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제4장 - 포하구(包河口) 일전(一戰) 1
독로무한
8화. 제4장 - 포하구(包河口) 일전(一戰) 1
뱃길을 따라 북상하여 몽뇌산이 이른 곳은 포하구(包河口)란 곳이었다.
배에서 내릴 것 없이 계속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파양호와 만나게 되지만 그 길로 가면 대신 많이 돌아가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몽뇌산은 포하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강을 끼고 서 있는 갈대숲을 가로질러 파양호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갈대숲은 근 십리에 걸쳐 뻗어 있었다.
몽뇌산도 단 두 번 보았을 뿐이지만 갈대꽃이 피는 가을이면 그 일대는 정말 장관이었다.
엷은 자줏빛을 띤 수만 개의 회백색 꽃들이 바람결을 따라 출렁이는 모습은 뭐라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몽뇌산은 드넓게 펼쳐진 갈대숲 앞에서 당시를 떠올리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각거리며 갈대들이 몸을 부딪치는 모습, 수면에 비추어진 갈대들이 물결을 따라 흔들리던 모습……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하얀 갈대숲이 달빛을 받아 눈가루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광경이었다.
몽뇌산은 물기를 잃은 갈대가지를 매만지며 때가 겨울임을 한탄했다.
앙상하게 마른 갈대가지 하나를 꺾어 입에 문 채 몽뇌산은 천천히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무리 지어 어울려 있는 갈대들을 좌우로 벌리며 느긋하게 전진하던 몽뇌산의 걸음이 어느 순간 딱 멈춰졌다.
몽뇌산은 물고 있던 갈대가지를 뱉으며 청력을 돋우었다.
채재재쟁`─`!
멀리서 갈대 스치는 소리와 분명히 구별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갈대밭에서의 싸움이라……?”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지면을 박차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갈대가지들이 그의 발 밑에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갈대 끝을 차내며 달린 지 반 각도 되지 않아 몽뇌산은 시전하던 경공을 멈추며 갈대 사이로 뚝 떨어져 내렸다.
굳이 공력을 일으켜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싸움 소리가 잘 들리는 걸 보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소리의
진원이 있는 듯했다.
몽뇌산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호흡마저 낮추었다.
갈대 사이에 은신하는 순간부터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기운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위치조차 판별되지 않을 정도라면 예사 고수가 아님이 분명했다.
몽뇌산은 암중인이 숨어 있는 위치를 찾아 내는 데 신경을 모으는 한편, 조심스럽게 앞으로 전진했다.
마침내 싸움이 잘 보이는 곳까지 다다른 몽뇌산의 얼굴에 별안간 놀라운 빛이 가득 찼다.
갈대 무리 틈새로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문으로 안 가고 왜 여기서……?’
몽뇌산은 인상을 쓰며 장내의 상황을 살폈다.
장내엔 황의와 흑의를 입은 두 무리의 인물들이 정신없이 얽혀 있었다.
얼른 보기엔 열다섯은 족히 넘어 보이는 흑의인 무리들이 황의인들을 포위하고 있어 싸움이 금세라도 끝날
것만 같았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셋밖에 안 되는 황의인들은 하나같이 고수 아닌 자가 없어서 쓰러지는 쪽은 오히려 흑의인들이었다.
‘당문에선 딸에게는 안 가르쳐 주는 비전절기들도 며느리에겐 가르쳐 준다더니, 과연 손
부인도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군.’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몽뇌산의 시선은 흑포인들 사이로 보이는 왜소한 황의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천초산을 내려갔던 손유경이었다.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일 점의 두려움도 없이 장력을 날리는 손유경의 모습은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했다.
그녀가 뿌린 장력에 맞부딪힌 자는 너나할것없이 픽픽 쓰러지는 것으로 보아 장력에 다른 한 수가 숨어 있는 듯했다.
몽뇌산이 그녀의 수법을 유심히 살피는 사이 다시 여섯 명의 흑의인들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대로라면 오히려 전멸을 면치 못하는 쪽은 흑의인들이 될 것 같았다.
몽뇌산이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장내를 지켜볼 때였다.
싸움통에 어느새 공터로 화한 장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던 갈대숲 한쪽이 한꺼번에 꺾여 넘어지며 적포를 걸친 한 인물이 질풍처럼 밀어닥쳤다.
장내에 들이닥쳐 채 어떤 행동을 보이기도 전에 그의 입에선 욕부터 터져 나왔다.
“이 등신 같은 놈들! 벌써 일을 끝내고도 남을 시간에 어떤 놈들은 바닥에 개구리처럼 퍼져 있질 않나, 또 어떤 놈들은 뭐 마려운 개처럼 쩔쩔매고 있으니…… 그러고도 밥 처먹고 사냐?”
걸걸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악다구니를 써대는 적포대한의 모습은 엄청나다는 말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손에 사람 키만한 도를 들고 다짜고짜 장내로 뛰어들어 바닥에 쓰러진 흑의인들을 집어던지는 모습은 삼국시대 장비가 현신(現身)한 것만 같았다.
