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백호검(白虎劍) 3

조회수 12 15세 이상 이용가 등록 2026.08.19
8화. 백호검(白虎劍) 3


“멈추어라!”
정심한 내력이다.
장운대를 너머, 은선대까지. 상궁의 지척에 당도한 양영귀의 요녀는, 뒤 쪽에서 새롭게 들려온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파아아아!
반백의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긴 초로의 도인이 달려오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세 명의 젊은 도사들. 초로의 도인이나, 젊은 도사들이나 특이하게도 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
‘오행진인인가! 저것은 매화권사들로군!’
오행진인.
본래 도호는 전현(前賢)이다. 오행진기와 매화오행장의 달인으로 달리 오행진인의 칭호를 얻었으며, 권각과 장법에서 화산 제일을 다툰다는 고수였다.
‘와 있다니. 잘못된 정보였나.’
매화권사들은 전부, 강호에 나가 있는 상태라 들었다. 매화권사 하나의 전투력은 매화검수 개개인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했다. 상당한 전력. 그러나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매화권사들을 통괄한다는 오행진인은 주의할만한 상대였지만, 매화권사들은 신장귀들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산서(山西)에 나가셨다 들었는데, 오행진인께서는 어찌 이곳에 계시는지요.”
요녀의 말에 달려오던 오행진인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안면이 전혀 없음에도, 대번에 신분을 알아보는 안목은 차치하고서라도 장로 개개인의 근황까지 파악하고 있는 정보력은 다시없는 놀라움이다. 산서성에서의 일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 귀환한 것이 바로 오늘, 얼마 전이었다.
쫓아오면서 보았던 변고.
장운대에서 은선대까지 밀리고 있는 전황이 보여주듯, 이 습격자들은 무척이나 강했고, 또한 철저했다.
“알 바 없다. 요녀여. 어디에서 왔기에 이리도 요사한 것인가. 어느 문파에서 왔든, 그대와 그대의 문파는 이것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 두고 봐야 아는 것이겠지요.”
“방자하기 이를데 없다. 원현이 이 밑에 있었을 터인데, 어찌 보내 주었는지 알 수 없도다.”
“그러게요. 너무 짧았죠. 원현장로는. 이 십초를 채 못 버티시더랍니다. 하지만, 장로님의 피. 워낙에 깨끗한 피였던 만큼 양영귀가 굉장히 흡족해 했어요. 매화검수들의 피도 젊은이들의 것인 만큼 무척이나 좋아하더군요. 진인. 오행진력이 담긴 진인의 피는 그보다 더 맑겠지요?”
오행진인의 눈이 잠깐 감겼다.
원현의 죽음. 어렴풋이 느꼈던 바다.
사제가 어떤 이였던가.
정이 많으면서도 강직했던 이. 목숨을 내 놓지 않고서야 이런 무리들을 여기까지 이르도록 허용할 리가 없었다.
다시 뜬 오행진인의 눈에는 슬픔보다는 정기(精氣)가 이글거리고 있었으니.
창노한 음성, 오행진인의 입에서 강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끝없는 잡기(雜氣)와 요사한 사기(邪氣)로 온통 물들어 있는 여인이구나! 아깝지만 장대한 죽음이었을 터. 원현의 넋은 내가 위로하리라!”
텅!
상궁의 문 앞을 막아 선 오행진인이다. 진각 한 번에 땅이 울린다. 하늘을 우러러 펼쳐지는 오행진기의 기운, 난전을 벌이고 있는 제자들을 수습하는 매화권사들이 짜임새 있는 방벽을 이루기 시작했다.
“쓸 데 없는 수고일 거예요. 장로님 정도로는 안 되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양영귀의 요녀에겐 아까와 같은 여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흑포괴인, 신장귀들의 숫자는 이제 여덟이다.
