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불면증
부정 증후군
2. 불면증
사실 키스를 해 본 적이 없다.
사실- 이라고 할 것 까지도 없다, 사실. 누가 전교 1등 왕재수 범생이 또라이 장예영이 키스를 해 본 적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할까. 본인이 해 본 적 있다구! 라고 크게 떠들고 다녀도 아무도 안 믿어 줄 것이다. 비웃음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정말로 떠들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퍽퍽, 예영은 연거푸 책상에 머리를 부딪었다. 이마가 아프기만 하지 집중이 되지는 않는다.
예영은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참고서를 휙휙 구기면서 넘겼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
1교시가 다 끝나 가도록 마음이 진정을 찾지 못한다.
분명 박은준은 키스 정도는 몇십 번도 넘게 해 봤을 것이다. 저 얼굴에 저 키에 성적에, 남녀 공학이었던 중학교
때부터 여자애들 사이에서 시끄러웠던 놈이다. 그때는 전교 2등까지는 하지 못했었지만.
생각이 ‘전교 2등’에 와 닿자 비로소 예영의 머리는 조금 냉정을 되찾았다. 같은 중학교를 다녔지만 은준의 이름
외엔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온 후 네 번 연거푸 예영의 이름 아래에 놓인 그
이름을 신경 쓰기 전까지는, 박은준은 예영과 전혀 상관 없는 놈이었다. 전교 2등이 되기 전까지는.
그런 은준과 두 번이나 키스를 한 (정확히는 당한)사이가 되다니 인생은 살아 봐야 아는 것이다.
생각이 한 바퀴 돌아서 키스로 돌아오자 다시 예영의 심박수가 불규칙해졌다. 몇 십 번이 아니라 몇백 번은 해 봤겠지.
그게 아니면 그렇게 잘 할 리가 없다. ...잘 한다고 해 봤자 비교할 경험도 없는 예영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있어?”
갑자기 예영의 귀 바로 옆에서 능청맞은 은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영이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는 바람에
참고서가 책상 밖으로 날아갔다.
“으앗!!”
예영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책상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참고서를 향해 양 팔을 뻗었다. 참고서
귀퉁이가 우그러지면서 간신히 예영의 손끝에 걸렸다.
“뭘 그렇게 놀라? 매점 가자.”
참고서를 품에 안고 숨을 고르는 예영은 아랑곳 없이 은준이 제안해 왔다. 마치 몇 년 된 친구같은 초연한 말투였다.
예영은 참고서를 일부러 쾅 소리나게 책상에 내려놓은 후 은준을 노려보며 외쳤다.
“너는 일 교시부터 매점이야?”
아, 뭔가 말의 순서를 잘못 고른 듯한 느낌- 이라고 예영이 깨달은 건 애석하게도 다음 순간이었다.
은준이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영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 특유의 능글대는 비웃음 이라기에는 살짝
퀭해진 눈꼬리에 웃음이 묻어나는 것이 의외로 느낌이 좋았다.
“뭐냐, 바가지 긁기?”
은준의 상상을 초월하는 단어 선택에 예영의 입이 뭐라고 말을 내 뱉기도 전에 벌어진 채로 그대로 딱 멈춰버렸다.
바, 바...뭐를 긁어?
“성장기에는 많이 먹어야 키도 크고 힘도 잘 쓰지. 얼렁 따라오기나 해, 사 줄 테니까.”
여전히 예영의 반응에는 눈꼽만치도 신경을 쓰지 않는 은준이 벌떡 일어서더니 예영의 손목을 낛아채듯 끌고 성큼성큼
교실을 나섰다.
“야 이거 안놔? 너 미친 거 아냐?”
예영은 은준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거의 질질 끌리다시피 복도를 걸었다. 아무리 발악을 해도 은준은 빙글대는 얼굴로
예영을 힐끔 쳐다보고는 계속 매점으로 향할 뿐이다. 은준의 손에 꽉 붙잡힌 손목이 시큰해져 왔다. 참다 못한 예영이
다리로 은준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아.”
은준의 낮은 비명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프니까 이것 좀 놔! 내 발로 걸어가면 될 거 아냐!”
“알았어, 아 자식..아파 죽겠네, 으으.”
은준은 예영의 생각보다 순순히 손목을 놔 주고는 과장스럽게 자기 정강이를 주물러 대었다.
예영은 얼얼한 손목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꽉 잡혔던 손목이 손자국대로 시뻘개져 있었다.