둥글넓적한 얼굴엔 고슴도치 같은 수염이 빽빽히 돋아 있었고, 부릅뜬 눈은 불가의 사천왕(四天王)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쓰러진 자들을 다 치우고 난 다음 그가 한 일은 손유경이 밀어 낸 장력에 무심코 맞서 가던 흑의인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것이었다.
보통 이상의 체격을 가진 흑의인을 짚단처럼 가뿐히 들어올려 뒤로 내던지면서도 그에게선 욕설이 끊이질 않았다.
“닭 대가리 같은 놈! 장력 속에 암기가 섞여 날아오는 줄도 모르고 미친 놈처럼 거기다 손을 내밀어? 그렇게 죽고 싶거든 차라리 내 눈앞에서 그냥 배 가르고 죽어! 그럼 멋있게라도 보일 거 아냐, 썅!”
있는 대로 고함을 치는 그의 서슬에 놀라 흑의인들이 일제히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그러자 가뜩이나 화등잔만하던 적포대한의 눈이 더 커지며 살기에 가까운 빛이 이글거렸다.
“지렁이 대가리들! 그런다고 적을 앞에 두고 물러나? 이래 가지고 앞으로 내가
네놈들 믿고 장사하겠냐, 응? 아주, 오늘 내 손에 다 죽어 버려!”
기세로 보아서는 정말 흑의인들 모두를 죽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멍해진 것은 당문인들 쪽이었다.
심지어 경험이 많은 당진성조차도 일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빛이 가득했다.
그때, 적포대한이 쓸어 넘긴 갈대숲 쪽에서 다시 한 인물이 잽싸게 튀어나와 대뜸 적포대한에게 매달렸다.
“방주님! 고정하십시오. 지금은 적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방도들을 다스리시더라도 싸움을 끝낸
후에 하십시오, 방주님. 제발……”
적포대한의 다리에 납작하게 붙어 애원하는 회의인의 모습은 필사적으로 보였다.
“무엇들 하는가? 어서 저들을 공격하게!”
회의인은 얄팍한 눈을 짐짓 위엄있게 치뜨며 한쪽에 몰려 서 있는 흑의인들을 다그쳤다.
흑의인들이 다시 사생결단을 내려는 기세로 손유경 등을 향해 몰려가자 씨근덕거리고 있던 적포대한이 회의인의 팔을 떨쳐 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여자를 잡아! 나머지 둘은 내가 맡는다!”
대도를 한번 크게 휘두른 뒤 적포대한은 당진성과 당윤광을 향해 돌진했다.
그래서 싸움은 다시 새로운 상황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몽뇌산은 방주라는 적포대한을 흥미 진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모습만 장비 같은 게 아니라 용맹한 것도 그에 못지않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실력도 상상 밖이었다.
당윤광이야 그렇다 쳐도 당진성은 당문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데도 불구하고 일시지간에 적포대한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당진성이 곤혹스런 눈빛을 흘리는 동안 적포대한은 대도를 들고 좌충우돌, 그들을 마구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여간 패도(覇刀), 그 자체로구나!’
잠시 감탄하던 몽뇌산은 이내 뒤에 나타났던 회의인을 주시했다.
그가 자신이 생각하던 그 사람인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저 적포대한은 기질상 내가 아까 암중인에게서 느꼈던 기운을 도저히 낼 수 없을 것
같고, 저 회의인은 비슷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기세가 다르다. 그럼 또 다른 인물이……?’
몽뇌산은 한쪽에 서서 싸움을 보며 쉴새없이 눈을 굴리고 있는 회의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가 갈대 사이로 은신할 때 느꼈던 암중인의 기운은 특별히 그를 겨냥한 것이 아님에도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어쩌면 그게 바로 말로만 듣던 살수의 기운일지도 몰랐다.
확신할 순 없지만 몽뇌산은 피부를 축축하게 휘감는 그 음습한 기운에 대해 거의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누군지 알아 낼 방법이 한 가지 있지.’
몽뇌산의 눈동자가 묘한 결심의 빛을 뿜음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갈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곤 다짜고짜 적포대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도(刀)! 크기만큼 위력이 있나?”
그걸로 충분했다.
거의 광분해서 달려드는 적포대한을 보며 몽뇌산은 싱긋 웃었다.
그의 손에서도 곧 칼날 같은 예기가 피어올랐다.
* * *
손유경은 오늘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참 많이 만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원래 당문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에 필요한 독초 중 하나인 용형초(龍形草)를 찾기 위해
천초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로를 어떻게 알았는지 눈앞의 흑의인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일은 손유경뿐만 아니라 모두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아무도 내색은 안 했지만 모두들 암흑가의 세력쯤으로 보이는 흑의인 무리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걸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다면 이번 일은 한 가지를 뜻했다.
그들의 행적이 적에게 완전히 노출되었다는 것!
그것은 비단 그들 세 명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당문 전체가 적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됐다.
그들의 적이란 눈앞의 저 흑의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의 진짜 적에 비하면 저들은 티끌만도 못한, 극도로 하찮은 존재였다.
