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불공평

1 2026.07.22

부정 증후군

1. 불공평

이번에도 전교 석차 1등이다. 물론 시험지를 받고 마킹할 때까지 한결같은 믿음으로 자신이 1등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예상은 했지만, 불안감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 씨뎅할, 박은준 새끼 또 2등이네. 세상은 불공평하다니까!”

뒤에서 호들갑을 떨어 대는 목소리가 예영의 뒷통수를 아리게 때렸다.
아무렴 불공평하지, 개 같은 세상이 틀림 없어. 속으로만 으르렁대면서, 예영은 공고판 앞에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있는 사내녀석들 속을 힘겹게 빠져 나갔다.
교실 뒷 문을 열고 막 들어가려는 찰나, 예영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덩어리가 예영의 어깨를 퍽 소리나게 부딪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젠장, 아프잖아! 는 어디까지나 마음 속의 외침으로 머무른 채, 예영은 시큰한 어깨를 붙잡고 원망스럽게 뒤쪽을
노려보았다.
뒤편 약간 위로부터 어김없이 능글대는 미소가 예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

전혀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가 살짝 끝이 올라간 입술 사이에서 내뱉어짐과 동시에, 공고판 앞에서 들려왔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교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박은준 뭐하고 있냐~! 너 또 전교석차 2등이더라, 이 짐승 같은 새끼!”

은준은 숱 많은 눈썹을 살짝 미간 쪽으로 모았다가 곧 펴면서, 자기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2학년 2반 호들갑
대마왕 양석원의 목을 장난스럽게 감아 졸랐다.
예영은 아프다고 더욱 심하게 호들갑을 떨어 대는 석원과 은준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박은준, 이 짐승 같은 새끼. 망할 자식. 세상은 불공평하다.

예영은 2학년에 올라온 이후로 속으로 천 번은 넘게 되뇌인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앉자마자 문제집을 펴들었다.
아직 쉬는 시간은 5분이나 남았고, 2교시가 끝난 남학교의 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었지만 예영은
2교시건 5교시건 쉬는시간이건 공부시간이건 간에 하루 수업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책상 위에서 학습지나 정석이나
문제집을 덮어 본 적이 없는- 명실공한 전교 1등이었다.
그리고 2교시건 5교시건 쉬는시간이건 공부시간이건 간에 책상 위와 서랍 속에서 만화책이나 잡지 외의 책을 찾아
보기가 힘든 부반장이 박은준, 전교 석차 2등.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불공평하다. 단지 예영만의 주장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신경질 적으로 반쯤 너덜너덜해진 수I 정석 페이지를 넘겨대던 예영의 눈동자가 갑자기 욱신거렸다.
예영은 마구 눈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제기랄, 티라도 들어갔나? 짜증나, 짜증나- 눈을 비빌 수록 더욱 더 눈이
아려오기만 한다. 자연스럽게 눈을 비벼대는 피부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눈물이 쏟아졌다.

“너 그러다 눈 빠진다?”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와서 예영은 눈을 비벼대는 손을 흠칫 멈추었다. 눈물과 안통(眼痛)으로
흐려진 시야 너머에 아른아른하게 짜증나는 얼굴이 보인다. 곧게 뻗은숱 많은 눈썹, 같은 남자 녀석들도 어김없이
더럽게 잘 생겼다고 욕과 칭찬을 섞어서 해 대는 기분나쁜 얼굴이 예영의 코 앞까지 다가와, 예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 자기도 모르게 생각 이상으로 앙칼진, 여자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갑자기, 그 큰 얼굴 치워!”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은준은 반 아이들의 시선에도, 오버한다 싶을 정도로 격렬한 거부반응이 담긴
목소리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충혈된 채 눈물이 맺혀 있는 예영의 눈꼬리를 슥 만졌다.

“너 우는 거야? 일 등 해 놓고 말이지.”

뭐..?
바로 예영의 얼굴이 있는 대로 화끈해졌다. 아니, 벗겨 보면 온 몸이 전부 다 새빨개졌을 지도 모른다. 말조차 되어
나오지 않는 분노가 예영의 이빨 바로 뒤에서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은준의 큰 손 안에 얼굴을 거의 잡힌 채로 고개를 떨군 채로 입술을 깨물고
있던 예영의 붉어졌던 얼굴이 천천히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유치한 새끼.”