어느 새 곁으로 다가온 은준이 고개를 디밀고 씩씩대는 예영과 벌개진 손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확실히 너무 세게 잡았네.”
“알긴 아냐?”
신경질을 팩 부리는 예영을 여전히 눈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빤히 바라보던 은준이, 갑자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무 말랐다, 너.”
이건 또 뭔 소리야, 갑자기. 은준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존심이 상한 예영은 시큰댐이 가시지 않는 손목을 붙잡고
은준을 노려보았다. 그런 예영을 웃음띤 눈으로 마주 바라보아 오던 은준의 큰 손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천천히 가볍게, 부드럽게 예영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을 잡고 있던 예영의 손가락들 위로 은준의 큰 손이 감싸듯이 덮여 왔다. 뭐, 뭐야. 순식간에 앙칼짐이 가시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린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예영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마, 마르긴 뭐가 말라. 재수없어.”
“쯧쯧. 손목이 완전히 한 손아귀에 들어오네. 허리도 그렇고, 밥은 먹고 다니냐?”
밥은 먹고 다니냐니, 지가 무슨 송강호냐. 예영은 멍하니 한 손으로 수월하게 예영의 손과 손목을 한꺼번에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예영의 앞 머리를 쓸어 올리는 은준을 바라보았다.
박은준의 대화 방식은 정말이지 뻔뻔하다.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멋대로 말을 걸어오고, 대답이 없어도 굴하지 않고,
부딪혀 오는 스킨쉽은 특별한 의도를 깨달을 틈도 주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사이였던 양,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운 눈빛으로.
예영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 끝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졌다. 목 뒤쪽이 근질근질해져 왔다.
그 느낌을 참을 수가 없어져서 예영은 고개를 휘둘러 은준의 손을 떨어내며 주눅든 목소리로 되물었다.
“...근데, 내 허리가 마른 줄 니가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하냐?”
“어떻게 아냐니, 안아 봤으니까 알지.”
은준은 되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예영을 바라보았다.
우와아으아아아아으아!!! 예영은 그대로 굳어진 채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뒤늦게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이 마구
느껴진다. 은준은 키득키득 소리내어 웃으면서 예영의 시뻘개진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화끈대는 느낌이 온
몸으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예영은 은준에게 잡힌 손목을 마구 휘둘러 털어내며 더듬대는 말투로 소리를 질렀다.
“지, 징그러운 새끼! 변태 새끼!”
“알았으니까 어서 가던 길이나 가자. 종 치겠어.”
결국 하룻동안 매점 세 번, 점심 도시락에 저녁까지 평소의 세 배는 되는 식사를 해 버렸다.
그것도 죄다 박은준과 함께. 간밤의 수면 부족에 박은준과 함께라는 압박감이 겹쳐져서 먹은 게 얹힐 지경이었다.
“장예진, 소화제 없냐.”
결국 예영은 배를 붙잡은 채 동생 방 문을 열어젖혔다. 책상 스탠드를 켜 놓은 채 침대에 드러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던 예진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인간아, 엄만 줄 알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만화책을 침대 뒤 구석으로 집어던진 예진이 안경을 고쳐 쓰며 앙칼지게 화를 냈다.
“소화제를 왜 나한테 와서 찾아, 부엌에서 찾아야지.”
“그래..부엌.”
“잠깐, 장예영.”
별로 댓거리도 하지 않고 구부정한 허리로 방을 나서는 예영을 빤히 바라보던 예진이 5분 차이의 오빠를 불러 세웠다.
“...왜.”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잠을 설쳐서 그래. 속도 안 좋고.”
“왜.”
침대 위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은 예진이 안경 너머에서 눈을 짐짓 날카롭게 빛냈다. 방금 전까지는 오빠 앞에서
벌러덩 누워서 수상한 빨간 띠 둘러진 만화책을 보던 게...하지만 예영이 죽어도 거짓말은 할 수 없는 세상 유일한
상대는 바로 뱃속에서부터 함께 자라난 쌍둥이 여동생, 장예진이다.
“...맘에 안 드는 놈이 있어서.”
“그렇다고 잠을 설쳐?”
오빠 맘에 드는 놈이 어디 있었다고, 라고 바로 말을 이을 것 같은 눈빛으로 예진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쿡 하고
갑자기 위장 한쪽이 쑤셔왔다.
“...안 되겠다. 나 약 먹고 잔다.”
더욱 구부정한 허리로 방을 나서는 예영의 등에 여동생의 나지막한 말이 와 박혔다.
“수면제 필요하면 이따가 나 찾아.”