사실 저 적포대한을 제외하고 흑의인들 중 그녀의 제대로 된 일장을 받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어떻게 그들의 행로가 밝혀졌는지, 그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터에 천초산에 있어야 할 몽뇌산까지 불쑥 나타나 흑의인들의 수령과 싸우고 있으니……
손유경은 혼란스런 마음을 가다듬으며 맥없이 손 놓고 서 있는 당진성과 당윤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몽뇌산과 적포대한의 숨막히는 접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들이 부랴부랴 달려와 흑의인들을 제압했다.
“좀 전에 나타난 회의인도……!”
흑의인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나서 바람처럼 몸을 돌리던 당윤광의 시선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약삭빠르게 벌써 사라졌군요.”
손유경의 말에 당윤광이 침중한 얼굴로 돌아섰다.
“서둘러 출발을 해야겠구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싸움이 끝나는 거나 보고 가자. 저자에게 물어 볼 말도 있고.”
곁으로 다가온 당진성이 눈짓으로 몽뇌산 쪽을 가리켰다.
아수라장으로 화한 그곳에서 몽뇌산과 적포대한의 싸움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몽뇌산은 일부러 싸움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진천독공을 사용했다면 벌써 끝났을 싸움이지만 몽뇌산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적포대한이 흉포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단순하고 우직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적포대한은 단순히 이용당한 것에 불과했다.
회의인이 혼전을 틈타 슬며시 사라지자 사태는 더 자명해졌다.
그가 회의인의 도망을 알고도 막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젠 직접 나오지 않고 못 배기겠지.”
나직하게 중얼거린 몽뇌산의 귓속으로 갑자기 우렛소리가 파고들었다.
“뭐? 뭐라고 구시렁대는 거냐!”
몽뇌산은 적포대한의 고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정신이 흐트러져 하마터면 대도에 가슴팍이 갈라질 뻔하였다.
몽뇌산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잠시 둔해졌던 그의 쌍수가 원활하게 움직이며 줄기줄기 해일 같은 경기를 쏟아 냈다.
빨랫줄처럼 이어져 나오는 장력이 대도가 휘둘러지는 길목 길목을 빈틈없이 막아 갔다.
카가가강`─`!
맹렬한 금속성이 일며 적포대한의 대도에서 불똥이 튀겼
몽뇌산에 의해 도가 가로막히자 적포대한은 굉량한 웃음과 함께 도를 하늘로 쳐들더니 이내 도끼처럼
내리찍기 시작했
쑤아아`─`!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도의 날이 지척으로 다가들자 몽뇌산은 쌍수를 교차시키며 강하게 밀어 냈다.
사왕권 최고의 방어 수법인 밀막영(密幕影)이었다.
촘촘한 그물처럼 교차된 암경이 도의 기세를 그대로 맞이했다.
콰광`─`!
요란한 폭음이 울리며 몽뇌산의 신형이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숨돌릴 새도 없이 대도의 그림자가 재차 떨어져 내렸다.
콰과광!
다시 한 번 천지가 요동쳤다.
아까와 달리 비록 세 걸음이었지만 몽뇌산은 다시 한 번 물러나고 있었다.
‘역시 그냥 막는 걸로는 부족한가?’
몽뇌산은 저릿저릿한 양팔에 기를 집중시키며 앞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갔다.
“으하하하! 그렇게 싸워야 진짜 사내지.”
그 와중에서도 적포대한의 손에 들린 도는 이전보다 더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몽뇌산은 도가 떨어져 내리는 지점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
그의 손끝에 걸린 대기가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합장하듯 모아진 그의 쌍수가 길게 늘어난다 싶은 순간, 뿌연 기운이 엿가락처럼 빠져 나오며 마주 오던 대도에 작렬했다.
마치 대지에 꽂히는 뇌전을 보는 것만 같았다.
퍼어엉`─
따당!
두 가지 소리와 함께 천지사방에 회오리가 쳤다.
당진성 등이 손을 써 부드럽게 흙먼지들을 가라앉히지 않았다면 한동안 장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의 시선이 먼지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광경에 집중되는 순간,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허공으로 누군가가 번개같이 솟구치더니 그대로 사 장쯤 떨어진 좌측 갈대밭을 덮쳐 갔다.
무형의 기운에 일제히 몸을 누이는 갈대 속에서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일며 희뿌연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 뒤를 바짝 쫓아 솟구친 인영이 앞선 이와 이내 한 몸처럼 붙었다 싶은 순간, 은은한 청광이 번쩍하고 빛났다.
곧 이어 하나의 인영이 끈 떨어진 연처럼 추락했다.
* * *
사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혈을 제압당하고 뒤집어쓰고 있던 백색 복면이 벗겨졌는데도 눈빛 하나 바꾸질 않았다.
가면을 쓴 것처럼 사내의 표정은 철저하게 무심 일변도를 걷고 있었다.
냉혹하게 번들거리고 있는 눈동자만 아니라면 석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몽뇌산은 혀를 찼다.
사내는 그의 생각대로 역시 특수한 훈련을 거친 전문 살수였다.
만약 그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적포대한의 공격에 맞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갈대밭에 몸을
은신한 채 그들을 지켜보던 사내의 호흡이 무심결에 가빠지지 않았다면
결코 잡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몽뇌산은 당진성 등의 침중한 얼굴을 흘끗 보고는 다시 사내를 살폈다.