두 명 있었던 매화검수들을 처리하면서 하나를 더 잃었다. 이제 겨우 이십 대, 혹은 삼십 대의 젊은 자들이면서 신장귀 하나를 못 쓰게 만든 매화검수다. 예상 밖의 일, 그래서 원현진인을 죽인 후, 직접 손을 썼다.
매화검수 두 명을 죽이고서 느꼈다.
여기에 동원한 호교무인들만도 이백 명, 벌써 반 수 가까이 쓰러졌다.
화산파는 강하다. 목적한 바야 이룰 수 있겠지만, 확실히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치리리링!
그녀가 손에 든 방울을 크게 울렸다.
흑의 무인들이 집결된다. 한 지점을 향하여. 오행진인 한 사람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신장귀들은 나를 따르라. 무인들은 오행진인을 막는다!”
“신장귀들은 나를 따르라. 무인들은 오행진인을 막는다!”
오행진인과의 정면 대결은 피하는 편이 좋다.
몇 십초 안에 제압할 자신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장운대에서 너무나 많이 지체한 모양이다. 그녀의 예상보다 빨리,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납시는군. 빨리 끝내야 되는데.’
서로 다른 방향, 멀리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두 개의 기운이 있다.
그녀는 그 기운들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
오행진인 이상의 강자들이다.
그들이 들어 닥치기까지, 아마도 일다경 정도 여유가 있을 터. 어쩌면 그보다 빠를 수도 있었다.
‘하나는 목영진인. 그리고 이 정도 기운.........하나는 옥허진인인가!’
먼저, 목영진인.
한 자루 목검으로 온 천하에 이름을 날린 절정의 검객이다. 그 기량은 오행진인을 훨씬 넘어서, 이미 초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수준이었다.
하나 더 있다.
봉우리 몇 개를 격한 먼 곳, 이 연화봉도 아닌, 운대봉 저 멀리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이 있다. 한 마리 금룡(金龍)이 꿈틀거리듯, 뭉클 뭉클 전해오는 기파. 접근하는 속도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다.
매화검신, 옥허진인이 틀림없다. 장문인인 천화진인에 버금가는, 또는 그 이상이라고까지 말해지는 초절정고수다. 목영진인까지는 상대할 수 있겠지만, 매화검신이라면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둘 만이 아니다.
화산 곳곳에 포진한 절정 고수들, 어느 정도 이상 연배의 화산 도사들은 대부분 화산 도문에 틀어박혀 세속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알려져 있으나, 이 정도 일이라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 사태를 알아채고 이 곳에 올라온다면 그 때는 이 정도 무인들과 그녀로서도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당도하기 전에 찾아야 된다.’
그녀가 신법을 전개했다.
오행진인의 옆 쪽, 상궁을 둘러 친 돌담 위를 향해서였다.
그녀를 잡기 위해 오행진인도 몸을 날렸다. 암향표 신법을 최대로 펼치는 오행진인, 그러나 제대로 되질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망한 것들!”
흑포괴인들이었다. 흑포괴인 둘, 거기에 더하여 흑의 무인들이 조직적으로 벽을 쳐 왔다.
퍼엉!
뛰쳐 오른 오행진인의 손에서 막강한 장력이 터져 나왔다.
격중당한 흑의 무인이 삼장이나 날아가 목을 꺾고 쳐 박혔다. 가공할 위력이다. 수십 근 사람 몸을 날려 버리는 힘, 화산 일절, 오행의 무인(武人)이란 이런 것임을 뚜렷이 보여주는 듯 했다.
“요녀여! 직접 나서거라!”
빠악!
공중으로 뛰어올라 앞으로 차낸 각법에 상체 전체가 뒤틀려 버린다. 흑포 괴인 둘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적도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무용. 혀를 내두를 무예였다.
“그렇게는 안 되겠네요.”
이미 담벼락 위에 올라가 있는 요녀다. 땅을 박차는 오행진인은 흑포괴인들이 휘두르는 손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빠악!