채깍 채깍 하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예영은 훼스탈 네 알로 가까스로 진정된 배를 누르고 멍하니 눈을 뜬 채
천정을 바라보았다.
문득 손을 뻗어 알람으로 쓰는 핸드폰 폴더를 보았다. AM 4:45. 학교 갈 시간까지 앞으로 겨우 두 시간 남았다.
어제 일 분도 자지 못 했는데도 눈이 말똥말똥했다.
핸드폰을 든 오른쪽 손목이 얼핏 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무식한 새끼.”
예영은 손목을 주무르며 나지막하게 아무도 듣지 못할 욕을 내뱉었다.
아플 정도로 나꿔채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드럽게 잡아 오던 손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자동적으로 허리 운운하던 능글대는 얼굴이 따라 떠오른다. 그리고 거기에 또 연상작용되는 어제, 아니 그저께의 키스.
허리로 단단히 감겨드는 팔과 목덜미를 느릿하게 쓰다듬는 손가락, 완전히 굳어 있는 입술 위를 연거푸 핥는 혀의
뜨겁고 생경한 감촉이 되살아왔다. 아무리 핥고 빨아도 반응 없는 예영의 입술이 마침내 호흡이 부족해져서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온 그 혀 때문에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풀려서 마침내 다리에 힘이 빠져
버렸던 것도.
순간 아무도 없는 자기 방 안이라는 사실도 순간 잊혀지고, 예영은 확 붉어진 얼굴 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영화에서나 봤던 진한 키스를 그렇게 능숙하게 하는 고등학생이라니.
..그것도 동성의 동급생 상대로.
입술이 다시 근질근질해져 왔다. 반사적으로 손등으로 입술을 마구 비벼대었다. 정말로 피가 날 정도로.
“장예영, 안색이 장난 아닌데? 어디 아파?”
하루만에 눈 밑의 검은 기가 싹 사라진, 언제나와 다름없이 건강만점 능글능글한 얼굴로 은준이 걱정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틀 연속으로 잠을 설친 예영의 얼굴은 초췌 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꼴을 하고 있었다.
“니가 알 바 아냐.”
대꾸하는 예영의 목소리에는 눈에 띄는 피로가 묻어났다. 은준은 속으로 혀를 차며 예영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치켜들었다. 의외로 얌전히 있는 예영의 흰 얼굴이 잠을 설쳐서 노랗게 거칠해졌다.
게다가 새벽에 마구 문질러 댄 탓에 아랫입술 끝이 갈라 터져 피가 맺혀 있었다. 은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꼴이 왜 이래?”
예영은 고개를 돌리고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목소리도 반쯤 쉬어 있었다.
“잠을 못 자서.”
“잠을 왜 못 자? 시험기간도 아니잖아.”
시험기간..예영은 수면부족으로 멍한 머릿속으로도 발끈해서 은준을 노려보았다. 망할 자식이 말 하는것마다
이쁘기도 하다.
“시험기간에만 잠 설치냐? 니가 알 바 아니니까 제발 신경 꺼!”
누구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말이다. 예영은 허공에 손가락을 멈춘 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은준을 퀭하니
들어간 눈으로 노려보다가, 털썩 책상 위에 엎드렸다. 고개 꼿꼿이 들고 있을 힘도 없는데 화까지 내려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양호실 갈까?”
은준의 엎드린 예영의 귀 바로 옆에 고개를 숙이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영의 머리가 마구 좌우로 흔들렸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 소리와 함께, 은준의 큰 손이 예영의 머리를 강아지 머리 만지듯 살짝 거칠게 헤집어 놓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예영은 점심시간까지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4교시 내내 무슨 수업이 있었고 뭘 배웠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뿌옇다. 엎드려서 자려고 노력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점심 시간의 소음이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희미하다. 멍하니 공책이 펼쳐져 있는 책상 위를 바라보던
예영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아니나 다를까 도시락 통을 들고 예영 자리로 오던 은준이 부리나케 쫓아왔다. 부축하려는 듯 팔을 붙잡아 오는
손을 뿌리치고는 교실 밖으로 걸어나왔다. 시야가 안개낀 듯 뿌옇게 흐려졌다가 맑아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왜 걸어나온 거지? 확실히 밥 먹을 기분은 절대 나지 않지만.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라도 해야..그래 그러면 되겠다. 세수...
웬지 스텝이 엉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어?
뿌옇게 흐려진 회색 복도 바닥이 갑자기 확 밝아지면서 예영의 눈 앞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까맣게 끊겼다.