“백의를 입고 백색 복면을 착용하는 집단이 어딘지 아십니까?”
그의 물음에 당진성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백의를 입는 곳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게다가 복면이야 이런 일을 하자면 으레 뒤집어쓰게 마련 아닌가?”
당진성의 말대로라면 사내의 겉모습을 살펴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몽뇌산이 사내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때 별안간 괴성이 울리며 집채만한 그림자가 사내를 덮쳤다.
“이 새끼! 감히 우리 야월방(夜月幇)을 이용해 먹다니!”
몽뇌산은 미친 듯이 날뛰는 적포대한을 겨우 떼어 놓고는 한 대 맞고 피떡이 돼버린 사내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받은 훈련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던지 부러진 이빨과 함께 피를 게워 내면서도 의식은 잃지 않고 있었다.
몽뇌산은 적포대한, 남경부 내의 암흑가를 장악하고 있다는 야월방의 방주인 포량(包量)을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물론 그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믿었던 수하가 적과 내통하여`─`어쩜 애초부터
적의 일당이었는지도 몰랐다`─`방을 팔아 넘겼으니 오죽 분통이 터지겠는가!
몽뇌산은 백의사내가 잡힌 후에 잇따라 잡혀 벌써 포량의 손에 곤죽이 돼버린 회의인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회의인은 포량의 포악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한 대 맞고 나서 즉시 독단을 깨물었다.
그가 흑혈을 토하며 죽어 버리자 화를 분출할 곳을 찾던 포량이 백의사내를 노린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포량의 손에 죽는 것은 여기 있는 누구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몽뇌산이 백의사내에게서 사정을 캐기 위해 신경 써서 독단까지 제거한 터라 더욱 그러했다.
사내를 일으켜 앉힌 몽뇌산이 막 포량에게 한소리하려 돌아설 때였다.
쉬이익`─
미미한 소성과 함께 당진성이 놀란 얼굴로 부르짖었다.
“암습이다!”
다섯 명의 고수들이 일으키는 기운에 주위가 태풍을 만난 듯 흔들렸다.
“벌써 당했습니다.”
몽뇌산의 답답한 음성에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몽뇌산은 빠르게 녹아드는 사내의 몸에서 하나의 영패를 건져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완전히 세우기도 전에 사내는 한줌 흑수로 화했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어쩐지 이자를 잡고서도 찜찜하더니만 또 다른 자가 도사리고 있었구나.’
몽뇌산은 상대가 동료일지라도 살인멸구(殺人滅口)를 망설이지 않는 암중 적의 행동에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독수의 색깔이나 녹아드는 속도로 봐서 그를 격중시킨 암기에 묻어 있던 건 화골독(火骨毒) 같군요.”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그를 의심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몽뇌산은 어느새 덤덤해진 얼굴로 말을 잇고 있었다.
몽뇌산은 자신이 사내의 곁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미심쩍은 눈빛을 던지고 있던 당윤광에게 천천히
손에 들린 영패를 건넸다.
당윤광의 표정이 흠칫 굳어들었다.
“독기가 번지기 전에 건져 낸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는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신발 안창 속에 넣어져 있더군요.”
한참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당윤광의 손이 천천히 영패를 받아 들었다.
“광아! 뭐라고 써 있느냐?”
“앞면엔 사(蛇)! 그리고 뒷면엔 접(蝶) 십칠호(十七號)라고 쓰여 있습니다.”
몽뇌산은 잔뜩 미간을 좁히는 당진성을 보며 질문을 던졌
“어떤 집단인지 아시겠습니까?”
“으음! 아직은 잘 모르겠군.”
몽뇌산은 흐릿해지는 그의 눈빛을 보고 그가 뭔가 알아 냈음을 눈치챘지만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 생각으로는 용형초에 대한 정보도 믿기 어려울 것 같은데……”
“함정일지도 모른단 말인가?”
“사천으로 귀환하려던 순간에 그런 정보가 입수되었다는 것이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글쎄……”
어떻게 할지 답을 꺼리는 당진성을 보며 몽뇌산은 이들과 그만 헤어져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어쨌거나 저와는 방향이 다르니 여기서 그만 헤어지는 게 좋겠군요. 저도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길을 좀 서둘러야겠고 저기 포 방주도 돌아가서
수하 단속을 좀 해야 할 테니.”
당진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운 눈빛으로 몽뇌산의 손을 한 번 잡더니 곧 몸을 돌렸다.
영패를 품에 깊숙이 갈무리한 당윤광이 인사를 마치고 당진성의 뒤를 따르자, 손유경 또한 가만히 목례를 보낸 후 발길을 돌렸다.
몽뇌산은 손유경 일행이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턱 크게 내겠다며 붙잡는 포량을 억지로 떨치고 돌아섰다.
어느새 혈도가 풀려 포량의 노화가 고스란히 쏟아지길 기다리고 있는 야월방 수하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슬쩍 보내며 몽뇌산은 파양호가 있는 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생생하게 들려 오던 포량의 호통 소리가 갈대밭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갔다.