흑포괴인 하나의 신형이 뒤로 튕겨났다.
펄럭거리는 검은색 장포를 타 넘은 오행진인이다.
공중에서 내리찍는 일장을 막아내는 흑포괴인의 팔이 ‘우지끈’ 소리와 함께 뒤틀려 버렸다.
파라락! 꽈앙!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부러진 팔을 그대로 휘둘러 오행진인의 장법에 맞서 나갔다.
“크크크.”
오행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느낀바 그대로, 이 괴인들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일반적인 공격으로 끝장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텅!
“소진, 청람! 이곳을 지켜!”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며 매화권사들을 불렀다.
상궁으로 향하는 요녀를 막아야 하는 바, 그것을 맡을 사람은 오행진인 자신뿐이었다.
파바바바박!
뛰 쫓아 들어오는 흑의 무인들을 하나 하나 떨구었다.
암향표 신법의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후방의 적들을 차단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기(神技)라고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쾅!
그런 신기도 상궁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제 갈 길을 잃어 버렸다.
상궁 안에는 이미 들어서 있는 흑포 괴인들이 여섯이나 된다. 가로 막은 것은 셋. 오행진인은 철벽과도 같은 검은 그림자들을 맞이하여,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용맹하게 무공을 전개했다.
팡! 파파팡!
어려웠다.
흑포괴인들은 굉장히 강하다. 부상의 영향을 안 받는 비정상적인 신체와, 바위를 부술 만큼 강력한 일격들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타탁! 쐐액!
쏟아져 들어오는 흑의무인들도 문제다.
상궁의 바로 앞까지, 보무제자들과 선검수들의 방벽은 뚫려 버린 지 오래였고, 남아있는 방어선이라고는 오행진인과 매화권사들 셋이 전부였다.
‘헌데, 대체 왜 상궁까지!’
그 이유를 알아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궁 안 쪽, 장문인의 태사의를 둘러싸고 서 있는 네 개의 기둥을 부수고 있는 요녀와 흑포괴인들이 보였던 것이다.
‘설마!’
설마가 아니다.
기둥을 부수고 있다면 노리는 바가 자명하다.
그 곳에 감춰진 제어 불능의 병기들. 사방신검을 노리고서 이러한 짓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었다.
쿵! 콰쾅!
“안 돼!”
속절없는 외침이다. 부서지는 한 쪽 기둥 안으로부터 수십 장 부적에 덮여있는 푸른 색 목갑이 드러나고 있었다.
콰직!
두 번째는 붉은 색 목갑이다. 역시나 부적에 덮여있는 상태였다.
오행진인의 눈에 다급함이 떠오를 때, 세 번째 검은 색 목갑, 그리고 결국 네 번째 흰 색의 목갑까지 마저 바깥으로 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기둥 속 공간에 깊이 박혀있는 사색(四色)의 목갑.
암천 이십 팔 수의 별들을 수호하는 사신(四神)의 영령처럼, 언제까지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술식(術式)........! 잘도 봉인해 놨군요. 시간이 걸리겠어요.”
오행진인에게 던지듯 발하는 목소리엔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전에 없는 사나움이 엿보이고 있다. 이 상황이 매우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다. 기둥 곳곳을 살피고, 부적들을 살피며 뽑아내 운반할 방법을 고민하는 요녀의 모습, 오행진인의 손속에도 다급함이 깃들었다.
‘어서 돌파해야......!’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화산파 오행진인의 이름이 이렇게도 무력할 수 있다니.
생전 처음 느껴보는 절망감이다.
눈앞에서 사문의 비보(秘寶)를 강탈당하는 심정이란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이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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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 일조로 지키고 서 있는 길목을 한 번 더 돌파했다.
이번에는 오히려 첫 번째보다 더 어려운 싸움을 했다.
옆구리에 작은 검상, 오른 쪽 등에도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격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처음 어깨에 입었던 상처도 더 벌어진 느낌이었다.
