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제3장 - 강호출도(江湖出道) 1

조회수 6 15세 이상 이용가 수정 2026.09.19
독로무한
6화. 제3장 - 강호출도(江湖出道) 1


이상한 일이었다.
사 년여 만에 사문에 돌아와 모처럼 단잠을 잔 몽뇌산은 아침부터 느닷없이 사부가 자신을 이끌고 소사곡으로 내려가자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감진택은 간단히 대답했다.
“가보면 안다.”
잠시 후, 몽뇌산은 소사곡의 서쪽에 떡하니 자리한 암벽 앞에 서 있었다.
일언반구도 없이 그를 이끌고 내려온 감진택은 어리둥절해 서 있는 몽뇌산을 향해 대뜸 엉뚱한 걸 물어 왔다.
“무림인으로서 너의 우상(偶像)은 누구냐?”
몽뇌산은 사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상?’
그런 게 꼭 있어야 하는 건가?
그가 멀거니 서 있기만 하자 감진택의 재촉이 이어졌다.
“자, 누군지 어서 말해 보아라! 네가 설령 마도(魔道)의 인물을 말한다 해도 나는 나무랄
생각이 없다. 어차피 강호에서는 독문도 그렇게 좋은 시각으로
보고 있지 않으니, 마도와 처지가 그다지 다르다고 할 수도 없지. 그래, 누구냐?”
감진택의 재촉에 몽뇌산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제일 되고 싶었던 게 표사란 건 아시죠? 가끔씩 보았던 표사 복장이 어찌나 멋있던지……”
생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에 대해 대답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색한 일이다.
몽뇌산은 말을 슬쩍 흐리며 사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 지금은? 십만대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강호고수들에 대한 풍문을 적잖이 들었을 터인데……”
“글쎄요…… 듣긴 했지만 특별히 감동받은 사람은 없는데요.”
감진택의 눈가에 잔경련이 일며 광대뼈 주위가 점점 붉어졌다. 그건 감진택이 화가 나기 시작했단 표시였다.
몽뇌산은 뜨끔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감진택의 입에서 나온 것은 기다리던 고함 소리가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는 긴 한숨 소리였다.
“후`─`! 그래, 좋다. 그럼 다른 걸 물어 보마. 네가 강호를 횡보(橫步)할 때, 만약 누가 너를 죽이려 한다면 어찌하겠느냐?”
“저를요? 절 왜요?”
어리둥절해 하는 몽뇌산을 보며 감진택은 냉랭한 음성으로 딱 잘라 대답했다.
“강호에 항상 이유있는 죽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상관옥영의 일을 떠올리며 몽뇌산은 그 말에 수긍을 했다.
“그런 일이 없는 게 제일 바람직하겠지만…… 누가 싸움을 걸어 온다면 응당 맞서 싸워야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몽뇌산의 얼굴은 시큰둥했다. 호기심 때문에 이러 저러한 싸움에 많이 끼여들어 본 그였지만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별로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다.
감진택의 표정이 지독히 냉소적으로 변했다.
“자기 목숨 지키는 일에 너같이 시큰둥해 하다간 비명횡사(非命橫死)하기 딱 십상이겠구나. 그럼 이건 어떠냐?
누구와 싸워서 네가 패했다. 그때 넌 어떻게 하겠느냐?”
“그 싸움에서 제가 얼만큼 다친 거죠?”
“너……!”
감진택의 눈썹이 와락 곤두섰다.
“왜요? 죽을 만큼 다쳤으면 어떻게 하고 자시고도 없는 거잖아요!”
“관둬라! 너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매몰차게 말을 끊으며 감진택은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무슨 결정을 내린 것인지는 그만이 알 일이었다.
머쓱해져 서 있는 몽뇌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감진택은 말없이 손으로 암벽을 가리켰다.
“네?”
몽뇌산은 영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쳐라!”
한참 만에 한마디 툭 던진 감진택의 음성은 얼음이 뚝뚝 부러지는 것 같았다. 그만큼 노했다는 증거였다.
“사부님! 암만 노하셨어도 설명은 제대로 해주셔야죠! 대뜸 무조건 치라니……!”
“이 녀석! 만청독수(萬靑毒手)를 시전하여 벽에 장인(掌印)을 남겨 보란 말이다. 물론
진천독공(震天毒功)을 운용하여 독기(毒氣)까지 실어서!”
