리랑은 너무 너무 다르더라.”
“나도 봤어. 정말........아휴.........”
“아! 그런데 말야. 너 그 이야기 들었니? 그렇게 잘 생긴 애가 하나 있다던데.”
“그래? 또 누가?”
“청풍인가.......평검수 언니들 사이에선 유명해. 우리들 선검수까지는 남자 제자들이 있는 장운대나 옥천각 근처엔 얼씬도 못하니까. 본 언니들 말로는 정말, 굉장히 잘 생겼대. 눈에 확 띌 정도라던데?”
“그 정도야?”
“근데 말이지. 걔 말야. 아직 보무제자래. 열 여섯인데.”
“뭘 아직이니? 우리랑 같은 나이잖아. 우리도 운대관 통과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뭘.”
“아니야. 걔 있잖아. 원래 장로님 직전이었대. 보통 장로님들 직전이면, 최소한 작년에는 선검수까지 올라갔어야 하잖아.”
“고작 일년 가지고.......”
“어머, 일년이면 얼마나 큰데. 다른 장로님들 직전 중에 열 여섯까지 보무제자인 애들은 아무도 없어. 물론 좀 문제가 있기는 하다지만.”
“문제? 아, 혹시 걔가 그, 돌아가신 선현장로님 제자였니? 그, 다른 사부님들 모시는 것 전부 거절했다던.......”
“그 애 맞아, 들어 본 적 있지?”
“잘생겼다는 건 몰랐어. 그 애가 그 애 였구나.”
“음.......근데 말야.......잘 생긴 것은 언니들이 다 그러니까 그렇다해도, 걔 좀 이상한 것 갖지 않니? 그 때부터 생각했었는데.......직전 제자 자리도 거절해 버리고.”
“모르지. 그거야. 뭐.......나름대로 낭만적이지 않아? 옛 사부님을 잊지 못해서 다른 사부는 못 모시는 어린 제자, 그런 거.”
“어머, 어머. 설마 정말 그럴라구......혹시........실상은 다른 장로님들이 모두 안 받아 주려 했다거나 그런 것 아니겠어?”
“에이. 너무 불쌍하게 보는 것 아냐?”
“그럴 만도 하지. 그 선현 장로님도 장로님들 사이에선 그렇게 인정받는 분이 아니셨다는데 뭘. 그 제자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쩜.......얄밉기는.......니가 더 심하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그런 것 가지고 눈을 흘기고 그러니?”
“화내지 마. 화산파 계율 십 이계. 화산파 제자들은.”
“동문끼리 다투지 않는다. 알아. 알았어. 요것아. 그나저나 어떤 애인지 되게 궁금하다. 얘.”
“그러게. 걔 얼굴 보기 위해서라도, 얼른 천화관 시험을 통과해야 되겠다.”
“맞아. 매 사형 얼굴도 보고 말이지.”
끝에는 서로 손을 부여잡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여제자들이다.
화산파의 여제자 수는 전체 남자 제자들의 십 분지 일 정도. 숫자는 적다지만 그 중 매화검수까지 올라가는 제자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현 이십사 명 매화검수들 중에도 여 제자가 네 명이나 있으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여제자들이 태생부터 무가(武家)의 여식이거나, 화산 속가제자들의 여식들이었니 기초가 탄탄하는 점.
어차피 매화검수는 후기지수 때나 받는 호칭, 어린 시절의 수련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화산의 무공 자체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화산파의 검법이 날카로움에 정교함을 중시하는 무공이라 다른 문파의 무공들에 비하여 여인들이 익히기에 유리한 면이 있었다.
화산파의 여제자들.
엄격한 규율과 관리 속에서, 생활하는 그녀들이다. 하지만 십대 소녀들의 마음이란 어떤 곳에서 무엇을 배우든 비슷한 모양이었다.
남자 제자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뛰어난 사형제들에 대한 동경.
그런 여제자들 한 켠에서 나름대로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청풍이다.
하지만, 십 육세 청풍이 지닌 것은 그 돋보이는 외모뿐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까지 그녀들, 아니, 화산에 있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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