예영은 눈을 반짝 떴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백지 상태의 뇌로 들이닥쳤다.
“이제 정신이 좀 드냐?”
텅 빈 머리속을 두드려 깨우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 이어서 따스한 손이 이마로 와 닿았다.
언젠가처럼 익숙하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에 머릿속이 조금씩 깨어났다.
“...치워.”
머릿속이 깨어남과 동시에 예영은 손을 들어 은준의 손을 쳐냈다. 건조하고 따스한 손끝의 살갗의 느낌이 피부를
통해 유난하게 전해져 오는 느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예영은 은준이 어울리지 않게도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창 밖의 하늘은 이미 새카맣고, 보름이 다 되어가는 달이 하얗게 떠 있었다.
코 끝에 희미하게 소독약 냄새가 와 닿았다.
양호실이구나.
“양호실이야. 너 쓰러진 채로 계속 잤어. 지금 벌써 열 시 넘었다.”
“나도 알아.”
양호실이구나, 라고 깨달은 것과 동시에 은준이 말을 뱉어서 괜히 심술이 났다. 그리고 곧 머쓱해졌다.
“야자도 끝난 시간인데 이제 가야지. 데려다 줄게.”
은준이 살짝 예영의 팔을 잡았다.
“됐어.”
예영은 등을 돌린 채로 중얼거렸다. 필시 복도에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쓰러진 자신을 은준이 들쳐업거나 안거나
해서 양호실까지 옮겨다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누구 때문에 내가,”
누구 때문에 내가 이틀간 잠을 설친 건데, 라고 하마터면 끝까지 소리내서 중얼거릴 뻔 했다.
힉 하고 입을 닫은 예영의 등을 은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뭐?”
“아, 아니야, 됐어. 집에 갈래.”
은준은 갑자기 벌떡 상체를 일으킨 은준의 팔을 놓고 미간을 좁혔다. 신발을 신기 위해 침대 밖으로 다리를 늘어트리고
눈을 은준을 피해서 여기저기 굴리며 신발을 찾는 예영을 바라보던 은준이, 갑자기 비지직 웃음을 흘렸다.
“너, 설마.”
단 세 글자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영의 얼굴이 귀 근처까지 확 빨개졌다. 완전히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격이 따로
없다. 하지만 한 번 치솟은 맥박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붉어진 얼굴은 부채질을 하고 싶을 정도로 뜨끈뜨끈하다.
정신없이 신발을 찾아 허리를 구부려 침대 밑과 주변을 뒤지는 예영 앞으로 은준이 바짝 의자를 끌어당겼다.
“장예영.”
시, 시끄러! 예영은 코 앞에서 들려오는 은준의 목소리에 소스라쳤다.
“장예영. 나 때문에 잠 설쳤어?”
“무, 무슨 개소릴!”
“개소리라니. 방금 네 입으로 말해 놓고서는.”
은준은 빙글빙글이라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얼굴로 애써서 은준의 시선을 피하는 예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입으로는
온갖 쏘는 말들로 튕겨대면서, 정작 얼굴은 정 반대의 말만 하고 있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너 되게 귀여워. 그거 아냐?”
사내녀석에게 귀여워 운운하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은준은 빙글대지 않고 나직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은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옆 쪽만을 바라보고 있던 예영은 순간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예영 쪽을 눈 깜박거림도
없이 쭉 바라보는 은준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달빛이 밀려온 구름에 가려졌다. 은준이 천천히 양 손으로
예영의 늘상 위축되어 있는 어깨를 잡았다. 예영은 헤드라이트에 정면으로 마주친 고양이처럼 꼼짝 못 한 채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은준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반쯤 포기한, 아니 굳어진 예영이 세 번째로 당하는 키스인가, 라고 생각하자마자, 어깨를 잡은 은준의 양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를 떠밀린 예영은 어어 소리를 내며 그대로 양호실의 딱딱한 매트리스 위로 풀썩 넘어졌다.
어깨가 눌려 눕혀진 채 예영은 양호실 천장을 가린 은준의 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과 널찍한 어깨와 상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
뭐라고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달빛이 푸르스름하게 비추고 있는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이 복잡한 표정을
띄고 예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깨를 아플 정도로 내리누르고 있던 양 손 중 하나가 예영의 목줄기로 와 닿았다.
흠칫 예영의 어깨가 떨렸다. 손끝이 신중하게 예영의 창백한 목줄기를 타고 턱으로 올라와 피가 말라붙어 있는
아랫 입술을 매만졌다.