아주 낮은 소리가 예영의 얇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예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던 은준이
흠칫했다. 예영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은준의 눈을 마주 바라 보았다.
눈에 핏발은 여전했지만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은 온데간데 없다. 새하얀 얼굴에 핏발 선 눈이라니,
살짝 무섭다- 고 은준은 생각했다.

“유치한 새끼. 남이사 일 등을 하건 백 등을 하건, 니가 상관할 바 아니니까 족발이나 치워.”

마지막의 ‘족발’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좀 촌스러운 단어인 것 같지만, 화가 있는 대로 나 있는 예영에게 그런
걸 따질 틈은 없었다. 예영은 은준의 손을 탁 소리나게 쳐서 떨구어 내고 보고 있던 정석책으로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단 몇 분이라도 책상 위에 교과 관련 책이 없으면 노이로제라도 일으킬 것 같은 전교 1등과, 단 몇 분이라도 만화책
이외의 책을 보는 꼴을 보기가 드문 전교 2등.
불공평한 요즘 세상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2학년 2반의 이 콤비는, 당연하게도 사이가 나쁘기로도 유명했다. 아니
정확히는 2등인 은준의 인기가 지나치가 많은 것이고, 1등인 예영은 좋게 말해서 내성적이고 나쁘게 말해서 계집애
같이 까탈스러운 성격과 외모 덕택에 남학교의 먹이사슬 내지는 피라미드와도 같은 사회 속에서는 도태..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수없거나 신경쓰고 싶지 않은 놈으로 취급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예영은 그런 인기 없는, 분명 어디선가에서 열심히 뒷다마를 까이고 있을 스스로에게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그의
불만은 단 한 가지, 같은 반이 아닌 1학년 때부터 항상 3등도 4등도 아닌 2등만을 지키고 있는 같은 반의 박은준이라는
존재 뿐인 것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번의 석차가 나온 모의고사 시험시간 중에도, 옆에 앉은 은준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하마터면 답안지 마킹을
죄다 밀릴 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옆줄에 앉아 있던 은준은 언어영역 시작 벨이 울린 후 정확히 35분만에 마킹까지 다 마치고,
남은 시간에 늘어지게 잠을 자려는 듯 편안하게 책상 위에 푹 엎드려서는 고개를 예영 쪽으로 향해 누인 채 그
능글대는 기분나쁜 시선을 남은 한 시간 내내 예영에게 보내왔던 것이다.
마킹을 마친 OMR카드를 엎어 놓은 채로 컨닝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다 풀려면 아득하게 남은 예영이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은준은 사실 이 쪽을 보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논리정연함으로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세상은 불공평한 곳이 아닐 것이다.

“어우- 오늘도 여전히 마나님은 까탈스러우십니다!”

“좀 닥쳐라.”

제법 얼얼한 손등을 어루만지며 자리로 돌아온 은준을 2반 베스트들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맞이했다.
농구부라고 해도 믿을 만한 193cm의 우철이 은준의 머리를 동생 머리 쓰다듬듯 저 위에서 콱콱 쓰다듬으며 덩치에
어울리는 굵고 낮은 목소리로 인사말을 던졌다.

“전교 2등, 축하한다.”

“축하는 무슨. 이 몸의 전교 2등이 하루 이틀 사건도 아니고?”

“미-친-새-끼, 야! 다구리 들어가라!”

피식 웃으며 솥뚜껑만한 친구의 손을 들어올리며 내뱉는 거만한 말이 별로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는 남자는 박은준
뿐일 것이다. 아이들이 즉시 성대하게 아우성을 피웠다. 은준은 아까 석원의 목을 졸랐던 것처럼 이번에는 목을
졸리면서 캑캑거렸다.
한바탕 난동이 지나간 후, 반장 재석으로부터 진지한 질문이 들어왔다.

“근데 넌 왜 자꾸 저런 재수떼가리 없는 기생오라비 상대를 해 주려는 거야?”

대체 반장이라는 놈의 말투라는 것이..하지만 남 탓 할 처지는 아닌 전교 2등인 은준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재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이 덩달아 와르르 이의를 표명했다.

“그러게 말이다, 알다가도 모를 놈일세.”

“그러게, 저 새끼는 하루 웬종일 책만 들이파잖아. 아마 체육 시간 빼고는 태양을 보는 일이 없을걸?”

“그러니까 저렇게 허여멀건하지. 생긴 것도 재수없어.”