엄하게 불호령을 내린 뒤 감진택은 몽뇌산에게 자리를 내주며 뒤로 물러났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잡으시지? 잘못하다간 뼈도 못 추리겠네.’
몽뇌산은 다시 한 번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 냉큼 암벽 앞에 가서 섰다.
“물러나라!”
“네?”
뒤를 돌아보는 몽뇌산을 향해 감진택은 말없이 손가락 세 개를 꼽아 보였다.
몽뇌산은 한참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 자리에서 삼 장 밖으로 물러났다.
다시 자리를 잡은 몽뇌산은 진중한 표정으로 진천독경의 정화인 만청독수의 기수식(起手式)을 취했다.
잠시 숨을 고른 그에게서 우렁찬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하압!”
가슴 앞에 곧추세웠던 그의 우수가 투명하게 빛나더니 새벽 안개처럼 푸르스름한
기운이 자욱이 일어나며 뇌전처럼 앞으로 뻗었다.
쿠구구구`─
소용돌이치며 나아가는 청선(靑線)의 뒤를 따라 대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언뜻 그의 손 그림자가 암벽과 맞닿았다 싶은 순간, 마치 벽이 푸르게 물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퍼엉`─`!
북을 치듯 요란한 소리가 소사곡을 뒤흔들었다.
일수를 선보인 몽뇌산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비켜났다.
감진택은 어느새 다가가 벽을 살피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벽에 새겨진 청색 장인을 살피던 그가 냉정한 눈빛으로 몽뇌산을 돌아보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네가 그 짝이로구나! 봐라! 장인에 남겨진 독기의 색이 고르지 않음은 네가 독기를 조절하는 능력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이고, 소리가 그처럼 요란함은 네 성취가 고작 육 성에 불과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독기의 푸른색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또한 네 화후(化候)의 미미함을 드러내는 것! 만청독수가 일단 십
성의 경지를 넘어서면 소리가 사라지고〔無音〕, 독기의 푸른색이 사라지며〔無色〕, 그 독기의 발출(發出)과 경중(輕重)을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게 되니,
그때에 이르면 누가 있어 너를 가볍게 볼 수 있으랴.”
몽뇌산은 거뭇거뭇한 암벽에 두 치 깊이로 뚜렷하게 찍힌 자신의 장인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가 보기엔 썩 괜찮아 보였다.
“네가 사 년간 이만큼 이룩한 것은 어찌 생각하면 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고 여기서 만족할 셈이냐!”
몽뇌산은 감진택의 질책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부의 염원을 잘 알고 있는데 더 무슨 말을 하랴!
“너도 알겠지만 나는 만청독수를 팔 성까지밖에 못 익혔다. 나이 사십에 그 경지에
이르렀는데 나이 육십에 이르도록 그걸 뛰어넘지 못했다. 하나,
너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감진택의 단호한 음성에는 지난 세월 동안 그가 혼자서 끌어안고 살아야만 했던 가슴 깊은 곳의 한이 배어 있었다.
“조사의 수련법만 전해졌어도 독중지성(毒中之聖)의 경지에 이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게다. 그것만 있었어도……!”
‘조사의 수련법?’
몽뇌산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궁금증이 무럭무럭 피어오른 얼굴로 몽뇌산이 고개를 들었을 때, 감진택은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몽뇌산의 입에서 나직한 뇌까림이 흘러나왔다.
“독중지성이 되는 수련법이라……!”
새로운 흥미거리를 찾은 듯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빛나고 있었다.
잠시 후, 사문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몽뇌산은 천천히 몸을 돌려 조금 전에 마주했던 암벽을 바라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장인(掌印)!
몽뇌산은 앞으로 몇 발자국 다가가 움푹 파인 장인을 어루만졌다.
깊이는 두 치!
거뭇거뭇한 암벽을 푸르게 물들인 것은 바로 진천독기!
몽뇌산은 장인에다 손을 밀어 넣었다.
퍼억`─`!
손바닥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연기를 보며 몽뇌산은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리곤 연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별안간 몸을 휙 돌렸
암벽에 남은 장인은 어느새 다섯 치가 되어 있었다.
비록 거리에 차이가 있었다곤 하나 좀 전에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아무튼 모를 일이었다.