그만 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은준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 목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계속해서 은준의 손가락
끝이 만지고 있는 입술이 덜덜 떨릴 것만 같았다.
“어...저, 저기..”
예영은 간신히 입을 열고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은준의 손가락에 걸려 제대로 발음되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은준이 응? 이라고 되묻는 듯한 표정으로 예영을 내려다 보았다. 예영은 웬지 그 시선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뻣뻣해진 목을 힘겹게 가누어 고개를 옆 쪽으로 돌렸다.
그 동작이 실수였다-고 깨닫게 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예영은 히익 하고 마른 숨을 들이켰다. 푸르스름하게 핏줄이 드러난 예영의 목줄기 위에 뜨겁고 습한 입술이 와
닿았다. 일단 닿더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입술이 천천히 목을 훑어 올라가는 노골적인 느낌에 예영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확 끼쳤다.
“야, 야, 박은..”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버둥대려 했지만 이상하게 굳어버린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두 번째 키스했을 때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이번에는 허리께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힘이 죽 빠져나갔다. 목 여기저기에
닿아 오는 입술이 점점 더 열기를 띠고, 입술만큼 따스한 손바닥이 와이셔츠 너머로 갈비뼈 사이사이를 쓰다듬었다.
예영은 허리를 비틀어서 손길을 피하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쫓기는 듯한 급한 손놀림으로 와이셔츠 밑에서 확 파고
들어왔다.
“힉..”
결국 볼썽사나운 소리가 예영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맨 살갗을 어루만지는 손바닥의 뜨거운 느낌에 머리가
어찔어찔해져 왔다. 스스로 만져본 적도 별로 없는 몸이다. 척추를 타고 흐르던 소름 같기도 하고 전류 같기도 한
날카로운 느낌이, 목덜미에서 들리는 젖은 입술 소리와 골반께에서부터 가슴까지를 쓰다듬는 손바닥의 집요하고 뜨거운
감촉이 계속되면서 온 몸이 흐늘흐늘해지는 묘한 감각으로 변해갔다.
아, 젠장, 뭐라고 화를 내야, 하는, 데...
아, 어째서 남자라는 생물은 이토록이나 말초적인 자극 앞에 무력하다는 말인가.
은준의 입술이 턱까지 올라올 즈음에는 그냥 포기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두 사람의 몸은 완전히 껴안다시피 포개져
있고, 두근두근 미친 듯이 울리는 심장 소리가 예영의 것인지 은준의 것 인지도 잘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한껏 눌러 죽인 예영의 숨소리가 기침소리처럼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조차 누구의 숨소리인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
“아.”
갑자기 은준이 고개를 들었다. 밑에 깔려 있던 예영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체온이 올라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상기된 은준이 벌떡 예영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넋이 반쯤 나간 예영의 팔을 잡아당겨 같이 일으켰다.
“왜...왜 그래?”
예영은 옷깃이 단추 두어 개만 남기고 엉망으로 헤쳐진 채 헝클어진 머리로 멍하니 은준을 바라보았다.
“누구 온다.”
그제사 정신이 든 예영은 화들짝 놀라 교복 재킷을 챙겨입었다. 은준은 금세 태연한 안색으로 되돌아가 테이블
아래에 놓인 예영의 구두를 끌어다가 예영의 발치에 놓아 주었다. 막 예영이 구두에 발을 넣으려는 순간, 양호실의
문이 열렸다.
“너희들 아직도 집에 안 가고 뭐 하냐? 삼학년이냐?”
“아니요, 지금 갈게요. 친구가 아파서 누워 있다가 지금 정신이 들었거든요.”
방금 전까지 예영을 깔아눕혀 놓고 여기 저기에 입을 맞추고 더듬어 대던 놈이 천연덕스럽기도 하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온 예영은 은준의 등을 경이로움과 경멸을 함께 담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은준은 씩 웃으면서, 예영의 가방까지 어깨에 짊어지고 예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나올 때까지, 은준과 예영은 삼 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아무 말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아니, 예영은 도저히 은준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한 발 뒤늦게 완전히 정신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나 저 놈이랑 무슨 짓을 한 거지?
“박은준. 가방 줘.”
집으로 가는 길목인 교차로 앞에서 드디어 예영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어색한 기분을 누를 수가 없어서 고개는
다른 쪽을 향한 채 손만 은준 쪽으로 내밀었다.
“응? 웬 가방?”
“헛소리 말고, 내 가방 말야!”