‘아직 멀었어.’
확실히 부족했다.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자하진기의 공능 덕분이다.
무공의 정심함. 깨달음의 깊음 따위가 아니다.
그를 움직였던 것은 자하기(紫霞氣), 자연으로 빗은 사부님의 숨결일 따름이었다.
‘아프다.......’
익숙하지 않은 고통이다. 정신없던 고전(苦戰)의 와중에서는 느끼지 못했었지만, 한 숨 돌리고 보니, 세 군데 벌어진 상처가 굉장히 쓰리고 아팠다.
옷을 찢어 세 군데를 모두 동여맸다.
몇 벌 없는 도복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살기는 살은 모양이다.
저 앞에 누워있는 또 한 명 보무 제자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는 살아서 도복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구는 부릅뜬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창창한 삶의 저편으로 넘어가 버린다.
씁쓸함과 아릿함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훌훌 털어내듯, 달리려 할 때다.
뒤에서부터 느껴진 기척.
청풍이 급하게 몸을 돌렸다.
화아악!
날아들고 있는 흑의 무인이 있었다.
그것도 광폭한 숨결이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방금 쓰러뜨렸던 흑의 무인 중 하나.
기절한 줄 알았더니, 금새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흉흉하게 내쳐오는 협봉검이 곧장 청풍의 목덜미를 노려오고 있었다.숨이 턱턱 막히는 위급함 속에서, 청풍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 뻗었다.
파팟!
청풍의 오른손이 흑의 무인의 소매를 잡아챈다.
왼발을 축으로 반 바퀴 몸을 회전시키고는 딱 멈추며, 협봉검을 잡은 상대의 팔을 확 재껴버렸다.
모든 것이 무의식중에 이루어진 일.
청풍의 손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안 돼!’
멈출 수가 없었다.
워낙에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잡아 채 재껴버린 팔을 뒤집어 그대로 밀어 넣는다. 꺾여있는 손목, 흑의 무인이 잡은 협봉검의 검 끝은 그 자신의 몸을 향해 겨눠져 있었다.
푸우욱!
검 끝이 흑의 무인의 옷을 찢고, 갈비뼈 사이를 가르며 들어갔다.
심장을 꿰뚫고는 핏줄기를 머금으며 등 뒤로 솟아나온 협봉검이다.
‘죽는다.......!’
청풍은 흑의 무인의 두 눈이 흐려지는 것을 보며, 커다란 혼란을 경험했다.
‘죽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이지?’
흑의 무인의 몸이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급격히 생기를 잃어가던 두 눈. 곤두서듯 올라온 핏발과, 흔들리던 두개의 눈동자.
이미 거기에 없지만, 거기에서 그를 바라보는 듯 지워지지가 않는다.
‘죽......였다. 사람을!’
손이 떨리고 있었다.
태을미리장, 금나수의 변형.
손목을 잡아채 꽂아 넣으며 느꼈던 그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다.
옷자락이 찢겨지는 느낌. 그리고 스쳐가던 갈비뼈, 힘있게 박동하던 심장의 근육까지.
그가 못 쓰게 만든 상대의 육신이 손끝을 붙든다.
‘이런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
사람을 죽이는 것.
언젠가는 하게 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익숙해 질 것 같지 않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사부님.......’
청풍은 억지로 자하진기를 휘돌렸다.
첫 살인의 고통을 사부님께 이야기하기라도 하듯, 끌어올리는 진기에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벌써........가라 앉는가.’
지나치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다.
‘사람을 죽였음에도.......’
하지만, 역시나 자하진기의 효용은 스스로를 두렵게 만들 만큼 엄청나다.
빨라졌던 심장의 고동소리가 금새 제 속도를 찾고 있었다.
손도, 언제 그랬냐는 듯 떨림을 멈추며,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자하진기가 어루만지는 곳은 마음의 밭, 중단전이다. 언제라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무변(無變)의 공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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