“그렇게 24시간 책에 고개 처박고 전교 일등 못하면 그것도 뒤져야지.”

짧은 시간 동안 쏟아져 나온 지나치가 많은 부정적인 단어들에 은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게다가 저 새끼, 유달리 은준이한테만 지랄거리는거 같지 않아?”

석원의 문제 제기에 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기 백분의 일도 공부 안 하는 은준이가 뒤에서 바짝 쫓아오고 있으니 신경 쓰일 만도 하지.”

“그렇다고 저렇게 지랄하냐. 생긴 대로 논다고 거시기는 있는지 궁금..”

은준의 찌푸려진 미간이 완전한 내천자를 그렸다. 이 자식들이 좀...

“그만 해라. 사내새끼들이 주둥아리 나불대기는.”

은준보다 한 발 앞서, 저 위에서 떨어진 우철의 낮은 목소리가 수다를 잠재웠다.

“그래. 이제 종 치겠다. 그만하고 자리에나 들어가. 얘들아! 다음시간 윤리다! 얼렁 앉아!”

재석이 벌떡 일어나 반장의 의무를 행사했다. 은준을 중심으로 뒷담화의 장을 펼치고 있던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은준은 살짝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데시벨이 공사장 뺨치는 쉬는 시간의 교실이라지만,
자기 욕을 대 놓고 하는데 한 마디도 듣지 못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쓰레기 같은 자식. 친구들도 다 같은 새끼들.
칵테일 파티 효과는 예외가 없었다. 예영은 2교시 이래로 계속 위장이 뒤집히려는 익숙한 느낌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중학교 때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레파토리의 뒷담화의 연속에 새삼스럽게 화가 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중심에 박은준이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
반장마저 졸음을 참기 위해 볼펜 끝으로 손등을 쿡쿡 찌르고 있는 5교시, 예영은 선생이 칠판에 필기를 하는 틈을
타서 슬쩍 은준 쪽을 노려보았다. 예외 없이 엎드려 퍼질러 있다.
그래, 분명 어제까지 밤샘을 했을 거다. 시험기간이었으니까.
아니 시험기간이 아니어도 매일 밤샘 공부를 하고 학교에 와서는 공부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은 척 하는 것이 틀림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영이 전교 1등을 계속 지키는 것처럼 어김없이 2등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상이 불공평할 리가 없지 않겠어?

예영은 샤프를 꽉 움켜쥐었다. 은준이 예영이 생각하듯 이미지 관리를 위해 밤샘을 불사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사실은
예영을 포함한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다만 예영만이 인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하루 종일 놀아제끼고
한두 시간 공부해서 전교 2등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인정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학년 초에 있었던
IQ테스트에서 박은준의 아이큐가 전 학년에서 유일하게 150을 넘었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런 수치 같은
것이 먹혀드는 세상이라면 대체 학교와 학원은 무엇을 위해 존재한단 말인가. 예영은 무엇을 위해 하루에 다섯
시간이 넘게 예습을 하고 복습을 하고 오답노트 정리를 한단 말인가.
생각을 할 수록 신경쓰이고, 구역질 나고, 화가 나고, 미칠 것만 같다.

그런 놈은 신경쓰지 마, 어차피 전교 1등은 그 놈이 아니고 너니까.

유일하게 마음을 터 놓는 상대인, 시에서 최고 레벨이라는 외국어 고교를 다니는 쌍둥이 여동생 예진의 충고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말은 특수고를 수월하게 들어간 너니까, ..박은준을 매우 닮아 있는 너니까 할 수 있는 말이잖아.
예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 샤프 자국이 시뻘겋게 남아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때만큼은 예영도 졸 수 밖에 없다. 신체가 아닌 정신의 피로로 완전히 축 늘어진 다리를 무겁게 끌며
어둠이 깔린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항상 공부를 하고 있지만 공부가 좋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밤 늦게까지 붙잡아 두는 학교도, 그런 학교를 다니게 하는 공부도, 뒤에서 욕이나 하는 학우-라고 할 수 있다면-
들도 전부 지긋지긋하다.
늦가을 한밤중의 바람은 완연하게 겨울 칼바람이다. 오늘 늦잠을 자서 허겁지겁 나오는 통에 코트도 챙기지 못했다.
예영은 목도리라도 갖고 올걸- 하고, 어두운 밤 하늘에 새하얗게 뿜어져 나가는 입김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교문 앞에 붕어빵 장사 트럭이 불을 켜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한 봉지 사 가지고 갈까 하는 마음에 가방
앞주머니를 뒤적였다. 항상 앞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익숙하게 만져지는 네모난 지갑의 감촉이 한 번에 느껴지지
않는다. 어라..?