아아, 하면서 은준이 피식 웃으며 예영의 가방끈을 어깨에서 내렸다. 예영은 가방을 나꿔채듯이 받아들었다. 어서
길을 건너 버려야지. 망할 신호는 바뀌지도 않는다.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에 은준이 예영 앞으로
바짝 다가와 얼굴을 디밀었다.
예영은 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더욱 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이 돌아갈 것 같다. 이러다가 목뼈 부러지면 어쩌지.
어질어질해 오는 머릿속에서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이 든다.
은준은 손을 뻗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옆으로 돌아가 있는 예영의 고개를 예영의 마음과는 다르게 아주 손쉽게,
천천히 자기 쪽으로 돌려다 놓았다. 예영의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왜 이 자식의 손이 일단 닿으면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지?
“장예영.”
낮고 다정한 말투가 입김에 실려 예영의 입술 위에 촉촉하게 와 닿았다. 예영은 어깨를 움찔했다.
“너 죽어도 구두 못 찾더라. 되게 귀여웠어.”
...뭐라고?
필사적으로 다른 쪽을 향하려고 애쓰던 예영의 두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되면서 은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은준의 눈이 빙글, 웃음을 띠었다.
“야 박은준 너, 너, 너...일부러 내 구두...!”
다음 순간, 예영의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시뻘개지면서 폭발해 버렸다. 가방을 휘두르며 은준에게 덤벼드는 예영에게
장난스럽게 맞는 시늉을 하며, 은준이 비죽비죽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러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어어? 안 믿어?”
이 망할 호로자식 변태새끼가 사기까지 쳐! 예영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은준에게 덤벼들었다.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몇 분 전에 양호실 침대 위에서 있었던 일이 오버랩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박은준이랑 키스를 두 번이나 한 것도 모자라서 포르노 뺨치는- 아니 포르노에선 최소한 남자들끼리는 안 하잖아!
-짓까지 해 버리다니, 이젠 정말 돌이킬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제기랄제기랄제기랄제기라알-!
“어어, 장예영, 너...으악!”
은준은 발악하는 예영에게 멱살을 잡힌 채 떠밀려서 가로등에 퍽 소리나게 부딪혔다. 계속 빙글대던 얼굴이 통증으로
확 찌푸려졌다. 그거 쌤통이다. 예영은 헐떡대는 와중에 씩 웃으며 은준을 노려보았다.
“아후..아파 이 자식아.”
“그거 잘 됐네. 아예 골로 가 버려라, 변태놈아!”
은준은 한 손으로 쇠에 부딪힌 뒷통수를 문지르며, 나머지 한 손으로 품 안에 떠밀려 온 예영의 허리를 짐짓 끌어안았다.
바보가 이런 거는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항상 한 발도 아니라 두세 발짝 늦게 화를 낸다. 그 점이 귀여운 거지만.
얼굴을 찌푸린 채로 예영을 바라보며 입으로는 피식 웃는 은준을 예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마주 바라보았다.
“머리 부딪혀서 돌았냐?”
“아니.”
“그런데 뭐가 좋다고 실실거려?”
“네가 좋아서.”
...징한 놈. 갑자기 딱 잘라 말하는 은준에게 예영은 기가 질렸다. 멱살을 놓고 휙 돌아서려는 예영의 허리를 은준이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너 이거 안 놔?”
“잠깐만.”
은준이 예영의 어깨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실실대다가 갑자기 저런 식으로 진지한 척 흐름을 끊으면, 예영은 은준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헷갈리게 된다.
설마 이 녀석은 내가 그런 걸 간파하고 나를 대하는 걸까.
“정말 그러려고 구두 숨긴 건 아냐.”
갑자기 마음을 읽힌 듯한 말이 어깨에서 들려와, 예영은 흠칫했다.
“됐으니까 이거나 놔. ...유치한 새끼.”
말투가 한풀 죽은 것을 스스로도 느끼면서, 예영은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은준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생각보다
순순하게 허리를 놔 주는 은준의 양 팔에 아주 짧은 순간 묘한 감정을 느꼈지만, 곧 가슴 속에서 지워내었다.
“다음에 또 변태짓 하면 그 땐 정말 죽을 줄 알아.”
예영은 입이 댓발 나와 있는 듯한 말투로 쏘아붙이고, 돌아서서 건너편 길의 신호등을 보았다.
은준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몇 번의 신호가 지나갔는지 여전히 빨간 불이다.
“잠이나 잘 챙겨 자라.”
은준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예영은 돌아보지 않은 채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보이고, 막 청신호로 바뀐 횡단보도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