8화. 제4장 - 포하구(包河口) 일전(一戰) 1
뱃길을 따라 북상하여 몽뇌산이 이른 곳은 포하구(包河口)란 곳이었다.
배에서 내릴 것 없이 계속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파양호와 만나게 되지만 그 길로 가면 대신 많이 돌아가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몽뇌산은 포하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강을 끼고 서 있는 갈대숲을 가로질러 파양호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갈대숲은 근 십리에 걸쳐 뻗어 있었다.
몽뇌산도 단 두 번 보았을 뿐이지만 갈대꽃이 피는 가을이면 그 일대는 정말 장관이었다.
엷은 자줏빛을 띤 수만 개의 회백색 꽃들이 바람결을 따라 출렁이는 모습은 뭐라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몽뇌산은 드넓게 펼쳐진 갈대숲 앞에서 당시를 떠올리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각거리며 갈대들이 몸을 부딪치는 모습, 수면에 비추어진 갈대들이 물결을 따라 흔들리던 모습……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하얀 갈대숲이 달빛을 받아 눈가루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광경이었다.
몽뇌산은 물기를 잃은 갈대가지를 매만지며 때가 겨울임을 한탄했다.
앙상하게 마른 갈대가지 하나를 꺾어 입에 문 채 몽뇌산은 천천히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무리 지어 어울려 있는 갈대들을 좌우로 벌리며 느긋하게 전진하던 몽뇌산의 걸음이 어느 순간 딱 멈춰졌다.
몽뇌산은 물고 있던 갈대가지를 뱉으며 청력을 돋우었다.
채재재쟁`─`!
멀리서 갈대 스치는 소리와 분명히 구별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갈대밭에서의 싸움이라……?”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지면을 박차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갈대가지들이 그의 발 밑에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갈대 끝을 차내며 달린 지 반 각도 되지 않아 몽뇌산은 시전하던 경공을 멈추며 갈대 사이로 뚝 떨어져 내렸다.
굳이 공력을 일으켜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싸움 소리가 잘 들리는 걸 보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소리의
진원이 있는 듯했다.
몽뇌산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호흡마저 낮추었다.
갈대 사이에 은신하는 순간부터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기운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위치조차 판별되지 않을 정도라면 예사 고수가 아님이 분명했다.
몽뇌산은 암중인이 숨어 있는 위치를 찾아 내는 데 신경을 모으는 한편, 조심스럽게 앞으로 전진했다.
마침내 싸움이 잘 보이는 곳까지 다다른 몽뇌산의 얼굴에 별안간 놀라운 빛이 가득 찼다.
갈대 무리 틈새로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문으로 안 가고 왜 여기서……?’
몽뇌산은 인상을 쓰며 장내의 상황을 살폈다.
장내엔 황의와 흑의를 입은 두 무리의 인물들이 정신없이 얽혀 있었다.
얼른 보기엔 열다섯은 족히 넘어 보이는 흑의인 무리들이 황의인들을 포위하고 있어 싸움이 금세라도 끝날
것만 같았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셋밖에 안 되는 황의인들은 하나같이 고수 아닌 자가 없어서 쓰러지는 쪽은 오히려 흑의인들이었다.
‘당문에선 딸에게는 안 가르쳐 주는 비전절기들도 며느리에겐 가르쳐 준다더니, 과연 손
부인도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군.’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몽뇌산의 시선은 흑포인들 사이로 보이는 왜소한 황의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천초산을 내려갔던 손유경이었다.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일 점의 두려움도 없이 장력을 날리는 손유경의 모습은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했다.
그녀가 뿌린 장력에 맞부딪힌 자는 너나할것없이 픽픽 쓰러지는 것으로 보아 장력에 다른 한 수가 숨어 있는 듯했다.
몽뇌산이 그녀의 수법을 유심히 살피는 사이 다시 여섯 명의 흑의인들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대로라면 오히려 전멸을 면치 못하는 쪽은 흑의인들이 될 것 같았다.
몽뇌산이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장내를 지켜볼 때였다.
싸움통에 어느새 공터로 화한 장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던 갈대숲 한쪽이 한꺼번에 꺾여 넘어지며 적포를 걸친 한 인물이 질풍처럼 밀어닥쳤다.
장내에 들이닥쳐 채 어떤 행동을 보이기도 전에 그의 입에선 욕부터 터져 나왔다.
“이 등신 같은 놈들! 벌써 일을 끝내고도 남을 시간에 어떤 놈들은 바닥에 개구리처럼 퍼져 있질 않나, 또 어떤 놈들은 뭐 마려운 개처럼 쩔쩔매고 있으니…… 그러고도 밥 처먹고 사냐?”
걸걸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악다구니를 써대는 적포대한의 모습은 엄청나다는 말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손에 사람 키만한 도를 들고 다짜고짜 장내로 뛰어들어 바닥에 쓰러진 흑의인들을 집어던지는 모습은 삼국시대 장비가 현신(現身)한 것만 같았다.