“씨발.”

가방을 훌훌 털어냈지만 지갑은 온데간데 없었다. 예영은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막상 돈이야 얼마 안 들어 있다고 해도, 없어지면 가장 곤란한 것이 지갑이다. 교실에 떨구고 왔다는 생각에 황급히
발걸음을 돌리는 예영을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어이, 장예영!”

익숙한 목소리..라고 느끼기도 전에 목덜미에 부드러운 것이 얹혀졌다.
예영의 눈 앞에 오늘 하루 내내 지긋지긋하게 본 번듯한 얼굴이 능글대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고 담배를 문
은준이 겨드랑이에 붕어빵 한 봉지를 낀 채 자기 목도리를 예영의 목에 둘러 올가미처럼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뭐야?”

지갑이 없어지니 이번엔 박은준이냐. 예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찌푸러졌다.

“뭐긴 뭐야. 너 안 추워? 참, 이거 하나 먹어라.”

은준은 자기 멋대로 예영의 목에 목도리를 두세 겹 단단히 두르고 멋들어지게 맨 후,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종이
봉투에서 뒤적뒤적 김이 오르는 붕어빵을 꺼내 내밀었다. 커다래진 눈과 찌푸러진 미간이 은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어설픈 욕만 나오면 된다.

“꼴값하지 마. 무슨 꿍꿍이야?”

휙 지나쳐서 앞장서 걸어간다. 내 그럴 줄 알았지..은준은 담배 꽁초를 휙 집어던지고 예영을 쫓아갔다. 예영이
마구 목도리를 풀어서 바닥에 내던지려는 폼을 취하는 게 보인다. 그리고 맞은편에서는 헤드라이트를 밝힌 학습지
회사 트럭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차, 하고 은준이 바닥을 걷어찼다.

“-뭐야!”

느닷없이 뒤에서 허리를 강하게 끌어 안기는 바람에, 예영은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넌 뭐야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냐? 내 이름 박은준이야.”

웬지 나지막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눈 앞을 트럭이 휙 지나쳐 갔다. 예영은 꽉 안긴 팔 안에서 힘겹게 고개를
뒤로 돌려, 어깨 위에 턱을 얹다시피 하고 있는 은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칼로 자른 듯한 콧날이 예영의 코 끝과 스칠락말락 하고 있었다. 여동생과 바지를 나눠 입는 예영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팔과 마디가 굵은 손에서는 완연히 어른 티가 났다.
예영의 얼굴과 은준의 얼굴 사이, 몇 센티 안 된 공간에서 새하얀 입김이 섞였다.
...기분이, 아주, 나쁘다.

“이거 놔.”

바람보다 더 냉랭하게 말을 던지고 예영은 몸을 틀어 은준의 팔에서 벗어났다.

“너무한 거 아냐? 한 개밖에 못 먹은 붕어빵까지 포기하고 목숨까지 구해 줬는데.”

은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바닥에 흩어진 목도리를 주웠다. 말을 듣고 보니 목도리 옆에 타이어 자국이 난 채 바닥에
납작하게 눌러 붙은 붕어빵이 성대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예영은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 마음 속에서
싹싹 지웠다.

“...누가 그러랬냐?”

은준은 예영의 목소리가 한풀 꺾인 것을 놓치지 않았다. 목도리를 들고 예영 옆에 따라붙어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미쳤나. 예영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은준의 콧노래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 도리가 없다. 이 자식은 학교 밖에서까지 날 괴롭힐 생각인가?
길을 건너고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앞까지 왔을 때까지 은준은 계속 예영 옆에서 쫓아 걸어오고 있었다. 참다 못한
예영은 소리를 질렀다.