* * *
몽뇌산은 곡내를 가로질러 한쪽에 난 소로로 막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운차게 움직이던 몽뇌산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 점점 느려지더니 완전히 멈추고 말았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엔 언제 나타났는지 황의를 입은 이남일녀의 모습이 잡히고 있었다.
나루터에서 만났던 당문인들이었다.
몽뇌산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었
“소형제! 말 좀 묻겠네.”
부리부리한 호목이 꽤나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었던 황의중년인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별반 표정없는 얼굴로 멀거니 쳐다보는 그를 향해 황의중년인이 문득 이채를 떠올렸다.
“우리는 구면(舊面)인 것 같군.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만날 때마다 뭘 물어
봐서 안됐네만, 이곳이 소사곡 맞는가?”
몽뇌산은 지난번과 똑같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 봄세. 혹시 소사곡에 독사가 먹는다는 독초가 있단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이번에도 끄덕끄덕!
몽뇌산의 반응을 기다리던 황의중년인의 눈동자에 강한 안광(眼光)이 솟구쳤다.
“그게 소사곡 어디쯤에 많이 자라고 있는지 아는가?”
황의중년인의 질문이 끝나자 나머지 두 사람도 일제히 몽뇌산의 입을 주시했다.
몽뇌산은 계속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다.
황자초에 이어, 무엇 때문에 사모초까지 찾고 있는 건지 내심 궁금했다.
“많이 자라는 곳을 알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군요.”
“우리가 그 풀이 지닌 독에 중독될까 봐 그러는 것이라면……”
“아니요, 그걸 염려하는 게 아니라 그 풀을 염려하는 겁니다. 제철도 아닌데 그걸 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문제죠. 만약 여기서 그걸 발견하신다면 자라야 할
때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그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증거니까요.”
몽뇌산은 입을 닫고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황의중년인은 몽뇌산의 진의를 살피려는 듯 심각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제껏 한 마디도 않고 있던 황의노인이 입을 열었다.
“철이 아니라구?”
몽뇌산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가 거짓말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양, 황의노인의 질문은 거의 심문조에 가까웠다.
몽뇌산의 눈썹이 있는 대로 치켜 올라갔다. 평소 늘 유쾌해 보이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믿기지 않으면 직접 찾아보시든가요!”
몽뇌산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휑, 하니 돌아섰다.
“멈추게!”
황의노인이 그의 퉁명스런 태도에 불쾌함을 느낀 듯, 호통을 치며 몽뇌산의 팔을 잡아 갔다. 놀랍도록 빠른 출수였다.
그러나 몽뇌산은 어느새 몸을 회전시키며 옆으로 일보 물러서고 있었다.
그 바람에 노인의 손은 헛되이 공기만 가르고 말았다.
“자네가 무공을 지녔다는 걸 잊고 있었군.”
어느새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황의노인이 뒷짐을 지며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언제 그걸 다시 볼 수 있는가?”
노인의 음성은 이미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몽뇌산은 천천히 단전에 모았던 공력을 풀며 답했다.
“그건 뱀한테 물어 보셔야 할걸요. 잠에서 깨어나는 시기는 그놈이 결정하는 거니까.”
“그 전엔 구할 방도가 없겠나?”
황의노인의 눈빛에는 간절함 바람이 담겨 있었다. 아니, 황의노인뿐만 아니라 곁에 선 중년인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절실함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그 옆에 황의를 입고 있는 여인만이 그 순간에도 아무 표정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몽뇌산은 한참을 잠자코 있었다.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에 황의노인은 애가 타는지 재차 부탁을 했다.
“사실 우리는 당문(唐門)에서 나왔다네. 그 독초, 자네가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모초라 불리는 그 독초를 찾기 위해 우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 그러니 알고 있다면 부탁하네. 노부 당진성(唐眞星)의 이름 석 자를
걸고서라도 자네의 은혜는 잊지 않겠네.”
당문, 사천당문!
오대세가(五代世家)의 하나이며 사천성 제일의 문파임과 동시에 사천무림 제일의 명가!
노인의 음성에서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일개 독과 암기를 다루던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강호의 내로라 하는 명문이 되기까지 당문이 기울인
노력은 피눈물이 날 정도로 처절했다.
어찌 보면 천독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는 당문이었다.