둥글넓적한 얼굴엔 고슴도치 같은 수염이 빽빽히 돋아 있었고, 부릅뜬 눈은 불가의 사천왕(四天王)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쓰러진 자들을 다 치우고 난 다음 그가 한 일은 손유경이 밀어 낸 장력에 무심코 맞서 가던 흑의인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것이었다.
보통 이상의 체격을 가진 흑의인을 짚단처럼 가뿐히 들어올려 뒤로 내던지면서도 그에게선 욕설이 끊이질 않았다.
“닭 대가리 같은 놈! 장력 속에 암기가 섞여 날아오는 줄도 모르고 미친 놈처럼 거기다 손을 내밀어? 그렇게 죽고 싶거든 차라리 내 눈앞에서 그냥 배 가르고 죽어! 그럼 멋있게라도 보일 거 아냐, 썅!”
있는 대로 고함을 치는 그의 서슬에 놀라 흑의인들이 일제히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그러자 가뜩이나 화등잔만하던 적포대한의 눈이 더 커지며 살기에 가까운 빛이 이글거렸다.
“지렁이 대가리들! 그런다고 적을 앞에 두고 물러나? 이래 가지고 앞으로 내가
네놈들 믿고 장사하겠냐, 응? 아주, 오늘 내 손에 다 죽어 버려!”
기세로 보아서는 정말 흑의인들 모두를 죽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멍해진 것은 당문인들 쪽이었다.
심지어 경험이 많은 당진성조차도 일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빛이 가득했다.
그때, 적포대한이 쓸어 넘긴 갈대숲 쪽에서 다시 한 인물이 잽싸게 튀어나와 대뜸 적포대한에게 매달렸다.
“방주님! 고정하십시오. 지금은 적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방도들을 다스리시더라도 싸움을 끝낸
후에 하십시오, 방주님. 제발……”
적포대한의 다리에 납작하게 붙어 애원하는 회의인의 모습은 필사적으로 보였다.
“무엇들 하는가? 어서 저들을 공격하게!”
회의인은 얄팍한 눈을 짐짓 위엄있게 치뜨며 한쪽에 몰려 서 있는 흑의인들을 다그쳤다.
흑의인들이 다시 사생결단을 내려는 기세로 손유경 등을 향해 몰려가자 씨근덕거리고 있던 적포대한이 회의인의 팔을 떨쳐 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여자를 잡아! 나머지 둘은 내가 맡는다!”
대도를 한번 크게 휘두른 뒤 적포대한은 당진성과 당윤광을 향해 돌진했다.
그래서 싸움은 다시 새로운 상황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몽뇌산은 방주라는 적포대한을 흥미 진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모습만 장비 같은 게 아니라 용맹한 것도 그에 못지않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실력도 상상 밖이었다.
당윤광이야 그렇다 쳐도 당진성은 당문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데도 불구하고 일시지간에 적포대한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당진성이 곤혹스런 눈빛을 흘리는 동안 적포대한은 대도를 들고 좌충우돌, 그들을 마구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여간 패도(覇刀), 그 자체로구나!’
잠시 감탄하던 몽뇌산은 이내 뒤에 나타났던 회의인을 주시했다.
그가 자신이 생각하던 그 사람인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저 적포대한은 기질상 내가 아까 암중인에게서 느꼈던 기운을 도저히 낼 수 없을 것
같고, 저 회의인은 비슷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기세가 다르다. 그럼 또 다른 인물이……?’
몽뇌산은 한쪽에 서서 싸움을 보며 쉴새없이 눈을 굴리고 있는 회의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가 갈대 사이로 은신할 때 느꼈던 암중인의 기운은 특별히 그를 겨냥한 것이 아님에도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어쩌면 그게 바로 말로만 듣던 살수의 기운일지도 몰랐다.
확신할 순 없지만 몽뇌산은 피부를 축축하게 휘감는 그 음습한 기운에 대해 거의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누군지 알아 낼 방법이 한 가지 있지.’
몽뇌산의 눈동자가 묘한 결심의 빛을 뿜음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갈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곤 다짜고짜 적포대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도(刀)! 크기만큼 위력이 있나?”
그걸로 충분했다.
거의 광분해서 달려드는 적포대한을 보며 몽뇌산은 싱긋 웃었다.
그의 손에서도 곧 칼날 같은 예기가 피어올랐다.
* * *
손유경은 오늘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참 많이 만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원래 당문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에 필요한 독초 중 하나인 용형초(龍形草)를 찾기 위해
천초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로를 어떻게 알았는지 눈앞의 흑의인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일은 손유경뿐만 아니라 모두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아무도 내색은 안 했지만 모두들 암흑가의 세력쯤으로 보이는 흑의인 무리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걸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다면 이번 일은 한 가지를 뜻했다.
그들의 행적이 적에게 완전히 노출되었다는 것!
그것은 비단 그들 세 명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당문 전체가 적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됐다.
그들의 적이란 눈앞의 저 흑의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의 진짜 적에 비하면 저들은 티끌만도 못한, 극도로 하찮은 존재였다.