“너 어디까지 쫓아올 작정이야?”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추었다. 가로등 아래 선 은준이 문득 굉장히 낯선 사람처럼 보여와, 예영은 이어서
쏟아부으려던 말을 잠시 삼켰다. 교복 넥타이 윗부분만 남기고 온 몸을 뒤덮은 새카만 롱코트, 어깨에 얹혀진 아버지가
맬 법한 어른스러운 목도리, 가로등 조명 아래 그늘진 얼굴 윤곽. 담배 냄새.
저 아저씨가 매일 야한 잡지나 펼쳐보고 농담 따먹기나 하던 그 박은준인가?
자기도 모른 새에 얼어붙은(사실 ‘쫄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지만) 예영에게 갑자기 은준의 팔이 뻗어왔다.
예영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얻어맞다니, 라고 생각하고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주먹 대신 아침에
은준이 예영에게 수작을 걸어왔을 때를 생각나게 하는 손길이 예영의 얼굴에 와 닿았다.
그리고 이어서 믿을 수 없는 감촉이 예영의 입술에 닿았다.

“......무...!”

순간 넌 뭐야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냐? 라는 은준의 말이 예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예영의 입을 뒤덮은 게 상대방의 입술이라는 사실을 채 감지하기도 전에, 뜨거운 것이
입 안으로 치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예영의 이와 입천장과 혀 사이를 집요하게 훑는 것이 상대방의 혀라는 것을 감지하자마자, 예영의 팔이
반사적으로 은준의 머리를 거세게 후려쳤다.

1교시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어김 없이 다음 모의고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의 지옥의 시작이다.
예영이 가장 취약한 과목인 수학시간이었지만, 교과서의 글자가 한 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있는 힘껏 머리를 후려치고 이어서 안면을 가격했으니, 입 안이 후끈거릴 것은 예영이 아니라 은준일 것이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화끈대고 있는 것은 상처 하나 없는 예영의 입이었다.
예영은 일부러 거칠게 손등으로 애꿎은 입술을 비벼 닦았다. 당연히 더욱 더 입이 아프기만 하다.
원망스럽게 짝이 없는 은준 쪽을 노려보자, 양 손으로 턱을 괴고 이 쪽을 줄곧 바라보고 있던 그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교과서로 시선을 돌린 예영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입 안의 화끈댐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의 열기와 입술 위와 입 안을 돌아다니는 미끄럽고 뜨거운 감촉의 잔재 때문에,
예영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단 1초도 정신을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미, 미친 새끼, 뭐 하는 짓이야?!”

패닉에 빠진 채 가로등에 등을 기대고 숨을 헐떡이는 예영을 정수리와 입가를 호되게 맞은 은준이 피식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보기와 다르게 손이 맵다. 그래봤자 ‘주먹이 세다’라는 말은 나오질 않는 것이, 역시 상대는 장예영이라는
것을 은준에게 알려 주었다.

“뭐 하긴, 키스했지.”

그러니까 그걸 묻는 게 아니란 걸 모를 리가 없잖아, 싸이코 새끼!!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예영이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왜 나한테 그걸 하냐고, 너 변태냐? 내가 그렇게 만만해?”

쓸데 없는 말까지 마구 흘러나온다. 말의 흐름을 은준의 낮은 목소리가 툭 끊었다.

“네가 좋으니까.”

뭐?
마구 퍼부어 대려던 예영의 입이 벌어진 채로 딱 멈추었다.

“너 그걸 말이라고..”

“왜 말이 안 되는데?”

갑자기 눈앞의 얼굴이 정색을 하고 되물어 왔다. 순간 예영의 말문이 막혔다.

“왜 말이 안 되냐고. 내 말에도 좀 대답을 해 봐, 장예영.”

내 말에도 좀 대답을 해 봐, 장예영.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 놓고 대답을 요구하란 말이다.
예영은 벨이 울리자마자 화장실로 달려들어가 열기가 제대로 가라앉지 않는 입술과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장예영. 얘기 좀 하자.”

비척비척 화장실을 나가려는 예영의 어깨를 누군가 꽉 움켜잡았다. 은준이었다.
이거 놓으라는 말조차 직접 하기 싫다. 예영은 상대방이 은준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거칠게 어깨를 움직여 손을
떨구고 복도로 나갔다. 예영은 또 저 놈과 마주치지 않으려면 그냥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을
생각은 애초부터 들지 않았고.

“얘기 좀 하자니까!”

발걸음을 서둘러서 현관 계단을 내려가는 예영의 팔을 은준이 뒤에서 거칠게 나꿔채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고 비틀하고 계단에서 그대로 굴러 떨어지려 하는 몸을 그대로 자기 쪽으로 돌려 안았다.
은준의 와이셔츠 너머로 콘크리트 벽하고 비슷하게 단단하면서 탄력 있는 감촉이 예영의 코에 부딪혀 와 닿아, 화가
폭발하기 한 발 앞서서 어제 맡았던 것 같은 담배냄새가 먼저 뇌로 흘러들었다.