가문을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많은 자손들이 암기수법을 발전시키다가 목숨을 잃었고,
독을 연구하는 과정에서도 또 그만큼의 희생이 따랐다.
그러나 그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마침내 당문은 무명의 시절을 벗어나 독과 암기로는 천하제일이라는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사람은 역시 이름이 나고 볼 일이라던가?
강호에서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문파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은 ‘나를 함부로 건들지 말아라!’하는 말과 똑같았다.
당문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당진성이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당문의 이름을 들먹였다면 그 시도는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유감스럽게도 몽뇌산은 눈썹 한 오라기조차도 까딱하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당문 사람이라는 것도, 그 독초 이름이 사모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 한 가지 더! 저와 당문의 인연이 절강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요.”
몽뇌산의 말은 묘한 여운을 담고 있었다.
“절강성?”
당진성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노인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몽뇌산은 대답 대신 중년인의 등에 걸린 봇짐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때, 황의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절강성에서 그의 황자초를 가져 간 일을 말하는 것 같군요. 왜
배에서 진작 말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너무도 뜻밖인 황의여인의 말에 몽뇌산은 오히려 할말을 잃고 말았다.
‘알고 있었단 소린가?’
그가 채 뭐라 답하기도 전에 황의중년인, 사천당문주 당치평(唐治平)의 동생인 비룡수(飛龍手)
당윤광(唐潤光)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섰다.
“배에서? 네 말은 이 사람이 배에서부터 알고 있었는데 아무 말 않고 있었다는 뜻이냐?”
그의 음성에는 지금의 당황스런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마화초(魔花草)를 구하고서 남하하던 길에 황자초를 처음 발견했을 때, 하늘이 당문을 돕는다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비록 주인 있는 것을 무단으로 가져 온 게 좀 께름칙하긴 했으나, 지금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일은 그런 감정마저 무시할 정도로 중대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경이었다.
황자초의 원래 임자를 이렇게 불시에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민망한데, 거기다 상대의 인심으로 가문의 망신을 면한 바에야……
얼굴까지 붉히는 당진성과 당윤광을 보며 몽뇌산은 도리어 입장이 난감해짐을 느꼈다.
“그 얘긴 그만두시죠.”
그런 몽뇌산을 보며 당진성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십 년 동안의 피나는 노력을 무위(無爲)로 돌릴 수는 없었다.
“으음…… 소형제! 자네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네만 자네가 사모초를 구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그것을 좀 빌려 주게. 뻔뻔하다 욕해도 할말이 없네만 사정이 급하다네.”
“본 문에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죠.”
여인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몽뇌산은 그녀의 깊은 눈매에서 묘한 냉소(冷笑)의 빛을 보고는 말없이 눈을 치켜 떴다.
‘허무함에다 냉소까지……!’
보통의 젊은 여인이라면 도저히 지니기 힘든 면들이 그녀에겐 상당히 많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데요?”
난데없이 튀어나온 그 얘기에 황의여인이 가만히 몽뇌산을 바라보았다.
“손유경(孫柳敬)이에요. 당문의 며느리 되는 사람이죠.”
그녀의 대답은 묘하게도 비현실적이었다. 답 자체가 그렇다기보다는 그 어감이 그러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정말 특이한 데가 있는 여인이었다.
몽뇌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저는 몽뇌산이라고 하죠. 부인도 제가 사모초를 빌려 드리길 바라십니까?”
몽뇌산은 손유경이 가만히 입술을 깨무는 걸 지켜보았다.
‘왜 망설이는 걸까?’
분명 손유경의 눈빛엔 갈등이 스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갈등인지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라지긴 했지만.
“네!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음성은 예상 밖으로 단호했다.
몽뇌산은 손유경에게서 시선을 돌려 잔뜩 기대 어린 눈빛을 보내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곧 가져다 드리죠.”
몽뇌산은 소로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당진성과 당윤광은 그가 경공을 펼치지 않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뇌산의 신형이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자 놀라움과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서로의 눈길을 찾았다.
“광아!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으냐?”
“그가 사모초를 정말 구해 올지 아닐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윤광이 굳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당진성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간을 좁히는 것은 당진성이 깊이 생각할 때의 버릇이었다.
“아니, 그것말고 그의 무공내력을 말하는 거다. 어느 문파 출신일까?”
“아까 숙부님의 일수를 피할 때 그가 사용한 무공의 연원에 대해 혹시 짐작 가는 바가 없으십니까?”