사실 저 적포대한을 제외하고 흑의인들 중 그녀의 제대로 된 일장을 받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어떻게 그들의 행로가 밝혀졌는지, 그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터에 천초산에 있어야 할 몽뇌산까지 불쑥 나타나 흑의인들의 수령과 싸우고 있으니……
손유경은 혼란스런 마음을 가다듬으며 맥없이 손 놓고 서 있는 당진성과 당윤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몽뇌산과 적포대한의 숨막히는 접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들이 부랴부랴 달려와 흑의인들을 제압했다.
“좀 전에 나타난 회의인도……!”
흑의인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나서 바람처럼 몸을 돌리던 당윤광의 시선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약삭빠르게 벌써 사라졌군요.”
손유경의 말에 당윤광이 침중한 얼굴로 돌아섰다.
“서둘러 출발을 해야겠구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싸움이 끝나는 거나 보고 가자. 저자에게 물어 볼 말도 있고.”
곁으로 다가온 당진성이 눈짓으로 몽뇌산 쪽을 가리켰다.
아수라장으로 화한 그곳에서 몽뇌산과 적포대한의 싸움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몽뇌산은 일부러 싸움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진천독공을 사용했다면 벌써 끝났을 싸움이지만 몽뇌산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적포대한이 흉포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단순하고 우직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적포대한은 단순히 이용당한 것에 불과했다.
회의인이 혼전을 틈타 슬며시 사라지자 사태는 더 자명해졌다.
그가 회의인의 도망을 알고도 막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젠 직접 나오지 않고 못 배기겠지.”
나직하게 중얼거린 몽뇌산의 귓속으로 갑자기 우렛소리가 파고들었다.
“뭐? 뭐라고 구시렁대는 거냐!”
몽뇌산은 적포대한의 고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정신이 흐트러져 하마터면 대도에 가슴팍이 갈라질 뻔하였다.
몽뇌산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잠시 둔해졌던 그의 쌍수가 원활하게 움직이며 줄기줄기 해일 같은 경기를 쏟아 냈다.
빨랫줄처럼 이어져 나오는 장력이 대도가 휘둘러지는 길목 길목을 빈틈없이 막아 갔다.
카가가강`─`!
맹렬한 금속성이 일며 적포대한의 대도에서 불똥이 튀겼
몽뇌산에 의해 도가 가로막히자 적포대한은 굉량한 웃음과 함께 도를 하늘로 쳐들더니 이내 도끼처럼
내리찍기 시작했
쑤아아`─`!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도의 날이 지척으로 다가들자 몽뇌산은 쌍수를 교차시키며 강하게 밀어 냈다.
사왕권 최고의 방어 수법인 밀막영(密幕影)이었다.
촘촘한 그물처럼 교차된 암경이 도의 기세를 그대로 맞이했다.
콰광`─`!
요란한 폭음이 울리며 몽뇌산의 신형이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숨돌릴 새도 없이 대도의 그림자가 재차 떨어져 내렸다.
콰과광!
다시 한 번 천지가 요동쳤다.
아까와 달리 비록 세 걸음이었지만 몽뇌산은 다시 한 번 물러나고 있었다.
‘역시 그냥 막는 걸로는 부족한가?’
몽뇌산은 저릿저릿한 양팔에 기를 집중시키며 앞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갔다.
“으하하하! 그렇게 싸워야 진짜 사내지.”
그 와중에서도 적포대한의 손에 들린 도는 이전보다 더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몽뇌산은 도가 떨어져 내리는 지점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
그의 손끝에 걸린 대기가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합장하듯 모아진 그의 쌍수가 길게 늘어난다 싶은 순간, 뿌연 기운이 엿가락처럼 빠져 나오며 마주 오던 대도에 작렬했다.
마치 대지에 꽂히는 뇌전을 보는 것만 같았다.
퍼어엉`─
따당!
두 가지 소리와 함께 천지사방에 회오리가 쳤다.
당진성 등이 손을 써 부드럽게 흙먼지들을 가라앉히지 않았다면 한동안 장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의 시선이 먼지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광경에 집중되는 순간,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허공으로 누군가가 번개같이 솟구치더니 그대로 사 장쯤 떨어진 좌측 갈대밭을 덮쳐 갔다.
무형의 기운에 일제히 몸을 누이는 갈대 속에서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일며 희뿌연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 뒤를 바짝 쫓아 솟구친 인영이 앞선 이와 이내 한 몸처럼 붙었다 싶은 순간, 은은한 청광이 번쩍하고 빛났다.
곧 이어 하나의 인영이 끈 떨어진 연처럼 추락했다.
* * *
사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혈을 제압당하고 뒤집어쓰고 있던 백색 복면이 벗겨졌는데도 눈빛 하나 바꾸질 않았다.
가면을 쓴 것처럼 사내의 표정은 철저하게 무심 일변도를 걷고 있었다.
냉혹하게 번들거리고 있는 눈동자만 아니라면 석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몽뇌산은 혀를 찼다.
사내는 그의 생각대로 역시 특수한 훈련을 거친 전문 살수였다.
만약 그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적포대한의 공격에 맞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갈대밭에 몸을
은신한 채 그들을 지켜보던 사내의 호흡이 무심결에 가빠지지 않았다면
결코 잡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몽뇌산은 당진성 등의 침중한 얼굴을 흘끗 보고는 다시 사내를 살폈다.