“너 같은 새끼랑 할 얘기 없어.”

일언지하에 말을 잘라내고는 예영은 은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담배향 때문에 어제 당한 키스가 다시 한 번 각인되어
왔다.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입술을 훔쳐내는 예영을 은준이 웃음기 없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는 나한테 말 걸지 마. 변태 새끼.”

예영은 은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힘을 다해 경멸감을 담아 내뱉었다.
변태 새끼. 라는 마지막 말에 은준의 눈동자가 어렴풋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눈을 통해 내가 박은준을 상처입혔다-라는 자각이 들자마자, 예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입술의 기분나쁜 감촉이 순간 사라질 정도로.

예영의 말에 충실하게도, 그 이후로 은준은 예영에게 일절 말을 걸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예영의 입술의 화끈거림도, 이틀이 지나니까 점차 사라졌다.

은준과의 (애초부터 은준의 일방적인 시비였지만) 접촉이 완벽하게 끊긴 지 나흘째, 연습문제를 푸는 데 골몰하고
있는 예영의 책상 위로 갑자기 뭔가가 날아와 앉았다. 대충 접은 쪽지였다.
집중의 흐름이 끊긴 예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쪽지를 펼쳐보았다.

<수업 끝나고 나랑 얘기 좀 하자.>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누구인지는 뻔하다. 휘갈겨 쓴 글씨를 보자마자 손안에서 대충 구겨서 바닥으로 휙
던졌다. 얘기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마침 주번인 탓에 마지막까지 교실 뒷정리를 하고 뒷문을 나섰다. 문이 잠겼나 확인을 하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가려던 예영은, 헉 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 앞 복도에 본의 아니게 익숙한 실루엣이 교실 창문 아래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박은준..이라고 입에서 하마터면 이름이 나올 뻔 했다. 이젠 기억 속에 확실히 박힌 담배 냄새가 예영의 코 끝에
와 닿았다. 은준의 발 끝에 담뱃재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다.
들키면 낭패일 텐데..예영이 알 바가 아니긴 하다. 무표정하게 내려다 보는 예영 앞에서, 은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꽁초는 밖에다가 버려.”

나흘만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예영 쪽에서였다.

은준은 얌전히 꽁초를 주워다 창 밖으로 집어던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예영은 말 없이 은준 앞을 지나쳐 걸어갔다.

“예영아.”

박은준답지 않은 목소리다- 박은준답지 않다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고 예영이 느끼는 사이, 마치 입술에
닿아왔던 그 느낌과 비슷한 손길이 팔에 닿아왔다.
예영은 말 없이 확 팔을 올렸다. 하지만 은준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놔. 말귀 못 알아들었어?”

스스로도 자기 목소리가 참 차다 싶었다. 붙잡힌 팔이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 자식 정말 미쳤구나... 속으로
되뇌이며 눈살을 찌푸리며 올려다 본 은준의 얼굴에 붉은 석양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얼굴이 가로등 아래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하게, 어른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얘기 좀 하자, 예영아.”

쪽지 포함해서 세 번째 듣는 지긋지긋한 소리였다. 예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내가 너랑 얘기를 해야 하는데.”

“미안하다. 그 때는 내 맘대로..”

알긴 아냐? 예영의 얼굴이 더욱 더 구겨졌다. 은준은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예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석양이라는
조명발(?) 아래서 봐서 그런지, 새삼스럽게 더욱 기분 나쁘게 잘 생긴 얼굴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수한 느낌과는 다르게, 여전히 예영의 입에서는 찬바람 부는 말만이 튀어나왔다.

“나도 내 맘대로 너 무시 좀 하자.”

“그런 말이 아니라, 제발 내 말 좀 듣고 가, 장예영!”

은준의 목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난 너 싫어.”

은준의 고함소리의 울림과 침묵이 섞인 채 흐르던 시간을, 예영이 단칼에 잘랐다.
두근두근, 갑자기 높아진 심장 소리가 혈관에서 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예영의 귓전으로 울려왔다.
나흘 전 현관에서 봤던 은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다시 보였기 때문이다.

“난 너 정말 싫어. 이렇게 말로 해야 알아들어?”

“왜 내가 싫은데.”