당윤광의 눈빛에도 궁금함이 가득했다.
“황자초도 그렇고 사모초에 대한 지식도 적지 않은 것을 보니 독문의 인물인 것 같기도
하고, 가만있어 보자…… 강서성 남경부 어디에 독문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당진성도 아까부터 생각을 더듬고 있었으나,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쨌거나 정말 운이 좋았다. 물론 그가 사모초를 가져 온다는 전제하에서지만!”
당진성은 강렬한 눈으로 소로를 주시했다. 거기서 눈길을 떼면 운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조급한 마음은 아랑곳없이 시간은 더디게만 흐르고 있었다.

* * *
감진택은 몽뇌산이 각지에서 채집한 독초를 모아 두는 창고를 죄다 들쑤셔 놓고는 밖으로 뛰쳐 나가 반
시진이 다되도록 돌아올 생각을 않자
절로 나오는 한숨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의 손이 포단 밑으로 들어갔다가 무언가를 움켜쥐고 다시 빠져 나왔다.
손 안에 있는 반 토막짜리 도를 바라보며 감진택은 생각에 잠겼다.
그를 찾아왔던 전유담이란 사람은 자신이 옥합을 가져 갈 처지가 못 된다고 하였다.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소사곡까지 오는 데 너무 긴 시간을 허비하여 행적이
이미 노출되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던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워 보였다.
도대체 누구의 이목을 걱정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표정으로 보아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본래는 친구의 부탁이니만큼 그가 직접 옥합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몽뇌산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애초에 그가 몽뇌산을 십만대산까지 보냈던 이유는 그곳이 단순히 독공을 수련하기에 적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십만대산은 먼 곳이었다.
그리고 물론 감진택은 어린 제자가 천초산 밖으로 벗어나 본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멀다는 말도 해주지 않고 길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은 채 몽뇌산을 매정하게 쫓아
내듯 보내 버렸다.
그도 젊은 시절 그곳에 다녀온 적이 있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십만대산은 결코 지내기에 수월한 곳이 아니었다.
가는 길이 힘들기도 하려니와 도착해서도 깜깜절벽처럼 아득한 곳이 바로 십만대산이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와 산밖에 보이지 않는 곳!
한여름, 울창한 원시림(原始林)에 둘러싸여 숨이 막힐 듯한 더위와 싸우다 보면 거기가 바로 지옥이었다.
그런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감진택이 바랐던 것은 몽뇌산이 강인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몽뇌산의 성격은 보기보다 강한 데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험난한 수련 과정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모름지기 사내, 그것도 무림인이라면 마땅히 원대한 야망과 독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특히 어렵고 고생스런 독문인의 길을 가자면 무엇보다도 독심(毒心)이 필요했다.
강호는 그야말로 강자존(强者存), 약자멸(弱者滅)의 세계!
철저히 자신을 단련하지 않으면 하루도 배겨 낼 수 없는 곳이 바로 강호였다.
감진택은 몽뇌산이 그런 강호에 대해 제대로 알길 원했다.
천독문의 실정을 생각하면 몽뇌산을 도저히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천독문의 개파 조사라 할 수 있는 절대독유(絶對毒儒) 유진상(留瑨相) 대사조께서 독중지성의 경지에
이르렀던 분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분이 어떻게 그
경지에 도달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실 유진상 조사와 천독문 사이에 얽힌 그 복잡한 사연을 어찌 한마디 말로 다 풀어 내랴.
다만 독중지성이 되는 방법을 알아 내기 위해 천독문의 문인들이 바친 노력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방법이 실패로 돌아갔고 천독문은 점점 퇴락(頹落)해져만 갔다.
사정이 이쯤 되자, 천독문의 역대 문주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조사께서 독공을 얻으신 곳이라고 알려진 묘강에 찾아가 조사의 행적을 따라가 보는 것이었다.
많은 문인들이 묘강으로 떠났고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했
천독문의 문인 수는 점점 줄어만 갔고 그나마 남아 있는 문인들도 묘강에는 절대 가지 않으려 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안 보이는 얼굴이 하나씩 생겨났다.
더는 방법이 없었다.