“백의를 입고 백색 복면을 착용하는 집단이 어딘지 아십니까?”
그의 물음에 당진성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백의를 입는 곳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게다가 복면이야 이런 일을 하자면 으레 뒤집어쓰게 마련 아닌가?”
당진성의 말대로라면 사내의 겉모습을 살펴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몽뇌산이 사내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때 별안간 괴성이 울리며 집채만한 그림자가 사내를 덮쳤다.
“이 새끼! 감히 우리 야월방(夜月幇)을 이용해 먹다니!”
몽뇌산은 미친 듯이 날뛰는 적포대한을 겨우 떼어 놓고는 한 대 맞고 피떡이 돼버린 사내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받은 훈련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던지 부러진 이빨과 함께 피를 게워 내면서도 의식은 잃지 않고 있었다.
몽뇌산은 적포대한, 남경부 내의 암흑가를 장악하고 있다는 야월방의 방주인 포량(包量)을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물론 그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믿었던 수하가 적과 내통하여`─`어쩜 애초부터
적의 일당이었는지도 몰랐다`─`방을 팔아 넘겼으니 오죽 분통이 터지겠는가!
몽뇌산은 백의사내가 잡힌 후에 잇따라 잡혀 벌써 포량의 손에 곤죽이 돼버린 회의인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회의인은 포량의 포악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한 대 맞고 나서 즉시 독단을 깨물었다.
그가 흑혈을 토하며 죽어 버리자 화를 분출할 곳을 찾던 포량이 백의사내를 노린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포량의 손에 죽는 것은 여기 있는 누구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몽뇌산이 백의사내에게서 사정을 캐기 위해 신경 써서 독단까지 제거한 터라 더욱 그러했다.
사내를 일으켜 앉힌 몽뇌산이 막 포량에게 한소리하려 돌아설 때였다.
쉬이익`─
미미한 소성과 함께 당진성이 놀란 얼굴로 부르짖었다.
“암습이다!”
다섯 명의 고수들이 일으키는 기운에 주위가 태풍을 만난 듯 흔들렸다.
“벌써 당했습니다.”
몽뇌산의 답답한 음성에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몽뇌산은 빠르게 녹아드는 사내의 몸에서 하나의 영패를 건져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몸을 완전히 세우기도 전에 사내는 한줌 흑수로 화했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어쩐지 이자를 잡고서도 찜찜하더니만 또 다른 자가 도사리고 있었구나.’
몽뇌산은 상대가 동료일지라도 살인멸구(殺人滅口)를 망설이지 않는 암중 적의 행동에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독수의 색깔이나 녹아드는 속도로 봐서 그를 격중시킨 암기에 묻어 있던 건 화골독(火骨毒) 같군요.”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그를 의심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몽뇌산은 어느새 덤덤해진 얼굴로 말을 잇고 있었다.
몽뇌산은 자신이 사내의 곁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미심쩍은 눈빛을 던지고 있던 당윤광에게 천천히
손에 들린 영패를 건넸다.
당윤광의 표정이 흠칫 굳어들었다.
“독기가 번지기 전에 건져 낸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는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신발 안창 속에 넣어져 있더군요.”
한참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당윤광의 손이 천천히 영패를 받아 들었다.
“광아! 뭐라고 써 있느냐?”
“앞면엔 사(蛇)! 그리고 뒷면엔 접(蝶) 십칠호(十七號)라고 쓰여 있습니다.”
몽뇌산은 잔뜩 미간을 좁히는 당진성을 보며 질문을 던졌
“어떤 집단인지 아시겠습니까?”
“으음! 아직은 잘 모르겠군.”
몽뇌산은 흐릿해지는 그의 눈빛을 보고 그가 뭔가 알아 냈음을 눈치챘지만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 생각으로는 용형초에 대한 정보도 믿기 어려울 것 같은데……”
“함정일지도 모른단 말인가?”
“사천으로 귀환하려던 순간에 그런 정보가 입수되었다는 것이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글쎄……”
어떻게 할지 답을 꺼리는 당진성을 보며 몽뇌산은 이들과 그만 헤어져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어쨌거나 저와는 방향이 다르니 여기서 그만 헤어지는 게 좋겠군요. 저도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길을 좀 서둘러야겠고 저기 포 방주도 돌아가서
수하 단속을 좀 해야 할 테니.”
당진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운 눈빛으로 몽뇌산의 손을 한 번 잡더니 곧 몸을 돌렸다.
영패를 품에 깊숙이 갈무리한 당윤광이 인사를 마치고 당진성의 뒤를 따르자, 손유경 또한 가만히 목례를 보낸 후 발길을 돌렸다.
몽뇌산은 손유경 일행이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턱 크게 내겠다며 붙잡는 포량을 억지로 떨치고 돌아섰다.
어느새 혈도가 풀려 포량의 노화가 고스란히 쏟아지길 기다리고 있는 야월방 수하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슬쩍 보내며 몽뇌산은 파양호가 있는 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생생하게 들려 오던 포량의 호통 소리가 갈대밭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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