이 자식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에 예영은 거칠게 은준에게 잡힌 팔을 휘둘렀다.

“아파, 이거 놔!”

“싫어. 왜 싫은지나 먼저 말해.”

순간 에영의 귓전에서 미친 듯이 울리던 심장 소리가 뚝 끊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예영은 양 팔을 은준에게 잡힌 채,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싫으니까 싫다는 거지, 이유가 어디 있어 망할 새끼야! 니가 뭘 안다고 날 좋아한다 안 한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고 있는 거야, 난 너 싫어! 너 같은 새끼가 제일 싫어! 노력이라고는 일 분도 안 하는 주제에 능글거리면서 남
비웃기나 하고, 남이 자기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도 못 하고, 뻔뻔스러운 자식. 내가 그렇게 너보다 못 하고
우스워 보여? 내가 매일 빌어먹을 놈의 교과서 파 대면서 발악하는게 그렇게 재미있어? 응?!”

은준의 눈이 당황함에 크게 열렸다. 은준의 손에 잡힌 채로 마구 발버둥을 치는 통에 예영의 자켓이 반쯤 벗겨져 나갔다.

“예영아.”

“예영이는 무슨 예영이야, 니가 내 친구야? 닥쳐 좀!”

시뻘개진 얼굴로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힌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예영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은준의 귀에,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거기?!!”

이런, 학주다. 월급도둑놈 주제에 이 늦은 시간에 퇴근은 안 하고..! 은준은 일단 예영의 입을 틀어막고, 가히 빛의
속도로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주워 뒷문을 열고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은준과 예영은 뒷문 바로 앞에 주저앉았다. 어느덧 교실에는 어둠이 완연하게 깔려 있었다. 침묵 속에서 학주의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들린다. 꼼짝도 못 하게 은준에게 단단히 끌어 안긴 예영이 입을 막힌
채 읍읍거렸다. 은준은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구둣발 소리가 멈추었다. 학주는 필시 아무도 없는(예영과 은준은 뒷문 바로 앞에 있어서 보일 수가 없으니), 누가
있더라도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어두운 교실 안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사실 몇 초에 지나지
않겠지만, 긴장어린 시간이 오래오래 흐른 후, 구둣발 소리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은준은 슬쩍 예영의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

“죽으려고 환장했냐, 장예영.”

은준은 어느 새 보통 때의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예영은 당황스러움과 호흡 곤란으로 새하얗게 질린 채 가만히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은준의 팔에서 확 빠져나왔다. 대체 이 놈에게 몇 번째 안기는 거지?

“난 너 우습게 본 적 없다.”

어둠에 묻혀 있었지만, 이 쪽을 바라보아 오는 시선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예영은 이를 악물었다.

“너 비웃은 적도 없어.”

은준이 천천히 일어나 예영 맞은편에 섰다. 복도에서와 같은 구도지만, 이젠 서로의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웃기지 마. 네가 그럴 의도가 있건 없건 간에, 난 너 때문에 매일매일이 지긋지긋해.”

“나도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건, 미워하건 싫어하건 간에 널 좋아해.”

새카만 공간에 침묵이 흘렀다.
못박은 듯이 서 있는 예영의 팔에 은준의 손이 천천히 와 닿았다. 예영의 코로 담배 냄새가 훅 끼쳐왔다.
천천히 입술이 겹쳐져 왔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 쌓여 있던 것을 전부 소리질러 토해낸 탓에 기운이 없어서인지,
어쩐지 뿌리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은준을 싫어하는데, 은준은 나를 좋아한다.
문득 예영의 머릿속에 세상은 불공평하다, 라는 항상 되뇌여 오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결국 예영은 집에 돌아와서 그대로 뜬눈인 채 아침을 맞아 그대로 학교로 왔다. 이번 키스 후유증은 일 주일은
갈 것 같았다. ..이번이라니, 무슨 소리. 의자에 주저앉아서 고개를 휙휙 젓는 예영의 옆 자리 의자에 누군가가
걸터앉았다. 담배 냄새다.

예영 만만치 않게 눈가가 퀭해진 은준이, 표정만은 여전히 능글거리며 예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나 싫어하냐?”

웃음기 어린 말투로 휙 던져온다. 예영은 발끈하지 않고, 마주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열두 시간도 안 지났는데 아직도야? 당연하지. 너 같은 놈이 제일 싫어.”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다.
하지만 예영은 이제부터는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 그렇게까지 화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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