감진택이 문주위를 물려받을 무렵에 이르러 남아 있는 문인이라곤 그의 여섯 살바기 아들놈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아들아이 또한 자의로 남아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
그렇지만 그 아들놈이 자라서 문주위를 물려받으면 감진택은 홀가분하게 묘강으로 직접 떠나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문주 자리를 물려 줘도 되겠거니 생각될 만큼 키워 놓자 아들놈은 독문인으로 살아 가기 싫다며 과거를 봐서 관리가 되겠다고 집을 뛰쳐 나가 버렸다. 그 후 감진택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의절하고 지냈다.
아들의 행동은 그의 성격으론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육 년 전의 일이었다.
결국 감진택은 묘강으로 떠나는 일을 포기해야만 했다.
일단 도착하면 묘강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거기서 불행을 당할 경우 천독문은 그날로 끝이었다.
비록 퇴락한 이름이나마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면 무슨 낯으로 조사들을 대한단 말인가!
그로부터 일 년 남짓 후 괴상하다 싶을 만큼 엉뚱한 녀석이 천독문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그게 바로 몽뇌산이었다.
감진택은 좀 전에 소사곡에서 내린 결정을 되새겼다.
하나 있는 제자의 무인으로서의 앞날과 천독문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고생을 더 시키자!
약하면 잡아먹히는 강호의 실상을 직접 겪어 보아야 한다!
전유담의 말에 의하면 그들 쪽에서 보이지 않게 호위를 붙여 생명의 위험은 없을 거라
했으니, 몽뇌산을 보낸다 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오히려 무림에 뛰어들어 갖은 고생을 하다 보면 오기(傲氣)도 생기고 무공 성취에 대해 타오르는 갈망도 생기리라.
감진택은 반 토막난 도를 보며 결심을 굳건히 다졌다.
“다녀왔습니다, 사부님!”
밖에서 몽뇌산의 기운찬 음성이 들리자 감진택은 얼굴을 근엄하게 굳혔다.
본래 예쁜 자식일수록 엄하게 대하는 법이니……
‘이게 다 널 위해서다!’
평소보다 훨씬 싸늘한 음성이 뱉어졌다.
“들어오너라.”
다음날 아침.
“사부님! 더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마당에 내려서는 몽뇌산의 얼굴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가지 말라고 하면 좋아서 펄쩍펄쩍 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잊지 말아라. 물건을 개봉 만금장에다 이달 말까지 꼭 전해야만 한다. 그 옥합에 든 물건은 매우 중요한 것이니 잘 간수했다가 만금장주에게 직접 전해야
한다.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준 신표를 보여 주며 이군명(伊君明)이란 이름을 대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감진택은 엄한 어조로 한 번 더 당부했다.
“예……”
마지못해 대답하는 몽뇌산을 보자, 감진택은 갑자기 이게 잘하는 짓인지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이다. 개봉에 도착해서 일을 마치고 시간이 남으면 백림서원이란 곳에 한번 가보거라.”
“서원에요? 거긴 왜요?”
시큰둥하게 물어 오는 몽뇌산을 힐끔 보며 감진택은 얼굴을 굳혔다.
“가서 위화란 녀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고 오려무나.”
“위화…… 라면, 사형의 이름이 아닙니까?”
“사형은 무슨! 누가 네 사형이란 말이냐? 제 아비마저도 버리고 뛰쳐나간 놈을 어떻게 본 문의 사람으로 인정한단 말이냐? 흥! 가당치도 않은……!”
몽뇌산은 불같이 화를 내는 사부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 찾아보라시는 건 또 뭐람?’
몽뇌산은 가만있다가 괜히 한소리 더 듣기 전에 서둘러 출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말씀대로 한번 가보죠 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사부님! 옥체보중(玉體保重)하십시오.”
“가보든지 말든지 그건 네 맘대로 하고, 그보다 물건 잘 전해야 한다. 내
얼굴에 먹칠하지 않으려거든 정신 똑바로 차려서 제대로 전하거라!”
인사를 올리는 몽뇌산에게 감진택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일침을 박았다.
이윽고 몽뇌산의 모습이 고갯길 너머로 사라지자 그의 입가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사시여! 부디 바라옵건대 저 아이의 앞길을 보우(保佑)해 주소서!”
감진택은 간절한 바램을 주문처럼 뇌까리며 오래도록 그렇게 서 있었다.
만력 사십년(四十年) 일월(一月) 칠일(七日)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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